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37화
37화
"그런 적임자가 있다면 일본 조정에서도 그자를 우선 보내겠군요. 그런데 꼭 그자를 고르신 이유가 있습니까? 삼한 출신 가문을 협상 담당으로 지목해서 저들을 삼한 출신과 일본 토박이로 갈라지게 하시려는 것은 알겠지만, 어차피 이번 원정의 목표는 구주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 아닙니까. 아군이 불리하거나 버거운 상황인 것도 아닌데 굳이 협상까지 할 의미가 있습니까?"
최윤덕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저들이 출신에 따라 갈라지게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부수적인 소득이오. 더 중요한 목적은 협상 내용에 있고, 설령 협상이 결렬된다 하더라도 그 오우치 모리하루라는 자를 협상 담당으로 지목해야 하는 이유도 있소."
"그 협상 내용과 지목 이유가 어떤 것입니까?"
양녕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 협상의 내용은 내가 매우 중요하다 여기는 것이라 지금은 공들에게도 알려 줄 수 없소. 대신 오우치 모리하루를 지목한 이유는 알려주겠소."
"대군께서 계획하시는 것이 있으면 마땅히 그리해야지요. 지목한 이유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고맙소. 그럼 설명하겠소. 우선 오우치 가문이 임성태자의 혈통이라고 하지만 명백한 증거가 없소. 그들이 정말로 임성태자의 후손이 맞는지 뿐만 아니라, 백제 성왕에게 그런 아들이 있었는지조차 불확실하오. 솔직한 말로 그들이 사칭한 것이라 해도 사칭했다고 밝힐 자료조차 없소."
"듣다 보니 어렴풋하지만 기억이 납니다. 십수 년 전에 사신을 보내 백제 왕실의 후예라면서 옛 백제 땅을 봉토로 받고 족보와 성씨를 알고 싶다고 요청했다가 봉토는 퇴짜맞고 족보는 조정에서도 못 찾아서 결국 성씨만 받고서도 만족해서 돌아간 이들 아닙니까?"
"맞소. 그들이오. 본인들도 성씨 받은 걸로 만족할 정도로 증거가 없는 것이오. 또 오우치 가문이 무가 정권에서 정이대장군 다다음 가는 서열인 일곱 가문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전대 정이대장군과 반목하고 척을 진 뒤로 소원해진 상태요. 마지막으로 오우치 가문이 쇼니 가문을 몰아내고 풍전의 태수직을 얻었고, 축전 동쪽 지역까지 얻었다고는 하나 축전 동쪽 호족들은 그냥 오우치 가문이 자신들 위에 있다 인정만 한 정도지 실제로 오우치 가문의 영향력은 거의 미치지 않소. 애초에 오우치 가문의 본거지는 구주도가 아니라 해협 건너 본주도(혼슈)의 주방(스오)와 장문(나가토)의 두 땅이오."
"그럼 제대로 된 게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소. 삼한 혈통이고 격에 맞는 지위를 가졌으며, 구주도의 태수를 겸한다는 세 이유로 협상 담당으로 사실상 정해졌으나, 따져 보면 셋 다 어정쩡한 것이오."
"그러면 협상 담당으로 믿을 만하긴 하겠습니다. 일본하고 조선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하고 붕 떠 있는 처지니 말입니다."
"과연.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협상 담당으로 지목하신 이유가 있었군요."
어렴풋하게만 이해한 이종무와 달리 최윤덕은 무언가 알아차린 듯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최윤덕이 이종무를 비롯해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한 다른 장수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무가 정권에서 높은 서열에 있다는 것은 남북조 내전 당시 북조 편을 든 공이 있어 이후, 북조 세력이 무가 정권을 세울 때 받은 것일 터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남조 세력은 아니라는 것인데, 지금에 이르러 정이대장군과 반목했으니 남조 세력도 북조 세력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동군이 남조 세력을 치건 북조 세력을 치건 어느 한쪽에 호응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일리가 있군. 다른 이유도 있나?"
"예. 단순히 보면 우리 정동군이 축전 서부, 오우치 가문이 축전 동부를 지배해 전선이 생긴 것으로 보이지만, 오우치 가문에게 축전 동부는 제대로 지배하지도 못하고 있는 땅이고, 그 뒤의 풍전 지역도 본거지 밖이니 굳이 무리해 가며 필사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완충지대라 생각할 수도 있지요. 게다가 일단은 풍전의 태수니 구주도 영주들에게 보낸 대군의 서신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모리하루라는 자도 자신이 협상 담당이 될 것이라 생각할 테니 굳이 우리를 먼저 공격해 일을 어그러뜨리려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들이 당장 쓸 수 있는 패가 협상밖에 없는 지금 상황에서 협상 담당이 된다는 건 그만큼 조정에서 목소리를 키울 수 있는 기회니까 말이지. 그렇다면 적어도 협상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동쪽에서 오우치 가문이 우릴 공격할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게로군."
