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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39화 (39/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39화

39화

비혜강 중상류 동쪽.

"저 앞에 보이는 것이 수성(미즈키)입니까?"

선두에서 말을 타고 양녕과 나란히 가던 이종무가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방향에는 누가 보아도 인공적으로 쌓은 것이 분명한 토축이 일직선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런 것 같소. 옛날 왜국이 백제를 돕기 위해 원군을 보냈다가 백강에서 참패하고 돌아온 다음,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자신들을 치러 올까 두려워서 쌓았다는 토성이오."

"동서로 산맥이 막고 있는 좁은 길목이라 그냥도 요충지인데, 거기다 성까지 동서 산맥을 잇게 쌓았으니 얼마나 신라와 당이 무서웠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종무의 말에 양녕이 허허 웃고는 말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소. 중간에 비혜강에 끊어진 것 말고는 성벽이 계속 이어지고, 비혜강 서쪽 구간에 문 하나, 동쪽 구간에 문 하나가 전부일 뿐이니 말이오. 게다가 비혜강을 끌어서 만든 성 밖 큰 해자와 성 안 작은 해자가 있어서 다리를 놓고 다녔다 하오."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강 위를 지나 동서 성벽을 잇는 다리가 되는 수문이 없다는 단점은 있겠지만, 이 정도로 규모가 크면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요."

"맞소. 멀쩡했다면 그랬을 것이오."

양녕은 눈앞의 풍경에서 과거의 모습을 상상해 보며 말했다.

지방까지 조정의 힘이 미치고 농민들을 병사와 일꾼으로 동원할 수 있던 시절의 왜국은 이 큰 성벽을 만들고 유지하는 게 가능했지만, 호족들로 잘게 쪼개진 지금에는 저 성벽에 다 올려놓을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이도 얼마 없었다. 전투의 숫자는 늘었지만 정작 전투 규모는 줄어들어 쓸모를 잃은 거대한 성벽을 굳이 보수할 이 또한 없었다.

결국 한때는 거대한 장벽이었을 미즈키는 방치와 전란을 거치며 성문과 목책은 모두 불타 사라졌고, 토축은 곳곳이 무너져 지금은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둔덕이 되어 있었다.

오로지 지금 정동군 병력이 향하는 동문 터에 남겨진 주춧돌만이 한때 여기가 성이었음을 어렴풋하게 알려 줄 뿐이었다.

"이 대병력에 섣불리 덤벼 봤자 개죽음일 뿐이라 매복했다가도 마음을 바꿔 돌아가겠지만, 그래도 성문 근처는 매복하기 좋은 지형이니 만약을 대비해 선발대를 보내 확인하겠습니다."

"알겠소. 가서 별다른 문제 없으면 그대로 동문과 좌우 성벽까지 확보하시오."

"알겠습니다."

이종무가 기병여단에 선발대로 가라는 지시를 내리는 동안, 양녕은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는 정동군 병력들에게 외쳤다.

"선발대가 동문을 점령하고 나면 그대로 성벽 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가는 동안에는 일렬로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일단 들어가면 부대별로 전개해서 이동하도록! 또 큰 관청이 있던 곳이라 길은 닦여 있겠지만, 반대로 시가지가 복잡하게 남아 있어 적이 기습을 시도할 수 있으니 장수와 군관, 군교들은 특히 주의해서 움직여야 한다! 알겠나!"

"예!"

쩌렁쩌렁한 함성을 들으며 양녕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싸움이 날 것을 아는지, 어느샌가 날아온 까마귀들이 무너진 성벽에서 자라난 나무 위에 모여들고 있었다.

* * *

잠시 뒤.

치쿠젠노쿠니(축전), 우라노 성.

정동군이 접근 중인 미즈키에서 다자이후의 옛 관청 터를 지나 더 들어간 곳. 서쪽에는 산, 동쪽으로는 히에카와 상류를 낀 좁은 지역인 데다 주변보다 살짝 높은 구릉이라 히에카와 물줄기를 이용한 수공마저 어려운 천혜의 입지에 우라노 성이 있었다.

백 년이 넘는 동안 쇼니 가문의 근거지였던 우라노 성은 그 세월을 버텼음을 자랑하듯 돌로 보강한 토축 위에 목책을 빙 두르고 위엄있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우라노 성 정중앙에 지어진 쇼니 가문의 저택에서는 회의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소. 상황이 급박하여 어린 내가 중책을 맡았으니 여러분께서 도와주셔야 하오."

