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38화
38화
놀란 이종무는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양녕은 계속해서 촌로에게 말했다.
"대신 우리가 지금 히에카와 강줄기를 북쪽으로 하나 더 내고, 하카타 남쪽에 외성을 만드느라 해자를 파고 토벽도 쌓아야 해서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니, 장정을 하나 보내 일하게 하는 집은 일꾼 데려다 쓰는 값을 제하고 2할 5푼만 거두겠다."
그 말을 들은 마을 대표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촌로가 조용히 시키고 양녕에게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소출의 3할만 거두시고 장정을 보내면 5푼을 더 감해 주신다고 하지만, 장정 하나가 일하는 값이 한 집 소출의 5푼이나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정말이다. 일하는 값만이 아니라 수확기에 그 집 일손이 하나 줄어드는 것도 계산에 넣고 후하게 친 것이야. 혹시라도 내가 말을 바꿀까 걱정된다면 조선국의 대군이자 정동군의 도원수로서 약조한 서류를 만들어 주겠다."
양녕의 말에 촌로가 화들짝 놀라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어떻게 저희가 감히 왕자님을 의심하겠습니까. 그저 세금이 관대하여 놀라서 여쭌 것뿐입니다."
"이걸로 놀라다니, 이제 말할 것까지 들으면 혼절하겠구나. 만일 장정을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정동군에 병사로 보낸다면 5푼을 더 감하여서, 그 집은 세금을 2할만 거두겠다."
뜻밖의 말에 이번에는 다들 웅성거릴 생각도 못 하고 한참을 서로 눈치만 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양녕이 말했다.
"전쟁터에 병사로 데려가는 값이 일하는 것과 똑같이 5푼이면 사람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너희가 싸움에 능하지 않은 것을 아니 위험한 곳에는 보내지 않을 것이고, 이번 원정만 끝나면 군에 남고자 하는 이들만 남기고 집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아, 목숨값이 문제가 아니라 혹시라도 우리가 전쟁에 지고 이전 영주들이 돌아온다면 조선 편에서 싸웠다고 보복당할 것이 걱정일 수도 있겠구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왕자님. 저희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감히 하겠습니까. 그저 높으신 분이 저희에게 뭔가 고르라고 해 주신 적이 머리털 나고 처음인지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 가만히 있던 것이니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기겁해서 다 같이 고개를 푹 조아리고, 촌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양녕은 그 모습을 보고는 껄껄 웃더니 말했다.
"그러다 진짜로 혼절할 것 같으니 그만 다들 고개를 들거라.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너희가 진짜 그런 생각을 했더라도, 사람이 자기 목숨을 걱정한다는 데 어찌 화를 내겠느냐. 그리고 이런 것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으면 여기 모인 마을 대표끼리 토의해서 정하면 어떻겠느냐? 나도 잠시 할 일이 있으니 마침 잘된 일이다."
"감사합니다, 왕자님. 그러면 할 일을 마치시기 전까지 후딱 토의하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촌로가 천막 한쪽으로 마을 대표들을 모아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동군단장께서 아까 나에게 뭔가 말하려 하지 않으셨소? 내 저들에게 일단 설명을 다 해야 할 것 같아 그때는 듣지 못했으니 지금 말씀하시오."
양녕이 이종무를 보며 물었다. 이종무는 아까 전의 놀란 표정은 어디론가 가 버리고,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하고는 양녕에게 말했다.
"아무리 저들이 점령지의 왜인들이고, 정동군 군량도 줄어들어 충당할 필요가 있다고는 하지만 소출의 3할이나 거두는 건 과한 세금에 민심이 떠날 수 있지 않겠냐 말씀드리려던 거였습니다. 그런데 저들 반응을 보니 놀라기는 하면서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지금은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어찌 된 영문입니까?"
"조선에서는 보통 소출의 1할을 세금으로 거둬 가지만, 일본 영주들은 보통 4할씩 거두오. 그런데 기본 세금이 3할이고, 장정을 보내면 2할까지도 내려간다고 하니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차분하게 말한 양녕과 반대로, 그 말을 들은 이종무는 놀라움 반 성남 반인 목소리로 말했다.
"세금이 4할이라니, 나라에서 태수의 자리를 받아 고을을 다스리는 놈들이 어찌 그렇게 백성들을 수탈한단 말입니까. 그놈들이 그러고도 목민관입니까?"
