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36화
36화
같은 시각.
미야코(교토). 무로마치 어소.
헤이안 천도 이후로 오백 년이 넘은 일본의 수도인 미야코.
무로마치 거리에 위치해 그 이름이 붙은 쇼군의 처소인 무로마치 어소 중심에 있는 가장 큰 건물. 그 안에서도 또 다른 방보다 바닥을 한 치가량 높게 만들어 위엄을 드러낸 쇼군의 집무실에서는 평소와는 다르게 고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런 빌어 처먹을! 그전에는 원나라, 이번에는 명나라를 등에 업고 쳐들어오다니, 조선 놈들은 고려 시절부터 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내던져진 양녕의 서신이 허공을 날아 집무실 앞쪽의 열려 있는 장지문 밖, 부하들이 앉는 바닥 낮은 방의 다다미 위에 떨어졌다. 무로마치 무가 정권의 제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서신을 집어 던진 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쿵쿵 구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서신을 이렇게 한참 아랫것을 대하는 투로 써서 보내면 내 권위가 더 흔들리지 않느냔 말이야!"
한편 지금 요시모치와 단둘이 있는 사람이자, 집무실 앞의 바닥 낮은 방에 앉아있던 승려 한 사람은 그 소란 속에서도 가만히 앉아서 복잡한 눈빛으로 요시모치를 보고 있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쳐들어오다니! 나보고 어찌 막으란 말이야!"
오색 비단으로 테를 둘러 과시한, 다다미 위에 두고 의자로 쓰이는 두께 한 자짜리 다다미인 야에다타미가 요시모치의 발길질에 옆으로 밀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속에 솜을 누빈 방석용 다다미인 시토네를 집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바닥에 튕긴 시토네가 앞에 앉아 있던 승려의 얼굴로 날아갔지만, 승려는 태연한 표정으로 손만 들어 붙잡고는 말했다.
"그만 진정하십시오, 쿠보(쇼군의 경칭). 진정하시고 앉아야 대책을 논할 것 아닙니까."
씩씩거리던 요시모치가 그 말을 듣고 조금 얌전해지더니, 밀려서 기울어진 야에다타미 위에 털썩 앉았다.
"알겠소. 그러겠소. 내가 도친 선사 앞에서 추태를 보였구만."
도친이라는 법명으로 불린 승려는 별다른 대답 없이 들고 있던 시토네를 요시모치에게 내밀었다. 요시모치는 시토네를 받아 엉덩이 밑에 대강 주섬주섬 밀어 넣고 앉은 다음 푸념하듯 말했다.
"일본 국왕이라는 직함을 버리고, 명나라 황제에게 신하를 칭하는 것을 그만뒀을 뿐인데 왜 조선이 난데없이 쳐들어 왔는지 모르겠소. 변방 슈고 놈들이 해적 짓을 했다고 하지만, 내가 하기 싫어서 단속을 안 한 것도 아니고 나는 나대로 급한 일이 있었지 않소."
요시모치가 말한 급한 일이란 일본의 동부 지역, 정확하게는 일본 동부의 10개 지역의 통치를 위해 무로마치 정권 초에 설치된 관동부에서 몇 년 전 시작된 일이었다.
관동부의 장관을 보좌하는 칸토 칸레이, 즉 관동 관령인 우에스기 젠슈가 칸레이 직에서 경질된 것에 불만을 품고, 동조하는 영주들은 물론이고 관동부 장관인 모치우지의 숙부와 사촌까지 포섭해서 관동부 장관을 대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반란은 결국 반군이 패배하고 그 주모자들이 자결하며 종료되었지만, 정작 문제는 그다음에 수도인 미야코에서 터졌다. 쇼군 요시모치의 이복동생이 탈주한 것이다.
"솔직히 일이 커진 건 그놈이 자초한 일이오. 그 상황에서 도망을 치면 의심을 안 할 수가 있소?"
아버지이자 제3대 쇼군인 요시미츠의 편애를 받은 탓에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요시모치의 이복동생은 하필이면 반란을 일으켰다 죽은 우에스기 젠슈의 사위였다. 견원지간이던 형이 젠슈와 엮어 자신에게도 반란 혐의를 뒤집어씌울까 두려워했던 그는 도주 및 출가를 시도했지만, 요시모치가 보낸 측근에게 금방 붙잡혀 구류되고 말았다.
