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44화 (44/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44화

44화

"그나저나 이제 다자이후를 점령하면서 축전 지역은 교섭담당인 오우치 가문 영향권을 제외하고는 다 점령했군요. 점령지도 넓어졌고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이제 쇼니 가문 하나가 아니라 여러 세력들과 맞닿게 되었으니 부대를 나누어 주둔시키는 것이나, 이후에 어떻게 할지도 회의를 열어야겠습니다."

이종무의 말을 들은 양녕은 크게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여기 다자이후는 산맥 사이로 난 좁은 길목이니 병력이 많이 필요하거나 방어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오. 그것보다도 중요한 게 있소. 방침 회의를 하기 전에 미리 해야 할 일이오."

"무엇입니까?"

"축전 남쪽, 축후 지역 호족들을 다 불러 모아 주시오. 그들과 할 얘기가 있소."

양녕의 지시에 이종무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축후의 호족들이면 인접한 풍후의 태수인 오토모 가문을 주군으로 삼은 이들이지 않습니까? 부른다고 과연 오겠습니까?"

"올 것이오. 뭐, 안 와도 상관은 없소. 일단 모아 주시오. 장소는 쇼니 가문이 쓰던 여기 포내(우라노)성이 좋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아침 바로 병사들을 보내 불러보겠습니다."

* * *

다음 날 오전.

포내성, 구 쇼니 가문 저택.

"대군. 정말로 호족 대표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것도 오라고 한 호족들보다도 몇 명 더 온 것 같습니다."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말하는 이종무에게 양녕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호족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그새 듣고 따라왔나 보오. 잘 되었소. 그들도 합석시키시오."

"이미 다 방에 기다리게 했습니다. 의자도 지시하신 대로 두었습니다. 바로 가시면 됩니다."

"고맙소. 그럼 바로 갑시다."

양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갑옷을 완전히 차려입은 상태로 이종무와 함께 호족들이 모여있는 방으로 향했다. 스케츠구와 요리후사가 자결했던 바로 그 방이었다.

"오래들 기다리셨소. 내가 바로 조선의 왕자이자 정동군 도원수인 양녕대군이오."

한 단 높은 상석에 올려놓은 의자에 앉으며 말한 양녕이 앞쪽을 보자 최대한 좋은 옷을 입고 온 호족들이 쭉 바닥에 앉아 있었다.

"나 혼자만 의자에 앉아 있어서 좀 그렇지만, 조선인들은 왜인들과 달리 바닥에서만 생활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 그러니 이해해 주시오."

조선 초기라 상류층에서는 입식 생활이 익숙했던 것은 맞지만, 굳이 양녕은 의자에 앉고 호족들은 바닥에 앉힌 본 목적은 세력의 우위를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방 청소가 덜 되었는데, 치울 시간도 없고 마땅한 다른 장소도 없어서 부득이하게 여러분을 여기 불렀소. 양해해 주시길 바라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양녕의 말에 제일 좋은 비단옷을 입고 온 호족이 대답했다.

어차피 양쪽 다 이것이 기선제압임은 알고 있었다. 벽에 튀고 바닥에 스민 피는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쉽게 치울 수 있는 피 묻은 병풍들까지 그대로 있는 것은 이 방에서 쇼니 가문이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을 호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깔끔하고 중립적인 곳에서 모이고자 한다면 바로 근처에 사찰인 안락사도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또 눈치챘으면서도 여기에 모였다는 것은, 호족들도 양녕과 정동군의 우위를 인정하고 숙이겠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좋소. 그러면 나도 바쁘기도 하고, 어차피 다들 짐작하고 오셨을 테니 복잡하고 길게 말하지 않겠소. 이미 내가 슈고들에게 보낸 서신 내용은 다들 아실 것이오. 다들 투항하시오."

직설적으로 던진 양녕의 말에 이번에는 아까와 다른 호족이 말했다. 호족들 가운데서 저마다 주도권을 쥐고 싶어 하는지, 말할 기회를 놓친 이들의 얼굴에 아쉬움이 얼핏 감돌았다.

"저희가 대군께 대항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분고의 슈고인 오토모 가문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어서 당장 신의를······."

"뭘 그리 충성스러운 것처럼 말하시오. 어차피 다 알고 있으니 시간 끌어 가며 협상하려 하지 마시오."

