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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45화 (4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45화

45화

오후.

석성진, 정동군 지휘소.

"좋소. 그럼 향후 작전에 대해 얘기를 하겠소."

"대군. 잠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위임한 일 중에 뭔가 특이한 일이 생겼나 보군. 말씀하시오."

양녕에게 양해를 구한 최윤덕이 말했다.

"사당들을 정리하려 주길궁에 가서 살펴보니, 신공에게 삼한을 정벌하라는 신탁을 내리고 또 도와주었다는 허망한 소리를 하는 곳이라 하치만궁에 한 것처럼 모조리 쓸어버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창고에 있던 것들은 모조리 가져왔는데, 그중 특이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무엇이오?"

"사당 뜰에서 나왔다고 하는 청동 창날과 꺾창날 여러 개입니다. 아군이 쓸 수도 없고, 녹이게 하기에는 귀한 것 같아 상자 하나에 모아만 두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양녕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구주도에서 발견되는 청동기들은 대부분 한반도 청동기와 연관성을 보인다. 후대까지 남겨두면 고고학이 발달한 다음 이곳이 조선의 영토임을 확고하게 하는 증거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귀한 것이니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맞소. 어디서 나온 것인지 적어서 첨부하고 전부 성복사에 주어 보관하게 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승천사는 어찌 되었소?"

성복사 얘기가 나온 김에 양녕은 이번에는 도군승 석휴에게 물었다.

"얌전히 지시에 따랐습니다. 남쪽 담장을 모두 헐고 나루를 만드는 것, 북쪽 담장 일부를 헐어 성복사와 연결하는 것 둘 다 진행 중입니다."

"좋소. 담장을 헐어 이은 김에 승천사를 완전히 성복사에 합쳐 없애는 것도 진행하시오."

"예?"

뜻밖의 말에 석휴가 깜짝 놀랐지만, 양녕은 미동도 하지 않고 태연하게 설명했다.

"승천사는 쇼니 가문이 세운 절이고, 송나라에 유학 갔다 돌아오던 승려가 하치만신의 가호로 무사히 돌아왔다 하여 하치만궁과도 관련이 깊은 곳이오. 아예 폐하지는 않아도 멀쩡히 남겨 둘 수는 없소."

"알겠습니다."

단호한 양녕의 말에 석휴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좋소. 그럼 다음 계획이오."

탁자 위에 구주도 지도를 펼친 양녕이 축후 지역을 짚었다.

"조금 전 호족들의 항복을 받아 축후가 우리 손에 들어왔소. 그러면서 축후 기준으로 동쪽 풍후의 오토모 가문, 남쪽 비후의 키쿠치 가문과 마주하게 되었소. 문제는 어느 한쪽을 먼저 치면 다른 한쪽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오."

양녕이 짚은 부분을 유심히 살피던 최윤덕이 말했다.

"풍후로 가는 길목은 동쪽으로 멀고, 비후로 가는 길목은 남서쪽으로 머니, 한쪽을 먼저 치면 다른 쪽에서 아군의 허리를 끊으러 들 수 있겠군요."

"그렇소. 그냥 허리를 끊는 것도 아니고, 축후 호족들이 다시 배반해버리면 꼼짝없이 포위당할 수도 있소."

"그냥은 수가 없어 보입니다.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키쿠치와 오토모 두 가문이 협력한다는 상황에서만 생기는 문제요. 그 전제만 깨면 되오."

양녕은 막대를 들어 비후 지역을 짚으며 말했다.

"키쿠치 가문은 지극한 남조 충신이오. 쇼니 가문은 잠시 북조 편을 들었던 적이 있지만 키쿠치 가문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고, 그때 축후와 비전 사이를 흐르는 천년강(치토세가와)에서 남북조가 붙었을 때는 아예 쇼니 가문과 싸웠을 정도요."

"그러면 아군이 쇼니 가문을 칠 때 도우러 안 온 것이 의심해서일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그렇게 남조 충신인 키쿠치를 북조 조정에서 비후 태수로 임명했다니 신기합니다."

"여전히 북조 세력인 조정에는 비협조적이지만, 비후 지역에서 태수를 할 만한 세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임명되었소. 그 정도로 크고 강한 세력이라는 얘기도 될 것이오."

"남조는 완전히 기울어 가고, 조정에서 태수직도 받았으면 마음을 바꿀 법도 한데 여전히 남조 충신이라면 앞으로도 계속 그렇다 봐야겠군요."

