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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43화 (4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43화

43화

저택 내부 수습을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앞뜰로 나온 양녕에게 따라온 최윤덕이 조용히 물었다.

"저 아이와 스케츠구가 나이와 체구가 비슷하긴 하지만, 얼굴 아는 이들이 보면 가짜인 게 들킬 우려가 있지 않겠습니까?"

"왜인들은 나이가 차면 사찰이나 사당에서 관례를 치르는데, 그 나이가 되지 않았으니 근처 사찰이나 사당에서는 잘 모를 것이오. 또 높은 사람이 지나가면 일하던 농민들도 고개를 조아리고 다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왜인들의 예법이니 농민들도 모를 것이오. 그리고 정작 얼굴을 아는 측근들은 저들이 자기네 칼로 모두 죽이고 죽었으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소."

"그렇다면 본인만 스케츠구 행세를 잘하게 하면 되겠군요. 어차피 사내아이라 덩치가 커지고 수염도 나고 하면 모습이 확 달라지는 법이니 그 뒤로는 혹여 진짜 스케츠구의 얼굴을 알던 이들이라도 헷갈릴 것입니다. 그나저나 참 역설적인 일이로군요. 식솔들을 안 죽여서도 아니고, 다 죽여서도 아니고 다 죽이지 못해서 결국 이렇게 그토록 추구하던 명예를 잃을 빌미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그러려면 우선 저 아이가 진정되는 대로 스케츠구 행세를 제대로 할 수 있게 가르쳐야 할 것이오. 저 아이와 그 누이가 알고 있는 것들, 저택에서 나온 서적의 내용들, 그리고 이미 잡혀 있던 포로들에게서 알아낸 것들을 다 합쳐서 어떤 것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정리해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러면 실토한 포로들은 살려 둘 수 없겠군요. 그럼 일단 스케츠구 행세는 그다음에 가르친다 쳐도 어떻게 스케츠구가 살아남았나 하는 내용은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밖에 다니는 것이야 충격을 받거나 다쳤거나 해서 늦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미리 퍼뜨려야 하니까요."

"맞는 말이오. 그럼 어디……."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하던 양녕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까 스케츠구가 성문 위에 나왔을 때 내가 외친, 쇼니 가문이나 고위 무사의 목을 바치면 살려 준다는 말에 내분이 일어나 서로 다투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라고 하시오. 그 와중에 성문이 뚫리고 조선군이 밀고 들어오자 요리후사가 혼자 살아남겠다고 측근 몇몇을 데리고 성을 탈출하면서, 달아난 사실 자체나 자기가 도망쳤을 법한 곳을 조선군에 알릴까 봐 식솔들을 모조리 죽이고 간 것이오."

요리후사를 도주자로 만들면서 식솔들의 죽음까지 연결되게 만든 양녕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 뒤로 요리후사가 종적을 감춘 것이 되어야 하는데, 요리후사의 갑옷은 다른 갑옷들과 다른 특징과 화려함이 있어 알아보는 이가 나올 수 있으니 비밀리에 아군 진영 대장간으로 가져가 완전히 분해하고 태우고 녹여 없애야 할 것이오. 그리고 병사들에게 은밀히 지시를 내려서 요리후사를 찾게 하시오. 요리후사가 죽었다는 소식이 먼저 더 멀리 먼저 퍼지겠지만, 요리후사를 찾는다는 소문도 자연스럽게 새어나갈 것이오. 그러면 그 소문을 들은 이들은 우리가 요리후사를 놓쳤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면 요리후사가 달아나고서도 다른 무사들은 모두 결사 항전하며 죽어 가고, 맨 마지막에 남은 어린 스케츠구는 쇼니 가문이 왜구 짓을 했다는 사실을 대군께 듣고 충격을 받아 항복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소. 그럼 바로 실행에 옮겨야지. 일단 누가 살고 누가 죽었는지를 혹여라도 확인하려 드는 이가 있을 수 있으니 시체를 조선식으로 매장할 수는 없소, 모든 시체는 화장하고 뼈는 부수어서 강에 뿌리시오. 왜인들의 장례법에 맞춰 주었다 하면 될 것이오. 또 저 아이들 어머니는 저택에서 가장 좋은 여인 옷을 찾아 입혀서 엄숙하게 화장하시오. 그 여인이 미츠사다의 아내인 것으로 하고, 자결한 것이 아니라 도망치려는 요리후사를 꾸짖다 칼에 맞아 죽은 것으로 하시오. 스케츠구가 항복하며 요청한 것이라 하여 그 유골은 수습해 항아리에 담아 석성진의 성복사에 모시도록 하시오. 저 아이들에게도 비밀을 지키게 하면서 알려주면 그리워질 때마다 제 어미의 무덤을 찾아갈 수 있겠지."