호족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린 양녕이 말을 이었다.

"그나마 자주 섬긴 것이 오토모 가문일 뿐, 우츠노미야, 시마즈, 이마가와 등등 상황에 따라 섬기는 가문을 바꿔 왔던 거 알고 있소. 조선이 치쿠젠을 완전히 손에 넣은 큰 세력이 되고 치쿠고와 경계를 맞대기까지 했으니 조선을 주군으로 섬기는 것에 그리 큰 문제도 없지 않소."

고개를 살짝 들고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호족들을 둘러보며 계속 말했다.

"치쿠고가 강과 산으로 적당히 둘러싸이고, 주변 세력들 가운데 여기까지 힘을 투사할 이들이 없는 것은 알고 있소. 덕분에 호족들이 합치지 못하고 겨루면서도 다른 슈고를 주군으로 섬기기만 해도 존속할 수 있었지. 그러나 강과 산이 그렇게 험한 것도 아니고, 주변 세력이 투사할 만한 힘이 있는데도 계속 그런다면 각개격파 당해 사라질 뿐이오."

원래 역사에서는 이 이후 유력한 15개의 성주 가문을 축후15성이라 따로 칭할 정도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지만, 전국시대에 돌입하고 주변 세력들이 강해지자 하나둘 흡수당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 사실은 양녕만 알지만, 당사자들도 가능성은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항복하면 대우를 해주고, 저항한다면 몰살할 것이오. 협상하러 모은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않으려 모은 것임을 기억하시오."

양녕의 으름장에 침을 꿀꺽 삼킨 조금 전 호족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희가 저항하려 하거나 조선을 주군으로 섬기기 싫어서 머뭇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투항한 후에는 대군께서 보내신 서신대로라면 사병을 폐지해야 하는데, 그러면 스스로 지킬 수단이 없어지는 것이 걱정이라 그랬습니다."

"어차피 지금도 병사를 많이 동원하지는 못하지 않소. 한 가문에서 많이 뽑아 봐야 100명이 최대 아니오? 어차피 정동군도 치쿠고에 병력을 보내 주둔해야 하니 정동군이 지켜주면 되오. 그리고 무기를 다 가져갈 것도 아니고, 앞으로 추가로 병사를 육성하지만 않으면 되오."

정동군이 자신들보다 강하다고 생각해서 순순히 숙이고 이곳에 모인 호족들이었으니, 정동군이 지켜 주는 게 자신들의 사병으로 방어하는 것보다 낫다 생각할 것은 당연했다.

저마다 계산에 들어간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호족들을 보고, 양녕은 회유책도 하나 던졌다.

"오늘 오신 분들에 한해서, 순순히 항복하고 조선의 신하가 된다면 내 주상 전하께 청을 올려 여러분에게 성씨를 내려 달라 하겠소. 조선의 백성으로 성씨가 있는 자는 과거라는 시험에 붙으면 조정에서 일할 수 있고, 승진 제한도 없소."

"잠시 생각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저도 조금 생각한 다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시오. 너무 오래는 하지 말고."

농민들은 세금을 정할 때 회의를 했지만, 오히려 더 높은 신분인 호족들이 중요한 상황에서 서로 견제하느라 각자 따로 생각하는 것을 보고 양녕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저들이 무사고 호족인데 성씨가 없습니까? 이름 앞에 두 글자씩 쓰는 것이 성씨 아니었습니까?"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이종무가 양녕에게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정확히는 성이 없는 것이오. 성은 왜황에게서 분가해 나오거나 하사받아야 있는 것이고, 씨는 영지나 관직의 이름을 따서 지어지는 것이오. 쇼니 가문도 성은 후지와라고 씨가 쇼니였소. 저들은 딱히 중앙과 연이 없는 토호들인 탓에 씨는 있지만 성은 없소."

"성과 씨가 구분된다니. 중국에서는 옛날에 사라졌고 삼한에서는 아예 자리 잡지 못한 것을 왜인들은 아직도 쓴다니 신기합니다. 그러면 저들이 씨라고 하는 것은 결국 본관이로군요."

"그렇소. 저들도 선조가 옛날 유명한 누구의 숨겨진 자식이다느니 하면서 성이 있다 주장을 하긴 하지만, 어차피 큰 지역을 다스리기 위한 권위가 필요한 태수들과 다르게 호족끼리만 아웅다웅하는지라 적극적으로 사칭하지는 않소."

