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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34화 (34/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34화

34화

"태반의 표식으로 삼은 그 소나무라 저렇게 울타리까지 둘러놓고 중요하기 여기는 것이었군요. 그런데 천년 넘은 소나무가 저렇게 가느다랄 수 있습니까?"

"왜인들이 주장하는 역사에 뭐 얼마나 진실이 있겠소. 저것 또한 저들이 섬기는 괴력난신 그 자체니 없애야 할 뿐이오. 베어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뿌리도 캐내서 쓰도록 하시오. 천년은 아니더라도 오래 묵은 나무일 테니 쌓인 송진까지 치면 쓰임이 많을 것이오."

장수들과 얘기를 마친 양녕이 다시 뒤로 돌아 신관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가 괴력난신을 섬기면서도 불제자 행세를 했으니, 조선에서 그런 놈들에게 하던 것처럼 강제로 환속하게 될 것이다. 너흰 머리를 따로 기를 필요도 없으니 좋겠구나. 그리고 환속하더라도 여기 그냥 두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조선 땅으로 보내질 것이다. 노비로 만들지 않는 것을 감사히 여겨라."

이번에는 신관들 너머로 사당 본전 건물을 보며 장수들에게 말했다.

"사당 본전은 물론이고 회랑에 이르기까지 건물이란 건물은 모조리 헐어 버리시오. 쓸 만한 것은 사당으로 쓰였던 흔적을 없애고 석성진에 옮겨 써도 좋소. 또 건물이 아니라도 사당 터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작은 울타리라도 모두 뽑아 버리시오. 특히 사당 본전은 주춧돌만이 아니라 다듬은 석재로 바닥에 많이 깔려 있으니 석성진의 건축재료로 쓰면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아예 무엇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게 만들겠습니다."

그렇게 양녕이 최윤덕에게 지시하는 와중에 창고에 갔던 병사들이 이것저것 잔뜩 짊어지고 와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대군. 지시하신 대로 창고에 있던 물건들을 챙겨 왔습니다."

양녕이 창고에서 나온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활과 화살, 창과 칼, 갑옷 등이었다. 그 대다수가 일본식 무구인 가운데 몇몇 전혀 다르게 생긴 것들이 있었다.

"이 투구는 조선의 것을 닮았습니다. 저 활도 조선의 활처럼 생겼으나 조금 크기가 크군요."

뜻밖의 물건에 장수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몽골식 무구일 것이오. 아마 원나라와 고려를 막아 냈을 때 얻은 것들이겠지. 태풍이라는 요행수로 이겨 놓고서 자기 무력으로 이긴 것처럼 무예의 신에게 감사 의미로 전리품을 바친 놈들이 많았나 보오."

활을 집어 들어 살피며 말하던 양녕이 병사에게 물었다.

"창고에 약탈품으로 보이는 것이나 교역품은 없었느냐?"

"없었습니다. 애초에 창고도 별로 크지 않아서 지금 저희가 가져온 것이 전부입니다."

"교역 거점인 패가대에서 떨어져 있는 데다가, 사찰이 아니라 외국 상인들이 시주하지 않은 게 이유인 것 같군. 알겠다. 그럼 사당 본전 물건들이라도 모두 가져오거라."

"생각보다 규모가 작습니다. 오늘 바로 건물과 나무를 빼고는 다 챙겨갈 수 있겠습니다."

"그럴 것 같소. 챙긴 다음 분류하는 것은 공에게 맡기겠소. 무구류는 전리품에 준해서 처리하시오."

양녕이 말하는 동안 병사들이 하나둘 사당 본전에서 꺼내온 물건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구리 촛대와 비단 깔개 같은 물건부터 사당에서 쓰이는 구리거울과 방울, 작은 불상과 목탁처럼 불교와 섞였음을 보여 주는 물건들도 있었다.

"이것들 중에서 금은이나 비단으로 된 것, 희귀한 목재로 된 것은 조정으로 보내시오. 구리로 된 것들은 건물에서 떼어 낸 구리 장식들과 한데 모아서 조정에 보내면 될 것이오. 나머지 물건들 중에서 불교와 연관 있는 목탁 같은 것들은 성복사에 주어 쓰게 하시오."

성복사에 쓸 목탁이 없지는 않겠지만, 사당에서 압수한 물건을 주어서 조선군과 한배에 탔음을 확실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병사 여럿이 달라붙어 들고나온 것은 삭발한 승려의 모습을 한 목상이었다. 한 손에는 석장을 들었고 머리 뒤에는 광배도 달려있었다.

