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41화
41화
성 밖, 조선군 진영.
"하나, 둘, 셋!"
구령과 함께 병사 몇 명이 큼직한 나무틀 한쪽에 달린 밧줄을 힘껏 잡아당기자, 나무틀 반대쪽에 올라가 있던 돌덩어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힘차게 날아갔다.
그것은 조금 전 돌덩어리보다 낮게 날아서는 성벽 목책 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갔고, 곧 성벽 안에서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한 놈 잡았나 보다!"
구령을 붙였던 병사의 말에 다른 병사들도 껄껄거리며 웃었다.
쇼니군이 망루라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투석기였다. 정확하게는 주로 무게추를 사용하는 서양식과 달리 인력으로 밧줄 여러 개를 동시에 힘껏 당겨 발사하는 동양식 투석기였다. 쉽게 만들 수 있고 성능도 좋아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개발되어 쓰일 정도였다.
"굳이 목책이나 성문을 맞춰서 깨지 않고 돌덩이가 안으로 날아들기만 해도 적들 사기가 떨어질 테니, 너무 맞추는 데에 집착하지 말고 팔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해라."
"알겠습니다, 대군!"
투석기 상황을 보러 온 양녕의 말에 대답한 병사가 다른 병사들을 보며 왜말로 전달하자 그중에서 두어 명이 이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들어온 왜인 출신 병사들이었다.
"자 그럼 다시 돌 올리고! 하나, 둘, 셋!"
다시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돌덩어리가 성문 누각 2층의 얇은 회벽을 박살 내고 들어가자 병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왜인 출신 병사들이 엄청 신나서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쇼니 가문에 많이 시달려서 그놈들 머리통에 돌 던지는 게 기쁜 걸까요?"
"그런 것도 있고, 신기해서 해보고 싶은 것도 있을 것 같소. 왜인들은 이런 투석기를 거의 쓰지 않소."
"특이하군요. 무사들만 결투하듯 싸우던 풍조가 남아 쓰는 법을 잊은 건가도 싶습니다."
양녕의 말에 최윤덕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도 있겠소. 그럼 난 다시 가 보겠소. 투석기는 지금 만드는 것까지만 만들고 신나게 쏘라고 하시오. 정오 넘고 새참 먹을 때에도 교대해 가면서 쏴서 저놈들 뭐 먹을 시간도 안 나게 하라고 하면 더 신나할 게요."
"알겠습니다, 대군."
양녕의 말에 최윤덕이 씨익 웃었다.
* * *
오후.
우라노 성. 쇼니 가문 저택.
2층 난간 밖으로 성안의 상황을 보던 스케츠구에게 계단을 올라온 요리후사가 다가왔다.
"밖은 어떻습니까, 숙부?"
"계속 돌이 날아와서 다치는 사람은 물론 맞아 죽은 사람까지 나왔습니다. 시종들은 핑계를 대서라도 건물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고, 하급 무사들도 내색은 안 하지만 사기가 떨어진 게 보입니다."
"그나마 건물들은 기와가 좀 깨진 거 말고는 큰 문제 없으니 다행입니다."
스케츠구의 말에 요리후사가 아니라는 듯 대답하기 시작했다.
"적들도 건물을 깰 생각은 없을 겁니다. 본래 목적은 우리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거고, 그 목적은 이미 충분히 이루었지요. 심지어 그동안 불화살과 화약은 쓰지도 않았습니다. 동서로 산하고 강을 끼고 있으니 돌은 많고, 병사들이 많아서 교대해가면서 쏘면 되니 인력도 충분하니 한동안 계속 돌만 날아오겠지요."
"그렇다고 조선군이 계속 돌만 던져서 우리를 다 죽이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여기 다자이후는 큐슈 곳곳으로 이어지는 요충지고, 그 요충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또 저들과 악연이 깊은 우리 쇼니 가문이니 최대한 빨리 얻으려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아마 해가 지기 전, 돌 날아오는 게 멈추면 진짜로 싸움이 시작되겠군요."
스케츠구의 말에 요리후사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저 앞쪽까지 가 봤지만, 이제는 돌이 성안으로 날아 들어가도 깨지는 소리도, 누가 맞는 소리도 거의 안 들립니다. 성문 누각은 이미 벽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가 됐지만, 그 아래 성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습니다. 또 투석기 연결부 밧줄도 슬슬 헤지고 있습니다."
"해도 기울었으니 이제 시작할 때가 되었구려."
진영 앞쪽까지 가 적들의 상황을 살피고 온 최윤덕의 보고를 들은 양녕이 그렇게 말하고 주변에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적들이 보지 못하게 포수들은 여기서 미리 화승에 불을 붙이고 앞쪽으로 가게 하시오. 투석기는 지금 가져다 놓은 돌만 던지고 멈추고, 그전에라도 밧줄이 끊어질 것 같으면 멈추라 하시오. 인화살도 개수를 확인하고 나누어 주시오."
