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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40화 (40/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40화

40화

"수가 몇백이나 되면 척후는 아닐 것이고, 건너오기 어려운 강 건너편에서 공격을 시도할 리도 없고, 기동성 좋은 기병들만 먼저 보냈다는 거면 정말로 우리가 우치야마 성으로 옮겨 가려는 걸 막으려는 것 아니냐. 조선군이 대체 어떻게 여기서도 잘 보이지 않는 산 안쪽에 있는 성의 위치와 길목을 알고 막……."

"주군."

숙부 요리후사의 짧고 울리는 목소리가 스케츠구의 말을 끊었다. 손 닿는 거리에 있었으면 등짝이라도 후려쳤을 것 같은 요리후사의 표정을 보고, 스케츠구는 뒤늦게 자신이 실언했음을 알았다.

미츠사다가 배반했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진 이 상황에서, 조선군이 쇼니 가문의 군사 정보를 알고 있다는 내용을 설명까지 해 가며 주절주절 떠드는 것은 여기 모인 가신들과 무사들의 불안에 기름만 부을 뿐이었다.

"주군께서 잠시 놀라서 경황이 없으신 것 같으니 내가 설명하겠소."

모여 있는 가신들조차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본 요리후사가 직접 나섰다.

"정말로 토노께서 배신하신 것이라면 직접 본인께서 오시거나 못해도 친필로 편지라도 보내서 우리를 포섭하려고 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오. 이렇게 조선군이 대뜸 군대부터 보냈다는 것은 기껏해야 사로잡힌 누군가에게서 우치야마 성의 존재만 알아냈을 뿐이고, 직접 오거나 편지를 보내 우리를 설득할 수 있을 만한 높은 자리에 있는 무사는 한 사람도 배신하지 않았다는 얘기요. 그러니 여러분은 휘둘리지 마시오."

빙빙 돌리는 대신 오히려 직설적으로 설명하는 요리후사의 말이 먹혔는지 가신들 사이에서 돌던 묘한 기류가 가라앉았다.

"감사합니다, 숙부. 제가 말을 이상하게 해서 여기 모인 분들을 놀라게 해 버렸군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이미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습니다. 남쪽에서는 조선군이 오고 있고, 서쪽은 산이 험하고, 동쪽 우치야마 성으로 가려면 강을 건너야 하는데 거기는 조선 기병이 막고 있습니다."

"그럼 북쪽은 어떻습니까? 산과 강 사이라 길은 좀 좁지만, 상류라 물살이 거세니 조선군도 쉽게 넘어오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 조선군은 다 기병입니다. 우리가 북쪽으로 가려는 것을 알자마자 말을 달려 앞서가 틀어막으면 그만입니다. 상류는 거세지만 폭이 좁아 다리가 놓인 곳도 많으니 거기를 건너면 아예 남북으로 포위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다 안 된다고 하는 요리후사의 말에 스케츠구가 안달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들에게 항복하고 큐슈에서 쫓겨나거나, 싸우다 죽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요리후사의 말에 스케츠구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모든 가신들까지 침묵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듯한 정적이 한참을 흐른 끝에 스케츠구가 입을 열었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것 같소. 무사는 옥처럼 깨어질지언정 기왓장처럼 목숨을 보전할 수는 없소.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항복하고 구차하게 살아남느니 끝까지 싸워서 아버지의 원수를 한 놈이라도 죽이고 나도 장렬히 죽는 것이 낫소."

죽음을 각오한 스케츠구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이어서 말했다.

"대신 쇼니 가문이 여기서 끊어질 수는 없소. 어린 저보다는 장성하신 숙부께서 체력이 더 나으실 테니 여기서 제가 조선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꼭 필요한 사람들을 데리고 탈출하십시오. 서쪽 산세가 험하다고는 하나 몇 사람 다니기에는 충분합니다. 혹시라도 히에카와 건너 조선군에게 발각당하더라도 상류의 물살을 건너기가 어렵고 기병이 말을 타고 산에 오르기는 더 어려우니 추적하지 못할 것입니다. 쇼니 가문의 직계가 끊겨 방계가 가문을 이은 것이 처음도 아니니 흠잡는 이도 없을 것입니다."

덤덤하고 비장하게 말하는 스케츠구의 말을 들은 요리후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하면 조선에서는 또 조카를 버리고 숙부가 달아났다고 우리를 깎아내릴 소문만 퍼뜨리겠지요. 어차피 쇼니라는 성씨의 기원이 된 것도,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중심지도 이곳 다자이후입니다. 여기를 잃고 달아난다 한들 쇼니 가문이 다시 일어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장렬히 싸우다 죽어 간 쇼니 가문이 있었노라 역사에 남겨지는 데에 이 목숨을 보태겠습니다."