회의의 주재를 맡은 것은 생사가 불분명해진 미츠사다 대신 가독 대리가 된 미츠사다의 외동아들 쇼니 스케츠구였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11살 소년이었지만 눈빛이나 표정에서 풍기는 세력 지도자로서의 기운은 어른 못지않았고, 그 앞에 앉아있는 가신들도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현 가독인 미츠사다도 부친의 사망으로 11살에 가독을 이은 뒤 가문을 잘 이끌어 온 전례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신들이 진지한 데에는 설령 어린 스케츠구를 믿지 못하더라도 구심점 삼아 뭉쳐야 할 만큼 상황이 나쁘고, 스케츠구에게 간섭할 만큼 경험이 있는 가신들 대다수가 미츠사다와 같이 출정했다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조선군이 벌써 미즈키 동문에 당도했다고 하니 빨리 군대를 모아 맞서 싸워야 하는데, 왜 아직도 이웃한 슈고들은 물론이고 우리 휘하의 호족들까지 병력을 보내지 않은 것이오?"

모인 가신들의 태반도 스케츠구처럼 부친의 생사불명으로 갑자기 가문을 잇게 된 경험 없는 젊은 무사들이었던 탓에 상황을 잘 몰라 서로 눈치만 보는 것을 보고, 미츠사다의 동생이자 스케츠구의 숙부인 요리후사가 대신 답했다.

"아직입니다."

"한시가 급한데 어째서 답신조차 없단 말이오."

"충분히 예상했던 일입니다, 주군. 호족들 병력을 빌리는 것은 고사하고, 유사시에 호족들이 가진 성으로 탈출해서 같이 농성하는 것도 안 될 것입니다."

"어째서요?"

스케츠구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요리후사는 약간 답답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린아이라고는 해도 가독 대리이자 미츠사다가 정말로 죽었을 경우 계승자가 될 스케츠구의 체면을 다른 신하들 앞에서 구기지 않기 위해 최대한 표정을 숨기고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대군이 보낸 서신의 내용이 온 큐슈에 다 퍼졌기 때문입니다. 슈고들은 조선군과 싸워서 지면 몰살이고, 항복해도 쫓겨날 판이니 필사적으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하지만 호족들에게는 살아남을 선택지가 있는데 괜히 조선과 싸웠다가 지면 몰살이고, 혹시라도 이번 전쟁에서 조선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고 살아남더라도 조선군과 싸우다 세력이 약해지면 다른 호족들에게 잡아먹힐 수 있습니다."

"고작 그게 무서워서 적이 왔는데 싸우지도 않고, 주군의 요청도 무시한단 말이오?"

스케츠구의 철없는 소리에 요리후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말했다.

"옛 무사들처럼 생각하는 자들의 시대는 이미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명분과 명예보다도 실리와 생존을 먼저 생각하는 이들이 살아남는 시대고, 호족들은 그걸 충분히 따라가고 있을 뿐입니다. 누구 편도 들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일단 몰살은 당하지 않고, 혹시라도 조선군을 물리친 슈고가 있더라도 힘이 약해졌을 테니, 그 틈을 타 슈고 자리를 빼앗으려 노려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조선이 이기더라도 순순히 항복하면 사병만 잃을 뿐 큐슈에 호족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만이 아닌 다른 모든 이들의 사병이 해산되는 것이니 오히려 작은 세력들은 군사적으로 부담이 줄어들어 반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호족들이 안 오는 거라면 이해는 가오. 하지만 다른 슈고들은 아니지 않소? 지면 몰살이고 항복해도 쫓겨나는 건 우리나 그들이나 마찬가지니, 뭉쳐서 힘을 모아 같이 싸워 이기려고 해야 하는 것 아니오?"

"이기려고 하기 때문에 도우러 오지 않는 것입니다."

뜻밖의 말에 좌중이 고요해졌다.

"지금은 조선군의 화포와 기병, 불화살은 엄청나다는 소문만이 사방에 퍼져있습니다. 하지만 조선군은 원정을 온 군대이고, 곧 겨울이 올 것임은 모두가 확실히 알고 있지요. 저들 입장에서는 우리 쇼니 가문이 먼저 싸워서 다치고 죽어 가는 동안 지켜보면서 조선군의 무기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파악하고, 조선군의 힘도 빠진 다음 싸우는 게 이길 가능성이 크다고 볼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하치만신께서 도우셔서 우리가 혼자 싸워 이기기라도 하면 뒷감당을 어쩌려고 그런단 말이오."

어린애다운 말투에 요리후사의 어조가 점점 강해져 갔다.