"그렇소. 그런데 오토모 가문은 좀 다르오. 지금 태수인 치카아키의 아비가 태수일 때, 구주도에서 남조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는 남북조 양쪽에 다 줄을 대려고 하였소. 그래서 자신은 북조에서 남조 세력으로 옮겨가면서 가독 자리를 동생에게 넘겨주고, 동생은 북조 세력이 되게 하였소. 대신 동생과 자신의 후손들이 교대로 가독을 잇기로 하였고."

양녕의 설명을 듣던 장수들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손으로 가문을 반으로 나눴단 말입니까? 당장 몇 대는 교대로 계승이 되더라도 언젠가는 터지지 않겠습니까?"

"무슨 계산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로 그리했소. 그래서 지금 태수 치카아키는 북조 세력이던 숙부가 작년 사망하면서 가독과 태수를 물려받은 상황이오. 원래대로라면 그 아비의 뜻에 맞게 남조 편을 들 차례지만 아비가 예상 못 한 것이 있소."

"남조 세력이 확 기울어 버렸지요."

"맞소. 설령 치카아키가 유지를 이어 남조 편을 들고자 해도, 이제 막 태수가 된 참이니 증명된 것이 없소. 주변에서는 이 자가 유지를 이어 남조 편에 설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북조 편에 설지 알 수 없는 것이오."

"평시라면 그냥 지켜보면 되겠지만, 지금은 정동군과 싸우는 상황이니 북조 편에 붙을 것 같기만 해도 남조에서는 배반자라 생각할 것이고, 남조 편을 유지할 것 같기만 해도 북조에서는 남조 잔당이라 여기겠군요."

"게다가 남조 세력인 쇼니 가문이 공격당할 때 의심한 키쿠치 가문이 같은 남조 세력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미츠사다와 스케츠구가 항복했다는 소문, 축후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정동군에 넘어갔다는 소식들이 퍼지면 퍼질수록 의심이 뒤섞여 더 큰 의심을 낳을 것이오. 그리고 거기서 나와야 하는 것이······."

막대를 슬쩍 들어 올린 양녕이 풍전 지역을 짚었다.

"쇼니, 오토모와 더불어 구주도 북부의 패권을 다투던 오우치 가문이오. 그들이 이 의심에 쐐기를 박아 키쿠치와 오토모 두 가문 사이를 갈라놓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오. 공들은 오우치 가문이 협상하러 올 때까지 점령지 행정을 맡아 주시오. 그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협상 이후에 정해질 것이오."

"어차피 서로 의심하느라 키쿠치와 오토모 가문 둘 다 아군을 먼저 공격하지는 않겠지만, 오우치 가문에서 오려면 좀 걸리지 않겠습니까?"

의아한 듯 묻는 장수들에게 양녕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금방 올 것이오. 오우치 모리하루에게는 그럴 수 있는 상황과, 그래야 하는 이유가 다 있으니까."

* * *

회의를 마친 양녕이 향한 곳은 양녕이 숙식하는 천막 바로 옆에 새로 지은 작은 천막이었다. 천막 한쪽에는 철거된 하치만궁의 편백나무 부재로 만든 관이 있고, 그 앞에서 향을 피워놓고 군승 하나가 염불을 외고 있었다. 비단옷을 입고 그 뒤에 앉아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는, 포내성 전투의 단둘뿐인 생존자인 아키와 요타로 남매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아키."

"예, 대군."

"요타로."

천막 안에 염불 소리만 들릴 뿐, 대답은 없었다.

"스케츠구."

"예, 대군."

스케츠구라 불리고서야 대답한 요타로의 모습에 양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넌 쇼니 스케츠구다. 그렇게 하라고 미리 시키지도 않았는데 하는 것을 보니 영특하구나."

"감사합니다."

요타로 옆에 나란히 앉은 양녕이 관을 향해 합장을 가볍게 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너희 어머니 다비식은 내일 오후에 있을 것이다. 유골은 수습해서 석성진 성복사에 안치될 것이야. 쇼니 미츠사다의 부인이자, 스케츠구의 어머니인 것으로 하여 모셔질 것이니 나중에 너희가 가서 성묘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복수는 언제부터 할 수 있나요?"

성묘보다도 복수를 묻는 요타로의 질문에 심호흡을 한 양녕이 말했다.

"네가 스케츠구 행세를 충분히 할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우선은 네가 기억하는 스케츠구의 말투, 몸짓, 버릇 등등을 최대한 그대로 따라해 몸에 익혀 두거라. 그동안 우리는 너에게 스케츠구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정리해 가르쳐 주겠다. 그럼 나는 너에게 가르칠 것을 정리하러 이만 가 보겠다."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 * *

요타로에게 가르칠 것을 정리하겠다며 나온 양녕은 진영 한쪽의 포로수용소로 갔다.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병사들과 문초 받는 무사들을 지나 가장 안쪽 천막에 들어간 양녕이 비웃듯 말했다.

