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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42화 (42/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42화

42화

방 가장 안쪽, 다른 방바닥보다 한 치가량 높여 지은 상석 정중앙에는 미츠사다의 아들, 스케츠구가 옆으로 쓰러진 채 있었다. 투구와 갑옷은 옆에 가지런히 벗어 놓았고, 배에는 단도가 박혀 있었다. 목은 예리한 칼로 단숨에 베었는지 가죽 약간만을 남기고 깨끗하게 잘려 몸통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스케츠구의 머리가 향한 반대쪽 방향, 상석 옆자리에는 마찬가지로 갑옷을 벗어놓고 자기 배를 단도로 깊게 가른 요리후사가 숨을 몰아쉬며 앉아 있었다.

"저기 죽어 있는 것은 아까 성문 누각에서 본 스케츠구고, 그럼 네놈이 미츠사다의 동생인 요리후사겠군. 마지막까지도 상석에 앉힌 조카가 할복할 때에는 목을 쳐 고통을 덜어 주었으나 정작 네 배를 가르고서는 목 쳐줄 사람이 없어 죽기만을 기다리는구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방을 둘러보며 양녕이 말을 이었다. 방 안은 스케츠구의 잘린 목에서 뿜어나온 새빨간 피가 새하얀 장지문이며 회칠한 벽에 요란하게 튀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왜인들은 흰색과 붉은색을 숭상한다더니, 이렇게 흰 방에 붉은 칠도 사방에다 해 주고 적장의 수급도 대신 잘라 주니, 환대도 이런 환대가 없구나."

양녕의 비아냥을 들은 요리후사가 할복의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입을 열었다.

"마음껏 떠들어도 좋다. 너희에게 산 채로 잡히는 굴욕보다는 나으니까."

비장하게 말하는 요리후사를 내려다보며 양녕이 말했다.

"여기 성에 있던 무사가 아닌 사내와 여인, 아이들도 너희가 죽였느냐?"

"그렇다. 오래도록 대를 이어 쇼니 가문을 위해 일했던 이들이 너희에게 붙잡혀 치욕을 당하느니 고결하게 죽는 게 낫지 않겠느냐?"

고통에 가늘게 떨리는 요리후사의 말에 양녕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너희 조정이 뿌리로 삼는 삼한 땅의 옛 나라인 백제가 멸망할 때도 계백이라는 이름의 그런 충신이 있었지. 패배하여 잡히면 치욕을 당하게 될 거라면서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전장에 나섰고, 스스로 예상했던 대로 그 전장에서 패배해 죽었다. 물론 내 스승께서는 별로 좋게 평가하시지 않은 인물이지만 말이야."

"명예롭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안목도 없는 그 스승이란 자의 얘기를 들으니 제자가 왜 이 모양인지도 알 것 같구나."

요리후사의 도발을 들은 양녕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내 스승께서 살아계셨다면 너는 더 좋지 않게 평가하셨을 게다. 구차하게 항복하고 끌려가서 소식이 없어졌는지, 최후의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어서 소식이 없어진 건지 증언을 해 줄 사람들은 탈출시키고 배를 갈라도 갈랐어야 하는 거 아니냐? 백제의 계백은 온 백제 백성과 적들이 그 증인이 되어 역사에 남았지만, 너희는 어디서 증인을 구할 것이냐?"

식은땀이 턱에 맺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요리후사가 대꾸했다.

"너희가 어떻게 지어내려고 해도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하려면 맞는 말에 뿌리를 두어야 하는 법이다. 쉽게 진실을 실토할 무사 아닌 자들이 모두 죽고 없다면, 너희에게 잡힌 병사들 가운데 협력하는 자가 있더라도 그게 거짓 협력과 증언인지 너희가 어떻게 알겠느냐? 결국 시간이 지나면 너희가 손대지 못한 다른 지역의 기록들과 너희가 지어낸 내용들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 만천하에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너희가 더럽혔던 쇼니 가문의 명예도 다시 빛날 것이다."

양녕은 쪼그려 앉아서 오기로 가득한 요리후사의 눈을 한심하다는 듯 정면으로 보며 말했다.