"그리하겠습니다. 그러면 미츠사다의 진짜 아내는 시종들 옷을 입히고 시종들과 함께 화장해서 처리하겠습니다. 다른 것들은 어떻게 할까요?"

"공께서 이미 여러 번 처리해보셨으니 공에게 전적으로 맡기겠소. 이 성을 어떻게 쓸지는 나중에 정할 테니 일단 내버려 두고, 무구류, 교역품, 사치품 등등은 다 이전에 했던 대로 분류하면 되오. 대신 서적류는 빠짐없이 모두 모아서 내 방에 놓아주시오. 진짜 스케츠구가 되게 가르칠 내용을 만드는 것 말고도 여러모로 필요하오. 이 정도 지시면 충분할 것이오."

양녕이 어느새 병사가 데려온 자신의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옆에는 이미 이종무가 말에 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되 애매한 것이 나오면 따로 빼두었다가 대군께 여쭙겠습니다. 그런데 전투도 다 끝났는데 어디 가십니까?"

"정동군단장하고 병사들을 좀 데리고 이 옆에 있는 천만궁이라는 곳에 갔다 올까 하오. 그럼 난 해지기 전에 끝내야 하니 서두르겠소."

* * *

다자이후 천만궁.

"천만궁이라는 이름만 듣고 사당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여기는 사찰인 것 같습니다?"

경내 곳곳에 가득한 불교적 요소들을 둘러보던 이종무의 질문에 양녕이 답했다.

"맞소. 원래는 안락사라는 절에 부속된 사당이 천만궁인데, 사당이 사찰보다 유명해져서 그냥 지명하고 이어서 다자이후 천만궁이라 불리게 된 것이오."

"희한한 일이로군요. 누구를 모신 사당이길래 본체인 절보다 유명합니까?"

"스가와라 미치자네라고 하는 옛 일본국 문신의 무덤이자 사당이오. 조선으로 치면 우의정에 해당하는 자리까지 올라갔던 사람이오."

"일본에서 높은 벼슬을 했다면 중앙 귀족 아닙니까? 굉장히 변방에 묻혔군요."

"모함당해서 여기로 좌천되어 몇 년 뒤 죽어 이곳에 묻혀서 그렇소. 그가 죽은 뒤, 그를 모함했던 좌의정이 젊은 나이에 죽고, 모함에 가담했던 자는 늪에 빠져 죽었소. 당시 왜황의 태자와 태손도 차례대로 죽고, 나중에는 궁궐에 벼락이 떨어져 불이 나 신하들도 여럿 죽고 다쳤소. 그 일로 충격을 받은 왜황도 곧 죽었소."

"좌천당해 객사한 미치자네의 원혼이 그랬다는 얘기가 나왔겠군요."

양녕의 얘기를 가만히 듣던 이종무가 말했다.

"맞소. 그래서 영의정에 해당하는 관직을 추증하고, 여기 안락사에 있던 묘와 사당의 격을 높여 왜황의 선조를 모신 사당에 붙이는 것처럼 궁이라는 글자를 붙여 이름을 짓고, 더해서 천만대자재천신이라는 신으로서의 이름도 내려 원혼을 달래려 하였소."

"조정에서 신의 이름을 내렸단 말입니까? 하긴, 하치만은 출가한 귀신을 조정에서 보살로도 임명했는데 요절한 좌의정을 신으로 임명 못 할 것도 없겠지요."

이종무의 말에 양녕이 껄껄 웃는 동안 어느새 산문 앞에 도착한 양녕과 이종무는 말에서 내려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양녕이 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본전 건물 앞에 나와 있던 승려 하나가 옆에 신관을 대동하고 양녕에게 다가와 합장했다.

"그대가 이곳의 주지요?"

"그렇습니다."

성복사 주지였던 양예 만큼은 아니더라도 저자세로 공손하게 대답하는 주지에게 양녕이 대뜸 물었다.

"이곳 안락사의 본존불은 누구요?"

"이곳 안락사는 십일면관세음보살을 모신 절이지만, 스가와라 미치자네 공을 천만대자재천신으로 모신 사당이기도 합니다."

주지의 대답을 들은 양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알던 대로군. 지금 여기는 사당의 격이 너무 높아 사찰이 잊혀질 지경이니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오. 따라서 외부에서 여기를 부르는 것은 천만궁 대신 안락사라고만 하고 정동군 도군승의 관할에 둘 것이오. 사당은 그 이름을 천만궁에서 천만당으로 바꾸고, 천신이라는 거창한 이름은 폐지하고 스가와라 공이라고만 부르시오. 또 사당의 규모와 바치는 제사는 전부 조선의 예법에 따라 줄이고 바꿀 것이오. 이제 조선의 땅에 속하게 되었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그 말에 신관이 깜짝 놀라고, 주지도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본 양녕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어디 빠져 죽거나 병에 걸리거나 벼락에 맞을까 봐 두려워서 그러시오?"