"제 부친께서도 토노를 따라 조선군을 막으러 가셨다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는데 그 자식인 제가 싸움터에서 달아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싸우겠습니다."

"저도 남겠습니다. 늙었지만 아직 칼 잡을 힘은 있습니다."

요리후사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모여 있던 가신들도 저마다 남아 싸우겠다 말했다. 억지로 분위기에 떠밀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요리후사의 말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중신들이 여럿 죽고 젊은 무사들이 대다수라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쇼니 가문을 섬기며 그 역사와 가풍에 영향을 받은 가문들의 대표니 당연한 일이었다.

"좋다. 쇼니 가문 마지막 전장에 나설 준비를 하자."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스케츠구가 말하자 다들 옆에 내려놓았던 칼을 허리춤에 차고 투구를 쓰기 시작했다.

스케츠구 역시 크기는 조금 안 맞지만 주변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다.

이윽고 방 안의 모든 무사들이 무장을 갖추고 자리에 선 것을 확인한 요리후사가 방 동쪽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성 바깥쪽 히에카와 건너, 학문의 신이자 벼락의 신을 모신 다자이후 천만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쇼니 요리후사가 여기 모인 이들을 대표해 천만대자재천신께 기도드립니다. 저희는 비록 학문과는 거리가 먼 칼잡이들이나, 마음에 새기고 살아온 옥쇄와전이라는 구절만은 아는 이들이니 이곳에서 장렬히 깨어지려 합니다. 부디 천만대자재천신께서는 저희가 내리치는 벼락처럼 찰나의 순간이지만 천지를 진동시키고 불길을 일으키며 사라질 수 있도록 도우소서."

깊게 합장한 요리후사가 다시 몸을 돌려 무사들을 바라보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말 한마디 없는 그 지시에 일제히 무사들이 비장한 얼굴로 저택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 * *

앳된 얼굴을 하고 화려한 갑옷을 입은 무사 하나가 다른 무사들을 대동하고 성문 누각 위로 올라온 것을 본 양녕이 외쳤다.

"나는 대조선국 상왕 전하의 아들이자 주상 전하의 형제이며, 부상백이자 정동군 도원수인 양녕대군이다! 네가 쇼니 스케츠구냐?"

"조선 땅에는 칼집에서 칼 뽑는 소리만 들려도 산속으로 줄행랑을 치는 놈들만 산다고 들었는데 자기소개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놈도 있는 걸 보니 왕자 이름값은 하는구나! 그렇다! 내가 바로 쇼니 스케츠구다!"

스케츠구의 말에 껄껄 웃은 양녕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리지만 기개가 제법이구나! 길게 말할 것 없다! 항복해라! 내 원래 큐슈의 모든 슈고들을 쫓아낼 생각이고 서신도 그리 보냈으나, 네 아비인 미츠사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순순히 우리에게 협력하고 있으니 너희 쇼니 가문은 특별히 항복해도 추방하지 않고 유서 깊은 호족의 대우를 해 주마!"

항복 권고 한 번에 도발, 소문 확산, 내부 분열까지 노린 양녕의 말을 들은 스케츠구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헛소리하지 마라! 아버지께서 네깟 것들에게 고개를 숙이실 리가 없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이 자리에 아버지께서 왜 안 오셨겠느냐!"

"바로 항복한 것이 아니라 잡힌 다음 우리에게 협력한 것이다. 싸우고 잡히느라 얻어맞은 이를 어찌 이 멀리까지 데려오겠느냐? 대신 우리에게 자세한 지리를 알려준 덕에 우치야마 성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었다. 협력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았겠느냐?"

"성 위치는 말단 병사를 족쳐서라도 알아낼 수 있다! 그리고 직접 올 수 없다면 친필로 편지라도 보내면 아버지의 필적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잖느냐!"

"손 다친 놈이 무슨 편지를 쓰느냐? 필적으로 알아보려 할 텐데 대필을 하면 의미가 있겠느냐?"

스케츠구가 요리후사에게서 들은 말로 하나하나 반박했지만, 양녕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네가 아무리 말한들 우리는 듣지 않는다! 설령 천지가 뒤집어질 일이 일어나 아버지께서 마음을 바꾸셨다 하더라도, 나는 바꾸지 않는다! 정 원하면 와서 내 목을 친 다음 시체의 무릎이라도 꿇려라!"