"9할 9푼의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만들 진실은 1푼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이 다른 기록들과 겹칠 정도로 많이 필요하지도 않아. 그리고 너희가 우리가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이 저택에 있는 너희 가문의 책들부터 태웠어야 했을 게다. 너희가 직접 남긴 기록이면 다른 지역에 남은 기록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아니냐."

요리후사의 눈빛에 당혹감이 감돌았다.

"그 얼굴을 보아하니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군. 네 덕분에 너희 가문의 명예를 박살 낼 거짓말을 만들 때 그럴싸하게 만들 진실을 더 많이 넣을 수 있겠구나."

다시 일어선 양녕이 요리후사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결국 너희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식솔들을 죽이고 스스로도 목숨을 끊은 무사가 아니라, 명예로운 죽음이란 말에 도취되어 제대로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살부터 고른 칼잡이들에 불과하다. 해적들이 가는 지옥에 떨어지면 가문원이 다 같이 모여 그 멍청함부터 반성하거라."

요리후사는 뭐라 더 말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숨만 몰아쉬더니 이내 앞으로 풀썩 엎어졌다.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기를 잠시, 죽으면서 조금 전까지 칼에 찔려 수축해 있던 근육이 풀렸는지 피가 한번에 다다미 위로 왈칵 퍼져 나갔다.

요리후사가 절명한 것을 확인한 양녕은 지금까지의 진지하고 여유로웠던 표정을 거두고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최윤덕에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설마하니 진짜로 다 죽일 줄은 몰랐소. 왜인들은 조선처럼 꼼꼼하게 기록을 남기는 편이 아니니, 저택에 책이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겠고, 책이 있어도 내용이 충분할지를 알 수가 없어 조금 걱정이 되긴 하는구려."

"왜인들이 질 것 같은 상황에서 자살하는 것이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도 없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답입니다."

최윤덕의 말을 들은 양녕이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이 맞소. 우선은 혹시라도 자결하기 전에 무슨 수를 써놨을지 모르니 병사들을 흩어 생존자와 책부터 확보하게 하시오. 병사들을 성안으로 더 데려와 창고도 수색하시오."

"시체들은 어떻게 할까요?"

저택은 물론이고 성안 곳곳에 널려있던 시체들을 떠올린 양녕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무사들은 괜히 적 사기를 떨어뜨리겠다고 목을 잘라 내걸었다가는 오히려 조선에 대항하다가 영웅적으로 죽은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으니, 일단 옷이나 갑옷에 있는 가문 문장 같은 것들로 소속을 구분해서 한곳에 모아만 두시오. 식솔들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니 한데 모았다가 장례를 치러야 할……."

"대군? 왜 그러십니까?"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춘 양녕은, 궁금해하는 최윤덕에게 잠깐만 기다려보라는 듯 손짓을 하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짙은 피 냄새에 섞여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소변 냄새 같은 것이 방 안에 퍼져 있었다.

알 수 없는 행동에 주변의 장수와 병사들이 조용히 지켜만 보는 가운데, 주변을 둘러보던 양녕의 눈에 방 한쪽 장지문 앞에 세워진 피 튄 병풍이 들어왔다. 터벅터벅 걸어가 병풍 뒤를 들여다본 양녕과 누군가의 눈이 마주쳤다.

"히, 히익."

누나로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남동생인듯한 사내아이 입을 틀어막고 있다가 양녕과 눈이 마주치자 공포에 질린 나머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사내아이의 옷 아랫부분은 이미 축축했고, 바닥에는 흥건하게 퍼진 소변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렇게 코앞에 생존자가 있었군요."

양녕의 어깨너머로 병풍 뒤를 본 최윤덕이 놀랍다는 표정을 하고는, 아이들이 좁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병풍을 움직여 넓게 해 주려다가 덜컹하는 소리를 냈다.

"꺄악!"