"그렇다면 성에 욕심이 없는 것 아닙니까? 대군께서 말씀을 꺼내자마자 고민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얻기 어려운 것이고 주변에도 다 없으니 집착하지 않았던 것이지 준다고 하면 얘기가 다르지 않겠소. 주상께 직접 하사받은 성이라면 오히려 그 진위가 의심받기도 하는 어지간한 태수들의 성보다도 근거가 확실하니 큰 권위가 되오. 게다가 일본 조정의 신하들은 몇몇 가문에서 세습할 뿐만 아니라 옛 신라의 골품처럼 그 안에서도 승진 상한이 있소. 이들에겐 하늘의 별이지."

양녕의 대답을 들은 이종무가 알겠다는 듯 끄덕이며 말했다.

"결국 호족들이 사병을 키우는 것도 출세하려는 목적인데 열심히 노력해 봤자 기껏해야 태수니, 차라리 성씨를 받고 조선의 과거를 보는 것이 나을지 고민할 만하군요."

"그렇소. 자, 내가 오후에 일이 있어 시간이 없으니 빨리들 결론 내시오!"

이종무의 질문에 답해 준 양녕이 호족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호족 하나가 잽싸게 달려와 양녕 앞에 자세를 낮추고 말했다.

"대군께서 기회를 주시고 또 조선의 주상 전하께 성씨까지 청하여 주신다 하니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대군께 투항하겠습니다."

"저희도 투항하겠습니다!"

"저희도 조선의 백성이 되겠습니다!"

조선 편에 붙지 않으면 토벌당하거나 운 좋게 살아남아도 성을 하사받은 다른 호족들에 뒤처질 상황에서, 한 명이 먼저 나서자 고민하던 이들도 다급하게 뛰어와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좋소. 그럼 여기에 항복한다는 내용을 적고 이름을 쓰고 수결해서 주시오. 도장을 가져왔으면 도장도 찍으시오."

양녕이 미리 준비해 온 종이 더미를 꺼내 들자 저마다 먼저 받아 써서 내려고 서로 눈치를 보는 가운데 호족 하나가 말을 꺼냈다.

"대군께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오?"

"지금은 아직 주변이 혼란스럽고 오토모 가문이 자신들을 등졌다고 저희에게 보복할까 두려우니, 사병을 잠시간만 가지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다른 호족의 시선까지 집중된 상황에서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을 들은 양녕은 흔쾌히 말했다.

"그러시오. 어차피 개인이 무기를 가지는 것이 조선 법에 어긋나지도 않고, 호족들의 주 전력인 무사들더러 싸우는 법을 잊으라고 할 수도 없지 않소. 다만 군사훈련만 추가로 더 하지 않으면 되오. 다른 이들도 그리하시고."

"감사합니다, 대군. 그럼 내용에 그것도 쓰겠습니다."

그 호족이 꾸벅 인사하며 은근슬쩍 먼저 종이를 받아가서 먼저 쓰기 시작하자, 다른 호족들도 그쪽으로 눈을 한 번씩 흘기고는 종이를 받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는 양녕에게 이종무가 말했다.

"순순히 항복하는군요. 호족 소집으로 한 번으로 축후 지역을 통째로 손에 넣으시다니, 역시 대군께서는 대단하십니다."

"별것 아니오. 군현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보내기 전까지는 그냥 상전으로 모시겠다는 언질만 받아놓은 정도고, 축후는 구주도의 아홉 지역 중에서도 가장 작은 곳이지 않소."

"어지간한 태수들과 호족 관계도 그렇지 않습니까. 뒤에 하신 말씀은 저도 동감합니다. 정동군이 축전과 축후를 얻었다고는 하나, 축전은 오우치 세력을 빼고 절반이고 축후는 작은 지역이니 솔직히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으나 최선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이종무의 말을 들은 양녕이 껄껄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손자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으신데 내 어찌 공을 전쟁터에 오래 붙잡아 두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주 잘 풀리면 내년 여름. 늦어져도 내년 이맘때가 되기 전에 구주도 전체가 조선의 땅이 될 것이오."

진지하고도 여유로운 양녕의 표정을 보고, 이종무는 조금 전 양녕이 말한 '별것 아니오'라는 말이 겸손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