대충 감이 잡히는지 이종무가 감탄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정동군이 다른 구주도 세력들을 아무리 선제공격하더라도, 자신은 협상 담당이니 협상 대상과 싸우러 나설 수 없다는 명분이 있으니 저쪽에서도 싸우지 않을 이유는 충분하지요. 설령 제대로 통제가 안 된 축전 동부의 군소 영주들이 제멋대로 정동군을 공격하더라도 어차피 세력들이 작아 큰 위협이 되지 않을뿐더러, 군소 영주들이 정동군에 덤볐다가 패배하고 점령되더라도 어찌 되건 명목상의 축전 태수는 모리하루가 아니라 포로로 잡혀있는 미츠사다니, 풍전의 태수인 모리하루는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군. 그러면 동쪽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안정되었으니 서쪽과 남쪽만 걱정하면 되는 것이군. 그래서 대군께서 모리하루라는 자가 협상 담당이 되게끔 서신을 보내신 것이로군요. 실로 절묘한 계책입니다."
이종무가 감탄하며 양녕을 보았다.
"과찬이시오. 각설하고 그럼 다시 앞으로의 방침을 논해 보겠소. 우선 서쪽도 안정시키기는 어렵지 않소. 석성진 일대의 평야가 서쪽으로 이어진 끝에는 큰 산맥이 가로막고 있고, 그 산맥 너머에 섬과 산만 있는 곳이 비전 지역이오. 그 산맥에는 사람이 그나마 넘어 다닐 만한 고개가 한 곳 있을 뿐이라 그곳만 틀어막으면 서쪽의 적들은 험한 섬과 산만 있는 곳에 갇히게 되니 병력이 일거에 쳐들어올 걱정은 없소."
양녕은 조금 전 펼쳐 두었던 지도를 다시 막대로 짚어 가며 설명했다.
"대신 비전은 공들도 아시다시피 마츠라 가문 해적들이 수십 세력으로 나뉘어 날뛰는 해적들의 본거지이기도 하오. 그냥 두었다가는 동래에서 대마와 일기를 거쳐 구주도에 오는 아군의 보급선이 위험할 수도 있고, 적은 병력이라도 배를 타고 석성진 근처로 들어와 해안가를 건드리기 시작하면 다른 데에서 병력을 빼어 해안을 지켜야 하오."
"그렇다고 병력을 몰고 들어가 소탕하자니 섬과 산이 가득한 곳이라 시간과 병력이 엄청나게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있소. 수군여단장."
"예, 대군."
갑자기 호명된 박초가 어리둥절해하며 대답했다.
"공께서 이미 수군여단장이며 대마와 일기 두 진의 지사 대리까지 맡아 할 일이 많은 것은 알지만 임무를 하나 더 주겠소. 비전 지역 북부와 서부 해안의 마츠라 가문 해적들을 맡으시오."
잠시 무슨 소리인지 생각하던 박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해적 놈들을 해치울 수 있다면 임무 하나가 아니라 백 개가 더 생겨도 기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대군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좋소. 대신 감정에 휘말려서 무리해서는 절대 아니 될 것이오. 해적들을 잡는다고 화약과 병력, 군선을 너무 쓰면 정작 중요한 상황에 쓰지 못할 우려가 있고, 비전은 섬이 많고 해안이 복잡한 곳이라 깊게 들어가면 지리에 익숙한 적들에게 역공을 당해 위험할 수 있소. 공에게 맡기는 임무는 어디까지나 놈들이 아군의 보급선과 해안을 건드리러 기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만 견제하는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거라면 저 해적 놈들이 하던 짓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내륙 깊이 들어가지는 않으면서 해안 마을을 박살 내고 식량을 빼앗고 배들을 불태우겠습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집도 없고, 먹을 것이 없는데 고기 잡으러 나가거나 하다못해 다른 데로 옮겨갈 배조차 없으면 보급선이나 해안 교란은 고사하고 살아남을 궁리만 하는 것도 바쁠 것입니다."
일기도에서 있던 일로 왜구들을 향한 분노로 타오르던 박초는 양녕이 새로 준 해적 토벌이라는 임무가 마음에 들었는지 의욕이 가득했다.
"좋소. 그럼 거기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드리겠소. 두 부를 만들었으니, 하나는 조정에 보내고 다른 하나는 보시고 대마와 일기의 목재로 만들어서 쓰시오."
양녕은 그렇게 말하며 종이 몇 장을 꺼내 박초에게 건넸다. 받은 종이들을 펼쳐 살펴본 박초가 물었다.
"이것은 선박 도면이 아닙니까?"