이복동생이 정말로 수상한 짓을 해 준 덕분에 빌미를 잡은 요시모치는 반역 모의가 진짜로 있던 것으로 만들고 거기에 정적들까지 엮어 숙청해 버렸다. 마지막에는 이복동생을 처형한 것도 모자라 이복동생을 구류하고, 반역 모의를 조작하는 데 기여했던 측근도 그 반역 모의에 같이 엮어 같이 죽여 버렸다. 너무 많은 것을 아는 데다가 역모 진압으로 공적이 커진 측근이 위협이 될까 두려워 저지른 토사구팽이었다.
"그렇다고 일본 국왕의 직함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진압할 수 없었을 것이오. 내가 국왕이라 칭하고 명나라의 황제에게 스스로를 신하라 칭하고 있었으면, 저 반란군 놈들도 역으로 나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우고 반대파나 남조 잔당들까지 세력에 끌어들였을지 모르는 것 아니오. 조공을 바치고 얻는 큰 이득을 버린 것은 아쉽지만,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그 말을 들은 도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숨기려 애썼다.
'깊게 생각하고 한 일이 아니라 돌아가신 부군 요시미츠님에게 반항하는 마음으로 저지른 일이고, 그 방법이 명나라의 심기를 잔뜩 긁는 것만 아니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삭인 도친이 꾹 참으며 요시모치에게 말했다.
"단순히 일본국왕이라 칭하는 것을 그만두고 명나라 황제에게 칭신하는 것을 거부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닙니다. 그게 문제였다면 명나라 사신을 만나 보지도 않고 박대해서 돌려보내셨던 2년 전에 명나라가 직접 쳐들어왔겠지요."
은근히 요시모치가 외교적으로 저지른 일을 꼬집으며 도친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왜구 토벌이라는 명분으로 땅을 빼앗으러 온 조선뿐입니다. 큐슈의 세력들은 서신을 받고 나면 규합은커녕 자기들끼리 의심하고 싸우느라 바쁠 테니, 중앙과 관동의 병력들이라도 모아서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든 적들이 큐슈에 제대로 자리 잡기 전에 막기만 하면 바다를 건너 원정 온 조선군은 끝내 힘이 빠져 전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군을 물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병력을 일으키는 건 좀……."
"쿠보! 자식이 사경을 헤매고 있고, 목숨을 건지더라도 반신불수가 될 판인 저도 이리 냉정하게 생각하려 애쓰는데, 쇼군이신 쿠보께서 어찌 그리 나라의 일을 가볍게 여기십니까!"
도친이 목소리를 높였다. 도친의 본명은 시부카와 미츠요리. 아들 요시토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출가한 전임 큐슈 탄다이이자, 쇼군 요시모치의 먼 친척 형이기도 했다.
"그래도 위험하긴 하지 않소."
도친의 호통을 들은 요시모치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대체 왜 괜히 관동부의 일에 그렇게 간섭을 하셨습니까."
도친은 여전히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반란이 진압된 다음 관동부 장관인 모치우지는 가담자를 철저히 색출할 뿐만 아니라 그 사위들까지 처형하거나 자결로 몰아넣었는데, 정작 자신은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만으로 이복동생을 죽였던 쇼군 요시모치가 이를 너무 과하다며 방해한 것이다.
반란이 진압되고 공석이 된 슈고직에 모치우지가 임명한 새 슈고를 인정하지 않고, 반란 가담자의 형제를 그 자리에 임명해 버린 것으로 시작된 이 불화는 점점 커져서, 원래 역사에서는 이후에 내전 직전까지 갔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소. 관동부에서 통치하는 관동 10국이라는 것이 이름만 보면 큐슈보다 한 지역 많은 정도지만, 실제로는 그 면적을 다 합치면 일본 땅 전체의 1/3에 달하지 않소. 반란을 일으킨 호족들을 전부 약화시키고 관동을 장악하면 큰 위협이 될 것은 당연한 이치요."
요시모치가 이치에 맞는 말을 하자 도친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게다가 관동부 장관을 세습하는 것도 나와 같은 아시카가 가문 아니오. 그것도 어디 먼 방계도 아니고, 지금의 무가 정권을 세운 초대 쇼군이신 타카우지 님의 아드님이 장관으로 임명되며 시작한 방계인 탓에 지금 장관인 모치우지는 나하고 7촌밖에 떨어져 있지 않소. 세력을 키우면 당연히 나에게 위험이 되지 않겠소? 아니, 이미 세력도 키웠지. 원래 관동부 장관을 칸레이라 부르고 그 보좌를 시츠지(집사)라 불렀는데, 지금은 은근슬쩍 하나씩 올려 보좌를 칸레이라 부르고 장관 본인은 칸토 쿠보라 부르지 않소? 이 나라에서 쇼군을 가리키는 말인 쿠보라 불리는 이가 나하고 모치우지 둘이지 않소, 이미!"