"이건 나한상이나 조사상 아닙니까?"

왜황의 조각상을 생각했던 최윤덕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이게 바로 하치만을 조각한 상이오. 승려의 모습을 했다 하여 승형 하치만이라 하지. 병사 여럿이 들고 와야 할 정도로 무겁고, 나뭇결에 송진이 배어 나온 것을 보아하니 재료는 소나무인 것 같소. 신성한 나무로 여기는 소나무로 깎았나 보군."

흥미롭다는 듯 살펴보는 양녕과는 반대로 최윤덕은 조금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이건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차라리 다른 모양 조각상이라면 모르겠지만, 이건 승려 모습을 한 데다가 광배도 달고 있고 연꽃 위에 앉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병사들 대다수는 불교도인데 섣불리 처리하면 동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오. 자칫하면 군승들에게 장례와 치료를 맡기고 사찰을 포섭했으면서도 불상을 훼손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으니 말이오."

최윤덕의 말을 들은 양녕이 잠시 하치만 목상을 보며 생각하다가 뒤로 돌아 병사들에게 외쳤다.

"이것이 무엇이냐! 왜황을 섬기면서 사사롭게 보살이라고 칭하고, 출가한 적도 없는 이를 승려의 모습으로 조각해 모실 뿐만 아니라 감히 아미타불의 화신을 칭한 물건이다! 깨닫지 못한 이가 깨달았다 속이는 것은 지옥도에 떨어질 대망어의 죄가 아니더냐!"

양녕은 하치만 목상에 삿대질을 해 가며 병사들을 안심시키려는 연설을 이어 갔다.

"또 하치만이라는 것이 무예의 신이라고 하지만 결국 왜구들 칼부림의 신과 다를 것이 없으니, 부처를 사칭하여 약탈과 살생을 일삼은 이것이 마구니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우리 군사들은 오늘 조선의 대군이 마구니의 목을 치는 장면을 볼 것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옆에 있던 병사의 편곤을 빼앗듯 가져가서는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눈이 휘둥그레진 궁사와 신관들이 뭐라 하기도 전에 빙빙 돌리다 편곤을 내리치자, 퍽 하는 소리를 내며 목상의 머리가 떨어져 굴러갔다.

"마구니의 목을 쳤다! 손에 든 석장은 구리니 뽑아 조선으로 보내고, 마구니의 몸통을 쪼개 열어 귀한 것이 있나 살피고 남은 것은 태워 버려라! 소나무니 아주 잘 탈 것이다!"

"네놈! 이게 무슨 짓이냐! 신벌이 내릴 것이다! 신벌이!"

그 모습을 보고 궁사가 발악하며 외쳤다. 병사가 등을 몇 번 후려쳤는데도 멈추지 않고 소리 지르는 궁사에게 다가간 양녕이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대마와 일기의 두 섬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또 여기 와서 쇼니와 시부카와 두 가문의 군대를 몰살하고, 지금 여기 와서 사당을 헐어 버리고 제 목을 치도록 신벌 비슷한 것도 내리지 않은 그 하치만이라는 귀신이 진짜로 있긴 한 것이냐?"

"바로 내리지 않는다고 신벌이 아닌 것은 아니다! 신이자 보살로 모셔진 미카도(왜황)를 욕보였으니, 언젠가 너희 왕실에도 화가 미쳐 너희 임금도 제 명에……."

"무어라 했느냐? 더 말해 보아라."

눈 깜짝할 사이에 허리춤의 환도를 뽑아 든 양녕이 칼끝을 궁사의 목덜미에 대고 말했다.

살기 가득한 양녕의 눈빛에 압도된 궁사는 칼끝에 베인 목덜미에서 가늘게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지금 조선의 임금은 두 분이시다. 상왕 전하는 내 아버지시고 주상 전하는 나의 형제이시다. 천한 오랑캐 놈이 감히 두 분에게 동시에 참담한 소리를 했으니 신하 된 자로서도 자식과 형제 된 자로서도 당장 목을 쳐 마땅하다. 여기는 사찰도 아니니 살생을 하더라도 거리낄 것이 없다. 하지만 오랑캐라고 하나 재판도 없이 처형할 수는 없으니……."

"아악!"

번쩍하고 환도가 휘둘러지고 궁사의 한쪽 귀가 바닥에 떨어졌다.

"지금은 여기까지만 해 두마. 네 재판과 처벌은 조선 땅에 압송된 다음 거기서 받게 될 것이다."