여기서 더 스케츠구가 말할 상황을 주면 줄수록 적들의 사기만 올라갈 것이라 생각한 양녕은 항복 권고를 계속하는 대신, 목청을 가다듬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좋다! 너희가 원한다면 모두 죽여 주겠다! 대신! 성문을 열어 주거나 쇼니 가문을 비롯한 고위 무사들의 목을 바치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살려 주겠다! 너희도 이 싸움에서 아무리 버텨 봐야 승산이 없는 건 알 테니 잘 생각하거라!"

성 안의 하급 무사들과 시종들에게도 들릴 만큼 큰 목소리였던 탓에 살짝 당황한 표정이 된 스케츠구가 옆 무사들에게 뭐라 말하더니 누각에서 내려가 사라졌다.

"정예병력은 물론이고 우두머리까지 날아갔는데 저렇게 어린애를 중심으로 뭉친 것치고는 제법 기세가 있소. 어찌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적이 결사 항전을 각오했으니 괜히 밀고 들어가면 생각보다 아군 피해가 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이 작아 안에 물자도 적고, 이미 포위되어서 물자가 새로 들어갈 길도 없으니 이대로만 둬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말라 죽지 않겠습니까?"

양녕의 말에 이종무가 대답했다.

"전술적으로는 그게 맞지만, 전략적으로 크게 보면 문제가 있소. 저들이 이 작은 성에서 버티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다른 태수와 호족들에게 우리가 붙어 볼 만한 상대라는 인상을 주게 되오."

"그렇다면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적 정예병력은 이미 나가강 전투에서 다 쓸려나갔고, 새로 병력을 모을 시간도 없었으니 안에 든 것은 오합지졸일 것입니다. 적당히 사기를 떨어뜨리고 뚫고 들어가면 적은 피해로 금방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게 최선일 것 같소. 하지만 사기를 떨어뜨리자고 저 작은 성에다가 인화살과 화약을 쓰기에는 좀 과한 것도 같소. 나가강 전투에서 생각보다 많이 쓴 뒤로 아직 보충이 되지 않아 부족한데……. 그렇다고 병사들이 상하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소."

"그거라면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 * *

"물을 더 떠 와라! 술을 담았던 나무통도 병사들에게 한 되씩 마시게 하고 비워서 거기에도 물을 담아라! 회칠한 벽에는 너무 뿌리지 마라!"

성벽 안에서는 무사들의 지시하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부 화공을 대비하고 있었다.

우물에서 펀 물을 건물 벽에 뿌려 습기를 머금게 하고, 불이 붙으면 덮어서 끄기 위해 거적들도 물에 적셔서 쌓아 두었다. 남은 물통들은 물을 담아서 곳곳에 배치시켜 놓았다.

"탄다이의 사촌 동생이 조선군의 불화살은 쇳덩어리에도 불을 붙이고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는다고 한 게 사실일까요?"

성 안뜰 한쪽, 물통들을 쌓아 놓은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케츠구가 숙부 요리후사에게 말했다.

"그런 불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 겁쟁이 시부카와 놈들이 자신들의 패배를 변명하려고 지어 낸 소리겠지요. 그래도 화상을 입은 놈이 많은 것을 보면 적들이 화공에 능한 것은 분명해 보이니, 이리 대비해 두면 충분할 것입니다."

"역시 그렇지요. 또 그냥 화살도 몇 번 전투를 치르다 보면 부족해지는 법인데, 화약이고 불화살이고 화살보다 흔하지 않을 물건이 어디서 솟아나서 쓰는 것도 아닐 겁니다. 우리에게 쓰면 쓸수록 모자라게 될 것이니 그렇게 적 전력을 조금이라도 더 깎으면 간접적으로나마 적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이는 셈이 되겠지요."

그때 조선군 상황을 살피던 무사 하나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무슨 일이냐? 적들이 드디어 공격을 시작하려 하느냐?"

"아닙니다. 대신 뭔가 이상한 걸 만들고 있습니다. 나무를 이어서 만드는 것이 꼭 망루 같기도 합니다."

무사의 말을 들은 요리후사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망루를 만드는 것이라면 조선군이 장기를 살려 활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일 게다. 어쩌면 벌써 화약이나 불화살이 부족해졌는지도 모르지. 좋다. 그럼 이제 성벽에 올라갈 때는 화살을 조심하고, 혹시라도 적들이 망루를 높게 쌓아서 화살이 성 안으로까지 들어올 것 같으면 바로 알리거라."

요리후사가 무사에게 지시를 내린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큰 덩어리가 모아 둔 물통들을 박살 내며 사방으로 물을 튀겼다.

난데없는 물벼락을 뒤집어쓴 요리후사와 스케츠구가 흠뻑 젖은 얼굴을 대강 닦아 내고 물통들이 있던 곳을 보자, 박살 난 물통 조각들 사이에서 큼직한 돌덩어리가 땅에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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