말을 하다가 스스로 열을 받았는지 요시모치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기 시작했지만, 도친도 할 말은 있었다.
"관동부와 지금 장관이 세력을 키우고 있는 것은 저도 압니다. 관동부가 있는 카마쿠라 지역이 이전 무가 정권(카마쿠라 막부)의 거점이기도 했고, 지금 무가 정권의 초대 쇼군이신 타카우지 님께서도 카마쿠라의 쇼군직을 승계하는 식으로 자리에 오르셨으니 쿠보의 친척이 카마쿠라를 장악한다는 것이 어떤 위협이 되는지도 잘 압니다. 견제를 하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너무 대놓고 해서 문제인 것입니다."
도친의 말에 요시모치도 생각한 것이 있는지 몇 번 심호흡을 하고는 진정된 말투로 말했다.
"알겠소. 그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티가 났으니 인정하겠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중앙과 관동의 군사를 모아서 보낸다는 게 쉽지 않은 건 사실이잖소. 미야코와 주변 지역의 병력을 모아 큐슈로 보냈다 칩시다. 그럼 우리 후방에 있는 관동부 장관이 텅 빈 미야코 근방을 가만히 보고만 있겠소?"
"빈틈을 노릴 거란 보장은 없지만, 아닐 거란 보장도 없지요."
"그럼 우리 병력은 여기 그대로 남겨두고 관동의 군사를 모아서 보낸다고 칩시다. 순순히 모치우지가 군사를 보내 준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들이 큐슈로 가려면 어디를 거쳐야겠소?"
"여기 미야코를 지나야겠지요."
이어지는 요시모치의 말에 이번에는 도친이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거 보시오. 결국 어찌 되건 위험하지 않소."
요시모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다고 외적이 쳐들어 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쿠보의 권위에 더 큰 위험이 됩니다."
"알고 있소.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오. 그것 좀 주시겠소?"
도친이 아까 요시모치가 던졌던 양녕의 서신을 집어 건네주었다. 서신에는 항복 권고 말고도 말미에 추가로 내용이 있었다. 그 부분을 요시모치가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럼에도 혹시라도 협상을 원한다면, 우리는 토박이 왜인들은 믿지 못하겠으니 삼한의 혈통을 가진 자를 보내야만 응할 것이다."
요시모치가 읽은 서신을 바닥에 툭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협상의 여지를 주었으니, 내키지는 않지만 여기 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적합한 사람도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꼭 지목해서 보낸 것처럼 말입니다."
도친의 말에, 이번에는 요시모치와 도친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 * *
같은 시각.
정동군 지휘소.
"과연. 그렇게 되면 구주도의 영주들은 북조와 남조 세력으로 나뉘고, 일본 다른 지역의 병력은 동과 서로 나뉘고, 삼한 출신인 이들과 아닌 이들도 저마다 나뉘어 서로 의심하게 되겠군요."
양녕에게 일본의 정세 설명을 들은 우박이 말했다.
"그렇소. 의심하고 뭉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짜로 서로 싸우기까지 시작하면 우리에게는 더 좋은 일이오."
"그런데 그렇게 보내면 누가 협상하러 올지 확실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백제와 고구려의 귀족으로 나라가 망할 때 일본에 건너가 자리 잡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최윤덕이 양녕의 말에서 불확실하다 느낀 부분을 질문했다.
"지금 상황에서 보낼 가장 적합한 인물은 하나뿐이오. 그자를 보내지 않는다면 뭐, 일본 조정이 바보라는 얘기일 테니 그건 그거대로 좋은 소식이오."
"그게 누구입니까?"
"백제 성왕의 아들인 임성태자의 후손이자 무가 정권에서 정이대장군 다다음 가는 서열의 가문이며 구주도 풍전(부젠)의 태수를 겸직하여, 혈통과 격에 맞는 지위, 거기에 구주도와 관련 있다는 점까지 이번 협상 담당에게 필요한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자. 오우치 모리하루라는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