"알겠습니다. 준비가 끝나면 신호하겠습니다."
"좋소."
* * *
최윤덕이 진영 앞쪽으로 사라지고 잠시 뒤, 작은 파란 깃발 하나가 올라왔다.
"준비되었군. 시작하시오."
"공격하라!"
양녕의 말을 들은 이종무의 외침에 태평소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신호로 인화살 여러 개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성벽 너머로 쏜 인화살 중에서 절반은 허공에서 터지며 최대한 넓게 불을 퍼뜨리고, 나머지 절반은 바닥에 떨어져 폭발했다.
"다음 인화살은 성문에 쏴라!"
날아간 인화살들이 박혔다가 터지자, 성문은 폭발로 틀어지고 백린으로 불이 붙어 타기 시작했다.
"폭발로 틀어진 모양을 보아하니 생각만큼 두꺼운 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더 타기를 기다릴 것 없이 대포를 쏘겠습니다."
"알겠소. 공에게 맡기겠소."
"방포 준비!"
이종무의 호령에 노란 깃발 하나가 올라가고, 그걸 본 앞쪽 포병들이 대포에 달라붙어 준비를 시작했다.
배에 싣고 함포로 쓰던 것을 내려서 가져온 청동제 대포였다. 아직 군기시에서 신형 대포 개발이 완료되지 않아 구형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지만, 포가만은 기존에 쓰이던 바퀴 넷 달린 상자형 수레가 아니라 큰 바퀴 둘과 뒤로 뻗은 다리로 구성된 신식 포가로 교체되어 있었다.
화약 자루를 넣고, 포탄을 넣고, 점화약까지 준비가 끝나자 대포 운용을 맡은 군교가 작은 붉은 깃발을 들어 올리고 대기했다.
"방포하라!"
깃발들이 다 올라오기를 기다린 이종무가 외쳤다.
* * *
성 내부.
"왜 진짜로 쇠도 태우고 물에도 안 꺼지는 불이냔 말이다! 거기 너! 돌은 더 안 날아오니까 우물쭈물하지 말고 빨리 물을 떠 와라!"
인화살이 터지고 사방에 불이 퍼지고서야 시부카와군의 증언이 진짜였음을 알게 된 요리후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지시했지만, 억지로 끌려 나온 데다가 난생처음 듣는 폭음과 꺼지지 않는 불에 잔뜩 겁먹은 시종들은 혼란에 빠져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불에 탈 만한 물건은 이미 다 치웠으니 불이 더 커지지는 않는다! 겁먹지 말고 젖은 거적을 덮어서 끄……."
그 순간, 천둥 같은 소리가 울린 것과 동시에 무언가 쿵 하고 맞는 소리가 들렸다. 조선군 대포의 발사음과 무쇠 대포알이 성문을 치는 소리였다.
성문의 불을 끄러 가까이 갔던 시종과 하급 무사들은 그 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성 옆에 있는 유서 깊은 사당이자 전투 전에 요리후사가 기도를 올린 천만궁의 신은 뇌신이자 재앙신이고, 모셔진 이유도 원한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던 탓에, 다들 신이 노해 번개를 내리친 것이라 생각하고 위축되어버린 것이다.
"이건 번개가 아니라 조선군 대포다! 그 잘난 대포가 결국 문짝 하나를 못 뚫는구나! 가서 문을 더 보강하고 막으면 된다!"
스스로도 처음 듣는 대포 소리에 놀랐지만 금방 정신을 차린 요리후사가 어떻게든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시종과 하급 무사들은 여전히 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개중에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이도 있었다.
"답답하긴! 이리 줘 보거라!"
그 모습을 보던 나이든 무사 하나가 시종에게서 물통을 빼앗듯 받아들고 문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물을 뿌리고는 뒤돌아서 말했다.
"자, 괜찮지 않느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굉음이 울렸다.
날아온 대포알이 성문 정중앙에 맞고, 직전 포격으로 약해져 있던 빗장을 단숨에 부수면서 남은 힘으로 문까지 힘차게 열어 버렸다.
바닥에 나뒹군 무사와 활짝 열린 성문 뒤로 조선군의 모습을 본 요리후사가 놀라서 옆으로 피하며 외쳤다.
"빨리 문 닫아라! 빗장이 부러져서 열린 거지 대포알만으로 문을 부술 정도 힘은 없다! 빨리 가서 안 틀어막으면 조선군이 들어온다!"