갑자기 병풍이 움직이자 놀랐는지 여자아이가 비명을 지르고 사내아이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자, 가만히 있지 왜 애들을 놀라게 하느냐고 추궁하는듯한 주변의 시선을 받은 최윤덕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병풍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양녕은 사소한 것에도 겁먹는 아이들을 보고는 몸을 바닥까지 낮추고, 투구를 벗고 칼을 풀어 옆으로 멀찍이 밀어 놓고는 같은 눈높이에서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다. 해치지 않을 테니 이리 나오거라."

양녕이 최대한 자상하게 말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무서운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칼로 죽이고 다닌 것은 무사들이지 우리 조선 군인이 아니지 않았느냐. 자, 괜찮다. 해코지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거라."

"정말이에요?"

입에서 누이의 손을 뗀 사내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이다. 내가 지금 온 조선 군인들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니 다 내 말을 듣는단다. 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너희한테 함부로 할 수 없으니 정말로 안심해도 좋단다."

그 말이 진짜임을 보여 주려 양녕이 어깨너머로 손짓하자 다른 모두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두 아이는 곧장 병풍 뒷면과 마주 보고 있던 장지문을 열려고 했지만 둘이 같이 당겨도 열리지 않았다.

문 여는 것을 포기하고 병풍 뒤에서 나오는 것을 양녕이 비켜 주자, 아직도 겁먹어서 후들거리는 다리로 벽을 빙 돌아서 장지문 반대편 방으로 향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궁금해진 양녕과 장수들, 병사들이 아이들을 따라간 그 방에는 칼에 베인 채 죽은 여인의 시체가 장지문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엄마아……."

"엄마!"

두 아이가 울며 시체에 다가가서는 몇 번 흔들어보더니 이내 옷자락을 붙잡고는 서럽게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모두가 측은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는데 최윤덕이 조용히 말했다.

"저택에서 가장 격 높은 방의 병풍 뒤니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곳이고 예상했더라도 가독과 그 섭정이 자결하는 방에 들어가 확인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쪽 방에서도 누가 장지문을 열어 보지 못하게 몸으로 막아 아이들을 숨긴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양녕이 여인의 팔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지문을 기대어 막고 죽어 가면서도, 혹시라도 옆으로 쓰러지면 장지문이 열릴까 걱정했는지 마지막까지 양팔에 힘을 주어 좌우 바닥을 짚은 자세였다.

"대군.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곳은 다 찾아보았지만 생존자는 없습니다. 대신 저택 안쪽 방에서 좋은 옷을 입은 여인 혼자서 단도로 제 목을 찔러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택 안을 수색하고 온 군교 하나가 양녕에게 보고했다.

"아마도 미츠사다의 부인이자 스케츠구의 어미일 것이오. 그렇다면 저 아이들만이 생존자겠군."

군교에게 대답한 양녕은 통곡하는 남매를 한참 측은한 눈으로 보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자세를 낮추고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너희 이름이 무엇이냐?"

"누나 이름은 아키고, 저는 요타로에요."

이미 차갑게 식은 제 어미의 손을 꼭 붙잡고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사내아이가 대답했다.

"식솔로 있던 이들이니 성씨는 따로 없겠구나."

아이들이 끄덕이는 것을 보며 양녕이 이어 물었다.

"너희 어머니를 죽인 놈들에게 복수하고 싶으냐?"

그 말에 고개를 홱 돌려 양녕을 본 요타로가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이미 다 죽었는데 어떻게 복수를 해요?"

"방법만 궁금해하지 복수를 하지 않겠다고는 안 하는구나."

양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죽은 이를 또 죽이는 방법이 있다. 흔히들 두 번 죽인다고 하지. 저들이 무사의 명예라는 것에 집착해 너희 어머니를 죽였으니, 저들의 명예를 무너뜨리면 저들이 저지른 살생, 자살의 의미는 물론이고 쇼니 가문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박살 내어 복수할 수 있다."

"어떻게요?"

요타로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제 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아예 양녕 쪽으로 돌아앉아 얼굴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결의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하는 요타로는 물론이고, 말없이 양녕을 보는 아키의 눈도 복수심으로 타고 있었다.

그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양녕이 말했다.

"내가 도와줄 테니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요타로, 너는 이제부터 쇼니 스케츠구다. 그리고 넌 장차 조선의 충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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