"정말로 만에 하나 이긴다 치더라도, 정예병력과 지휘할 무사들을 이미 많이 잃은 우리 군이 피해 없이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피해를 입어 약해진 슈고의 자리를 탐내는 것은 호족만이 아닙니다. 교통과 교역의 중심이자 역사까지 오래된 치쿠젠의 슈고를 겸직하고 싶지 않은 슈고가 이곳 큐슈에 있겠습니까? 이겼지만 약해진 우리 등에 칼을 꽂으면 그만인데 뒷감당 걱정을 왜 하겠습니까?"

"다른 슈고들은 그렇다 해도 키쿠치와 오토모 가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남조에 충성하는 이들 아니오! 그들이 그렇게 실리를 따졌다면 쇠해 가는 남조에 아직도 충성할 리가 없소!"

"미츠사다 형님께서 조선군에 붙잡힌 다음 적극적으로 협력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다들 그래서 불신하고 있지요."

떼쓰듯 말하는 내용마다 바로 반박당하고 있었지만, 스케츠구는 지기 싫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한번 깨물고는 숙부 요리후사에게 다시 말했다.

"그건 소문일 뿐이지 않소! 큐슈 탄다이인 시부카와 요시토시는 패주하다가 조선군에 추격당하고서도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고 서신만 받아 우리와 조정에 전달한 것은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오. 그런데 적과 내통했다는 의심을 어째서 무사히 돌아온 시부카와가 아니라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한 우리 가문이 받는단 말이오!"

"서신을 전달하기 위해 탄다이를 살려서 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쇼니 가문은 전부 다 항복하고 살아남아서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숙부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시오!"

"우리 쇼니 가문이 의심받을 만한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스케츠구의 말문을 막아 버린 요리후사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아시카가 가문이 무가 정권을 막 세웠을 무렵 당시 가독께서 북조 편을 들었다가, 분노한 키쿠치 가문에게 공격당해 전사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다음 가독께서는 남북조가 크게 붙은 치토세가와의 전투에서 아예 북조 군대와 협력해서 남조 군대와 협력한 키쿠치 가문과 싸우셨던 적도 있습니다. 그 이후에 다시 줄을 바꿔 남조에 충성하기 시작한 것이니, 꾸준히 남조에 충성해 온 키쿠치와 오토모 가문에게는 우리가 다른 세력으로 갈아탔다 의심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그것도 북조가 아니라 바다를 건너온 조선한테 말이오? 그럴 수가……."

뼈를 때리는 충격적인 얘기에 스케츠구가 좌절하는 것을 보고, 굳이 조선군과 싸우겠다는 조카의 고집을 꺾는 것은 이만하면 되었다 생각한 요리후사가 미리 준비했던 현실적인 방침을 제시했다.

"조선군이 무기와 기병이 강하다 해도 처음 온 여기 지리를 잘 알 리 없으니, 200여 년을 여기서 뿌리내리고 살아온 우리가 지리를 살려서 싸우면 우리도 손 놓고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 우라노 성에서 버티다 안 되면 동쪽 미카사 산의 우치야마 성으로 옮기면 됩니다. 거기서 산세와 석축, 해자에 의지해 버티다가 그래도 안 되면 산을 타고 북쪽으로 가면 치쿠젠 동부로 갈 수 있습니다. 산맥 너머니 조선군도 쉽게 못 올 것이고, 오우치 가문 영향권이라 하지만 어차피 그들도 제대로 지배하지 못하고 있으니 거기 호족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습니다. 우선은 살아야 합니다, 주군. 비참하게 보이더라도 살아남아야 나중에 이길 수 있습니다. 쇼니 가문은 그렇게 여기까지 버텨 왔습니다."

부탁하듯 끝낸 요리후사의 말을 들은 스케츠구가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에 어리고 미숙하니 도와달라고 해놓고 제가 고집을 피웠습니다. 알겠습니다. 숙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군. 목숨을 다해 보필하겠……."

"큰일 났습니다!"

드디어 스케츠구를 설득하고 회의가 잘 풀리려는 순간 병사 하나가 소리치며 저택으로 뛰어 들어왔다. 말을 끊긴 요리후사만이 아니라 스케츠구도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느냐?"

"동쪽 히에카와 건너, 다자이후 천만궁이 있는 곳에 조선군 기병들이 나타났습니다. 숫자가 적어도 몇백은 됩니다."

동쪽 히에카와 건너편 다자이후 천만궁이 있는 곳은 미카사 산 아래.

즉, 요리후사가 제안한 첫 퇴각 목표인 우치야마 성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계획을 세우자마자 조선군이 첫 단계부터 박살 낸 것이다.

병사의 말을 들은 모든 회의 참가자의 얼굴이 굳어지는 가운데, 요리후사의 얼굴은 한층 더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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