"팔다리 힘줄이 성해 보이는 것을 보니, 어쭙잖게 탈출하려고 하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손발만 묶인 채 앉아 있던 쇼니 미츠사다가 양녕을 노려보았다.

"나는 쇼니 가문의 무사다. 구차한 짓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 그럼 고분고분해진 김에 너희 가문의 죄를 반성할 생각은 있느냐?"

"구차한 짓을 하지 않는다는 내 말을 못 들었느냐?"

"어찌 이리도 기회를 걷어차느냐? 좋다. 어차피 시간 낭비일 테니 앞으로 너에게 반성하냐 물을 일은 없을 거다."

비웃으며 말하던 양녕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말을 꺼냈다.

"어제 너희 가문의 근거지, 우라노 성을 함락시켰다."

그 말에 미츠사다가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네 동생 요리후사는 최후의 순간에 몇몇 무사들을 이끌고 탈출했고, 네 부인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무래도 탈출이냐 옥쇄냐를 두고 요리후사와 언쟁하다 칼에 맞은 것 같다."

"어째서 요리후사가······. 아니, 내가 너희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어차피 넌 풀려나지 못할 놈인데 거짓을 말해서 무엇하겠느냐? 믿기 싫으면 말거라. 그리고 네 아들 스케츠구는 우리가 확보했다."

아들 얘기가 나오자 미츠사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케츠구는 무사한가?"

"무사하다. 그 아이가 스케츠구가 맞다면 말이지."

"무슨 소리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는 미츠사다를 앞에 두고, 양녕은 태연하게 말했다.

"요리후사가 스케츠구를 데리고 도망가면서 적당한 꼬마를 골라다가 스케츠구 행세를 시키고 남겼는지 어찌 아느냐?"

"내게 데려와다오. 내가 보면 알지 않겠느냐."

미츠사다의 말에 양녕이 피식 웃었다.

"네가 그 아이를 보고 아들이 아닌데도 맞다고 해 버리면 우리는 쇼니 가문 계승자인 스케츠구를 그대로 놓치게 되지 않느냐? 정체가 확인될 때까지는 만나게 해줄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믿겠느냐?"

은근슬쩍 만나게 해줄 것처럼 흘리자 바로 미끼를 문 미츠사다에게 양녕이 비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너와 네 아들에 대해 아는 것들, 둘만 아는 기억 같은 것들을 모두 말해라. 네 아들에게도 같은 것을 물어보고 두 가지를 대조해 일치한다면 인정해 주마. 요리후사가 급조한 아이라면 그렇게까지는 모를 테니 이러면 되겠지."

"알겠다. 지금 바로 말하면 되나?"

"기다려라. 얘기할 내용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데 내가 다 듣고 기억할 수는 없지. 여봐라, 지필연묵을 가져오고 받아 적을 이도 데려와라. 그다음 시작하겠다."

"예 대군."

옆에 있던 병사가 지시를 받고 나가자 양녕이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그리 명예로운 죽음을 좋아하는 너희도 자식은 살아서 만나보고 싶은 모양이구나. 자식이 하나뿐이라 더 그런 것이냐?"

"무사는 명예를 중시하는 것이지 짐승이 아니다. 자식이 하나면 아끼고 둘이면 반씩만 아끼겠느냐? 스케츠구 위로도 여자아이가 하나 있다."

유도 질문에 바로 성과가 보이자 양녕의 눈이 조용히 빛났다.

"딸도 있었느냐? 우라노 성에서는 못 본 것 같은데?"

"왈가닥이라 비단옷을 입히면 남아나지 않아 평소에는 화려하지는 않아도 튼튼한 옷을 입혔으니, 차림새로는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말을 하면서 은근히 눈치를 살피는 미츠사다를 본 양녕이 피식 웃었다.

"알겠다. 그럼 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로 얘기하거라. 스케츠구가 진짜인지 확인하면서 성에 있던 여자아이들 중에 네 딸을 찾아보고, 살아 있으면 만나게 해 주마."

본심을 들킨 수치 때문인지, 고맙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서인지 미츠사다가 고개를 숙였다.

"재밌는 일이군. 네 조상들이 무참히 죽이고 포로로 끌고 간 삼한 백성들 중에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그것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네놈이 자식을 보고 싶어 이리 약해지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양녕은 그 말에도 여전히 입을 다문 채 고개만 더 푹 숙이는 미츠사다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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