"그렇소. 근접전에 능한 왜구들이 쉽게 기어오르지 못할 만큼 크고, 들이받는 것으로 왜구들의 약한 배를 부술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배요. 격군들이 노 젓는 곳과 병사들이 포 쏘는 곳을 위아래로 나누어 갑판을 하나 더 깔았고, 관측과 지휘에 적합하게 만든 망루를 올린 구조여서 판옥선이라 이름 붙였소. 지금 해적들을 견제하는 것이 약한 적들과 여러 번 싸울 상황이니, 실전에서 쓸모가 있을지 시험해 보기에 위험부담이 크지 않아 적기라 생각하오."
"알겠습니다. 만들어서 해적 놈들을 잡는 데 써 보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대군께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그럼 우리의 동쪽인 오우치 가문도, 서쪽인 마츠라 해적들도 못 움직이게 했으니 우리가 갈 곳은 이쪽이오."
양녕은 그렇게 말하며 지도에서 석성진 남동쪽 한 지점을 막대 끝에서 탁 소리가 나게 짚어 시선을 모았다.
"석성진에서 이어진 축전 평야의 남쪽 끝도 서쪽처럼 산맥이 막고 있고, 산맥 가운데를 뚫듯이 중간에 평지가 있소. 그 평지 일대가 바로 옛 구주도 통치 관청이 있던 다자이후라는 지역이오. 산맥 중앙에 있는 천혜의 관문이고, 역사가 오랜 탓에 지어진 성들도 많아 공격하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오. 하지만 여기가 쇼니 가문의 본거지이자 구주도의 중심지고, 구주도 남쪽으로 통하는 유일한 관문이나 다름없으니 무조건 뚫어야 하오. 가능하겠소?"
"예!"
장수들이 하나같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주 좋소. 그러면 모레 아침에 다자이후를 함락시키러 출정할 것이오. 그때까지 각 부대장은 준비를 마치도록 하시오.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소."
* * *
잠시 후.
다른 장수들이 물러가고 묵묵히 각자 서류를 정리하던 중, 양녕이 이종무에게 물었다.
"우리 군량은 얼마나 남았소?"
"맨 처음 대마도를 칠 때가 두 달 조금 더 먹을 양이었고, 정동군이 생기면서 추가로 그만큼을 또 받아서 아직 조금 남기는 했습니다."
"역시 그렇군. 내가 생각해 보았는데 우리가 점령한 석성진 일대가 전부 농경지고 마침 수확철이 되었으니, 여기 농민들에게 곡식을 세금으로 거두어 군량을 충당하면 어떻겠소?"
"안 그래도 그리하는 것이 어떨지 건의드리려 했었습니다."
"잘 되었소. 그럼 오후에 우리가 점령한 지역의 각 마을 대표들을 모아주시오. 그 마을 호족에 가까운 자이건, 경험 많은 촌로건, 떠밀려 온 자건 상관없소. 그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한 번에 세금을 어찌 거둘지 말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럼 군진에 민간인을 함부로 들일 수 없으니 외성 밖에 천막을 치고 거기 모은 다음 알려드리겠습니다."
* * *
같은 날 오후.
석성진. 정동군 진영 외성 밖 천막.
해가 중천을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이미 마을 대표들이 다 모여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금방 모으셨소?"
천막에 들어오며 양녕이 신기하다는 듯 이종무에게 물었다.
"기병들 도움을 받았습니다. 기병들이 말을 타고 각 마을에 가 대표 소집을 알리고, 거기서 대표를 데려올 때는 말 뒤에 태우고 오라고 하니 금방이었습니다. 또 마을 대표를 보내라는 것도 구구절절 설명하면 길어지기만 할 것 같아서, 세금을 정할 것이니 결정권을 맡길 만한 사람을 보내라고 지시하게 했습니다."
"역시 정동군단장은 믿음직스럽구려. 자, 그럼 시작하겠소."
양녕이 헛기침을 몇 번 하자, 어딘가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마을 대표들의 시선이 양녕에게 모였다.
"나는 조선의 대군, 그러니까 왕자이자 여기를 새로 지배하게 된 정동군이라는 군대의 가장 높은 지휘관이다."
듣는 이들이 농사만 지어온 농부인 데다가 조선식 명칭에는 더더욱 익숙하지 않을 것을 고려해 자기소개를 풀어서 한 양녕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이제 우리가 여기를 통치하게 되었으니 세금도 우리가 거둘 것이다. 세금은 너희가 수확한 곡식에서 일부를 바치면 된다. 이전부터 그렇게 바쳐왔을 테니 모르지는 않겠지."
"물론입지요. 왕자님, 그러면 소출에서 얼마만큼을 세금으로 올리면 되겠습니까?"
나이 지긋한 촌로 하나가 고개를 조아리며 물어보았다.
"거둔 곡식의 3할을 세금으로 내거라."
옆에서 듣던 이종무는 자신도 모르게 놀란 얼굴로 양녕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