"태수라고 하지만 결국 나라에서 인정받은 호족들일 뿐이고, 저마다 사병을 키워서 다투고 땅을 뺏기 바쁜 이들이지 않소. 다른 호족들을 이기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최대한 세금을 거둬서 무장과 훈련에 힘쓰는 것이오. 자기 세를 과시하기 위한 사치품들은 덤이고 말이오."
"그래서 저들이 무예에 능하고, 갑옷은 튼튼하고도 화려한 것이었군요."
"맞소. 그렇게 소수의 무사들이 많은 돈을 들여 무예를 익히고 무장한 것이 저들 전투력의 근간이기에, 저들은 우리에게 지고 무사들을 잃을 때마다 정예병력과 돈을 동시에 날려 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오."
"한번 제대로 꺾이면 다시 일어나기 어려운 구조 아닙니까?"
"그렇소. 그게 잡졸들의 수급을 취하는 것보다 적 무사들을 노리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오."
양녕과 이종무가 얘기하다 잠시 조용해지자 촌로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저, 두 분 말씀은 다 마치셨습니까?"
"오, 그래. 토의는 다 끝났느냐?"
"예, 왕자님. 왕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잘 생각했다. 그럼 각 마을 대표는 자기 마을 어느 집에서 장정을 보냈는지, 그 장정이 일하러 온 것인지 병사로 온 것인지도 정리해서 내일 중으로 우리에게 주어야 세금을 맞게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또 한시바삐 일손을 쓸 생각이니 장정들은 내일 정오 전후로는 정동군 진영에 모이게 해라."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정동군의 움직임이 새어나갈 것을 대비해 출정이 모레라는 말은 빼고 말한 양녕에게 마을 대표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대표들의 발소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이종무가 양녕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선처럼 농민들이 평소에는 군역으로 수자리도 서고 유사시에는 병사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이곳 농민들은 농사만 짓고 살았다면, 설사 많은 수를 징집해도 전투에선 기대할 수 없는 법입니다. 더군다나 모레가 출정인데 내일 오후에나 다 모이면 제대로 훈련시킬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나도 저들이 전력이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소. 기껏해야 머릿수 채우는 정도고, 패잔병들 때려잡는 일에나 도움이 되면 잘한 것이겠지."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바로 대답하는 양녕의 말에 이종무는 더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럼 어째서 일하러 오는 이들보다도 세금까지 더 감해 주시면서 병사로 모으신 것입니까?"
"조선을 위해서 일한 이들이 이득을 보고, 조선을 위해서 싸운 이들은 더 큰 이득을 보는 사례를 만들기 위해서요. 지금은 정동군에서 일하고 싸우면 세금을 감해 주는 정도지만, 나중에는 조선말을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자, 조선과 연줄이 있는 자가 다른 왜인들보다 여러모로 이득을 많이 보는 상황을 만들기 위한 포석이오."
"저는 대강은 이해해도 대군께서 어디까지 내다보시는지는 잘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다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신 것이겠지요. 그럼 왜인 장정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들이 조선말과 풍습에 더 익숙해지고, 조선 사람을 더 많이 알게 하려면 왜인은 적고 조선인은 많은 환경에 두어야 하니, 최대한 여러 부대로 흩어서 배치하시오. 혹시라도 기밀이 새어 나갈 우려가 있으니, 일하러 모인 이들은 군진 중심부에서 먼 외성 공사에 투입하고 병사로 온 이들은 포수나 궁수가 아닌 살수(근접병) 부대에 넣으시오. 무기는 그나마 장병기를 들려 주는 게 다루기 좋을 테니, 전리품으로 얻은 것들 가운데 성한 것을 골라 들려주면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럼 흩어서 배치하되, 왜말을 아는 조선 병사와 짝을 이루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지시를 전달받는 것은 물론이고, 익숙해지고 말을 배우는 것도 더 쉽겠지요."
"좋은 생각이오. 그리하시오. 그리고 한 가지 더, 조선 병사들에게 알려줘야 할 게 있소."
"왜인이 아니라 조선 병사들에게요? 무엇입니까?"
* * *
1419년 10월 중순 모일 오전.
석성진 외성 밖.
세금 결정과 왜인 병사 모집이 결정된 이틀 뒤, 석성진 외성 밖 공터에는 정동군 병사들이 집결해 있었다.