그 말에 무사들 여럿이 성문으로 달려가면서 근접전에 대비해 칼을 뽑아 드는데 세 번째 포성이 울렸다. 이전 두 번보다 더 큰 굉음이 짧은 간격으로 연달아 울리고, 대포알 여러 개가 성문 안을 향해 날아왔다.
대포알에 빗맞은 무사의 오른팔이 칼을 쥔 채로 뜯겨 허공을 날고, 재수 없게도 대포알이 머리 쪽으로 날아온 무사는 몸통만 남아 바닥에 쓰러졌다. 몸통 정중앙에 대포알을 맞은 무사가 그대로 붕 떠서 뒤로 날아가는 걸 멍하니 본 요리후사가 놀란 정신을 최대한 붙잡고 지시했다.
"성문을 사이에 두고 조선군을 마주 보는 자리에 서지 마라! 문은 열렸지만 좁은 성문으로 들어와야 하니, 문 좌우에 있다가 적이 들어오는 걸 포위해라!"
대포알에 허망하게 다른 무사들이 죽어 가는 것을 봤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달려간 무사들이 요리후사의 지시대로 성문 안쪽 좌우 성벽에 붙어서 대기했다.
"이렇게 대기하면 우리가 안 보일 것이다. 상대가 보이지도 않는데 화약을 써가며 공격할 리는 없다. 적 보병이 먼저 들어오건 기병이 먼저 들어오건 다리를 노리면서 시작한다. 알겠지?"
제일 경험 많은 무사의 말에 성문 건너편 병사들도 끄덕거렸다.
대포 소리도 무엇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 가운데 조선군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조금 전 열리는 문에 맞고 쓰러져 기절한 무사만 다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별안간 불타는 심지가 달린 화살 하나가 그 무사의 등에 날아와 박혔다.
* * *
"인화살 폭발!"
"좋아! 산탄총 포수 진입!"
최윤덕의 지시에 포수 몇이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제일 튼튼한 갑옷에 노획한 일본 갑옷까지 합쳐 입어 방어력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미리 장전해둔 산탄총을 든 포수들이었다. 갑옷 무게가 있어서 조준사격은 어려웠지만, 어차피 산탄을 쏠 것이니 상관없었다.
열린 성문 안쪽까지 저벅저벅 걸어간 포수들이 산탄을 발사하고, 연기 속에서 괜찮다는 신호로 손을 흔들었다.
"이제 우리 차례다!"
이어서 이징옥이 중기병 중에서도 특히 중무장하고 마갑까지 갖춘 이들을 이끌고 편곤을 들고 성문 안으로 돌격해 들어가고, 뒤따라 창을 든 살수들이 들어갔다.
말 위에서 그 모습을 진지하게 바라보던 양녕에게 이종무가 말했다.
"이 정도로 압도적이면 아군 병사는 하나도 상하지 않고 이길 것이라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야 할 것이오."
"성벽 확보!"
양녕이 대답하는 사이에 벽이 다 박살 난 문루에 올라온 병사가 외쳤다. 이어서 성벽 너머에서 태평소 소리도 들려왔다.
"제압이 완료되었군. 들어갑시다."
양녕이 장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벽 안뜰에는 무사들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살아는 있지만 일어나지도 못하고 한쪽 팔도 날아간 상태로 저항하려던 무사를 상대하던 병사가 편곤을 휘두르려다 말고, 투구를 성하게 얻고 싶었는지 자세를 바꿔 자루 끝으로 무사의 얼굴을 찍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성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쇼니 가문 저택 근처에서 위화감을 느낀 양녕이 고삐를 잡아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소?"
"예, 저도 느꼈습니다. 여기에는 여인과 아이들 시체도 섞여 있고, 사내들 시체도 무장을 하지 않은 것을 보아 이들은 무사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군이 들고 진입한 창이나 편곤이 아니라 칼에 베인 상처로 죽어 있습니다."
양녕의 물음에 이종무와 최윤덕도 동의하며 말했다.
"저택 안을 봐야겠소. 호위해 주시오."
불길함을 느낀 양녕이 말에서 내리자 이종무와 최윤덕도 따라서 내리고, 같이 온 살수들이 창을 고쳐잡고 호위를 시작했다. 흙발로 저택 마루에 올라간 살수들이 앞서가며 장지문을 하나씩 열 때마다 점점 피 냄새가 진해졌고, 그 뒤를 양녕이 따라가며 주변을 살피자 역시나 무장하지 않은 이들의 시체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여기가 가장 안쪽 방인 것 같소."
다다미 테를 두른 비단이 단색에서 무늬가 있는 것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본 양녕이 말했다. 심호흡을 한 차례 한 뒤 양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살수들이 장지문을 힘껏 열었다.
열린 방 안에서 피 냄새가 훅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