"원혼을 달래러 지어진 사당인지라 조심스러워서 그렇습니다."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는 주지에게 양녕이 다시 직설적으로 말했다.

"나는 유학자인지라 괴력난신은 믿지 않소. 그대들은 믿는지 모르겠으나, 설령 미치자네의 원혼이 저주를 내리더라도 내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대들에게 시킨 것이니 벼락이 떨어지면 나에게 떨어졌지 그대들에게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오."

이어서 신관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미치자네도 자신을 내쳐 놓고서는 재앙이 닥치고 사람이 죽어 나가고야 부랴부랴 벼슬을 내리고 이름을 높여 준 왜국 조정에게 귀신의 예로 모셔지기보다는, 그 왜국 조정을 벌하러 온 우리에게 유학의 예로 모셔지는 것이 한학자로서도 더 기쁘지 않겠소?"

"그래도 그것이 몇 백 년을 이어 온 사당의 이름과 예법인지라……."

주지가 여전히 머뭇거리자 양녕이 여유로운 표정을 거두고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쇼니 해적 놈들이 삼한과 중국 땅에서 약탈해 온 온갖 물건들을 제 죗값을 덜고자 여기 시주한 것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소. 여기 바쳐졌다는 것 자체가 해적질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내버려 두는 것이지만, 그걸 파악 못 하고 조선에 반항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오."

"알,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미치자네의 원혼은 본 적 없지만, 눈앞의 양녕이 조선군을 이끌고 쇼니와 시부카와 군대를 전멸시키고 우라노 성도 점령한 것은 직접 보고 들었으니 위압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바짝 얼어붙은 주지가 대답하고 옆에 서 있던 신관도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한참 미심쩍은 표정으로 보던 양녕이 주변을 슬쩍 살피고는 작게 물었다.

"그럼 그렇게 하고, 혹시 우리가 우라노 성을 공격하는 동안 무사 몇이 도망가는 걸 못 봤소?"

진짜 모르는 눈치인 것은 물론, 무슨 내용인지 감도 잡지 못했지만 양녕이 작게 물어봐서 덩달아 작은 목소리가 된 주지가 대답했다.

"못 봤습니다. 혹시 어떤 갑옷과 투구를 입었는지 알려 주시면 다른 승려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아니, 못 봤으면 됐소. 그렇게 할 것까지는 없소. 그리고 내가 이 질문을 했다는 건 지금 들은 두 사람만 알고 있고, 절대로 어디 새어 나가지 않게 하시오."

"알겠습니다."

"좋소. 그럼 사당을 고쳐 짓고 예법을 바꾸는 것은 내 차후에 사람을 보낼 것이나, 사당 이름을 천만당으로 부르는 것과 천신이라는 이름을 폐지하는 것은 지금부터 당장 시행하시오. 그럼 다음에 또 오겠소."

대답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한 양녕이 이종무와 함께 산문 밖으로 나왔다.

"사찰 반 사당 반이라 그런지, 생각만큼 저항하지도 않지만 생각처럼 고분고분하지도 않습니다. 혹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감시 병력을 보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하는 게 좋겠소. 조금 전에 점령한 성에 다시 가서 바로 병사들을 꾸려 보내면 될 것 같소."

그렇게 말하며 양녕과 이종무가 각자 말에 타서 성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잠시 묵묵히 타고 가던 도중 이종무가 양녕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저는 맨 처음 궁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당에 가신다길래 거기도 주춧돌도 안 남기고 없애시려는가 했습니다."

그 말이 싱긋 웃은 양녕이 말했다.

"여기는 다른 궁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당처럼 왜황의 선조를 모신 곳도 아닐뿐더러, 왜황에게 좌천당한 이를 모신 사당이오. 없앨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겨 두면 좋은 점이 있소. 만일 내가 이곳을 점령하고 사당의 격을 낮추었는데도 나에게 별일이 안 생긴다면, 괴력난신을 믿는 왜인들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요."

"아까 신관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미치자네의 원혼이 왜국 조정에게 신으로 추앙받는 것보다 조선에게 예법대로 모셔지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것이 되거나, 다른 하나는……."

잠시 생각하던 이종무가 말을 이었다.

"질병과 벼락으로 재앙을 내려 천신이라고까지 불리던 원혼보다 대군께서 더 강해서 원혼이 함부로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되겠군요."

"바로 그거요. 그런 노림수가 있어서 남겨 둔 것이오."

양녕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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