군데군데 왜인 출신 병사들이 섞여 있었는데, 왜말을 아는 병사가 통역해주어야 그나마 말이 통하는 상황이었지만 조선인 병사들과 얘기하는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전전날 양녕이 이종무에게 내린 마지막 지시대로, 무사들이 전쟁과 자신들의 사치를 위해 세금을 4할씩이나 거둬 갔었다던 얘기를 조선 병사들에게 알려준 덕분이었다.
"아니, 세금을 그렇게 뜯기고도 안 굶어 죽고 살았다는 게 신기하네."
"왜인들은 밥을 조금씩만 먹는다는데, 그게 위가 작은 게 아니라 아껴먹는 거였나 봐. 에구, 불쌍해라."
왜인 출신 병사가 또 뭐라 말한 것을 들은 전담 병사가 통역해 주었다.
"이 친구 말이 하루 네 홉 정도 먹었다는구만."
"네 홉? 한 끼로 먹어도 모자랄 양으로 하루를 때웠다고? 그렇게 백성들 배곯게 거둬 가고서도 모자라서 노략질까지 했단 말이야? 에라이 나이대로 벼락을 맞을 놈들!"
왜인 전체를 향한 막연한 적개심을 분리해 왜구 짓을 한 것은 무사들이고 농민들은 그 밑에서 수탈당했음을 알려 주어, 무사들을 공동의 적으로 만들고 농민 출신의 동질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이다.
조선의 세율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밥을 배불리 먹어 오던 조선 병사들에게, 세금을 많이 빼앗겨 밥을 적게 먹었다는 것보다 더 공분할 소재가 없던 것도 한몫했다. 아니, 그 효과는 양녕이 예상한 이상이었다.
"나 같아도 그렇게 뺏어가던 놈들 때려잡을 기회도 주고 세금까지 깎아 준다 하면 신나서 따라갔을 거야. 그 심정 이해하고말고."
"그나저나 이렇게 한 다리 건너 말하느라 제대로 못 알아들으니 저 친구도 답답하겠네. 빨리 조선말을 가르쳐 주든지 해야겠어."
그렇게 한참 이어진 병사들의 수다는 양녕이 단상에 올라오며 조용해졌다. 펄럭이는 검은 좌독기 아래에 당당하게 선 양녕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싸우러 가는데 길게 말해 봐야 시간만 잡아먹을 뿐이니 짧게 하겠다! 너희도 새로 들어온 왜인 병사들에게 들었겠지만 여기 무사라는 놈들은 소출의 4할씩 거두어서 칼도 만들고, 갑옷도 만들고, 무예도 닦았다. 그런데 그렇게 백성들 고혈을 짜내서 싸울 준비만 하던 놈들과 저번에 싸워 보니 어떠했느냐?"
자신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한 병사들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천천히 둘러보며 양녕이 말을 이었다.
"하나같이 무식하게 돌격만 하다 총알 밥이 되어 몰살당하고, 구주도의 절도사라는 놈은 목숨만 건져 도망갔으며, 쇼니 가문의 당주라는 놈은 왜구 주제에 뼈대 있는 집안이라며 유세를 부리다가 정작 우리에게 붙잡히니 꼬리를 말고 순순히 협력하고 있지 않느냐! 저들이 용맹하고 무예에 능하다는 것도 순 허풍이다! 이제 저 허풍선이 해적 놈들의 대가리를 깨 버리러 갈 때가 되었다!"
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아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면서 쇼니 가문이 변절했다는 내용까지 은근슬쩍 섞어 넣은 양녕은 마지막으로 허리춤의 환도를 뽑아 들고 외쳤다.
"용맹한 정동군의 병사들아! 우리의 이번 목표는 다자이후! 추악한 왜구 쇼니 놈들이 근거지 삼아 쥐새끼처럼 웅크리고 있는 소굴이다! 가서 모조리 쓸어버려 왜구들에게 죽어간 이들의 원수를 갚자! 출정이다!"
양녕이 환도를 높게 치켜든 것을 신호로 크게 울리기 시작한 태평소 소리는 곧 울려 퍼지기 시작한 병사들의 함성과 섞여 석성진 하늘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부대마다 부대기를 앞세우고 대열을 이루어, 다자이후가 있는 동남쪽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다자이후 전역의 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