"나를 여기서 죽이건 조선에서 죽이건 달라질 것은 없다. 하치만신께서 궁사인 나를 해친 죄까지 합쳐서 갚아 줄 것이다."

"왜구들 칼질에나 가호를 내리는 왜황 귀신 나부랭이를 내가 두려워할 것 같으나? 만일 그런 것이 진짜로 있어서 나를 해치러 찾아온다 하더라도 베어 버리면 그만이다."

칼에 묻은 피를 궁사의 옷에 문질러 닦아내고 칼집에 넣으며 양녕이 말했다.

* * *

다음 날 오전.

정동군 임시 지휘소.

"대군. 수군여단장 박초입니다."

"오, 드디어 오셨구려. 들어오시오."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지휘소 천막 안으로 들어온 박초를 양녕이 반갑게 맞이했다. 천막 안에는 이미 이후의 구주도 정복 계획을 토의하기 위해 장수들이 모여있었다.

"그런데 그 상자는 무엇이오?"

"조정에서 대군께 보낸 것입니다. 종이로 봉해져 있어 저도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박초가 상자를 양녕 앞 탁자에 올려놓고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아직 어제 있던 전투의 보고도 올라가기 전이라 조정에서 별달리 내려올 만한 지시도 없었다. 양녕도 궁금하다는 얼굴로 상자 앞면에 단단히 붙어 있는 봉인을 뜯어 내고 열어서 안을 보았다.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최윤덕의 질문에 대답 대신 상자 안에 있던 것을 꺼내 옆에 내려놓았다. 구리로 된 큼직한 도장이었다. 장식 없는 직선 손잡이에는 굵은 비단 끈이 달려 있었다. 같이 들어 있던 종이를 꺼내 펼쳐 들고 읽기 시작했다.

"작위를 받은 자에게는 마땅히 그에 어울리는 도장이 있어야 봉토의 정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마도 사당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구리거울을 녹여 도장을 주조해 보내니 이것으로 권위를 삼으라."

양녕이 읽어내려간 문서 끝에는 이도의 수결과 함께 '국왕행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책봉과 관련된 문서에 임금이 찍는 도장이었다. 양녕이 도장을 들어 찍는 면을 보았다.

"부상국백지인. 그렇게 새겨져 있소."

황제의 도장을 새나 보라고 하고 그 이하의 도장은 인이라 한다.

명나라에서 조선에 내린 도장도 그런 이유로 조선국왕지인이라 새겨져 있었지만, 조선은 그 도장은 명나라에 보내는 문서에만 쓰고 자체적으로 국왕행보와 국왕신보라는 도장을 만들어 썼다.

원래 역사에서는 10년도 더 지나야 만들어졌던 그 두 도장을 벌써 만들어서 제후의 도장을 내리는 문서에 찍었다는 것은 의미가 깊은 일이었다.

"도장이 없어 조정에 올릴 장계들에 수결만 했었는데 잘 되었소. 이제 이 도장을 찍으면 될 것이오. 그나저나 왜인들이 신이 깃드는 신체라 여겨 사당에 두고 모시던 것이 구리거울인데, 그게 녹아 내가 쓸 도장이 되도록 아무 일 없던 것을 보면 역시 왜국의 신들은 존재하질 않거나 잡신이라 힘이 없나 보오."

양녕의 말에 다들 허허허 웃는데 정작 도장을 가져왔던 박초는 표정이 굳어 어색하게 입꼬리만 올리고 있었다.

다른 장수들도 눈치챘는지 웃음이 멈췄다.

"지난 며칠간 대마와 일기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보고해 주시겠소?"

양녕이 넌지시 물었다.

"대마도에는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병사들이 주둔할 요새는 다 지어졌고, 주민들이 집 짓는 것도 끝났습니다. 겨울을 대비해서 장작도 충분히 해 두었습니다. 화전도 더 만들었고 비탈이 심한 곳은 대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무너뜨려 천모만에 흙이 다 쏟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주민들은 정착 첫해라 겨울을 날 식량이 부족할까 걱정되었는지, 알아서 산에서 비자나무를 베거나 귤 종류를 수확해 동래부에 내다 팔아 식량을 사서 쌓아 두었습니다."

"확실히 화전을 하며 살던 이들이라 자립심도 있고 생존력도 있구려. 매우 좋은 일이오. 그럼 일기도는 어떻소?"

양녕의 기쁜 표정에도 박초는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당과 사찰은 헛소리를 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전부 없앴습니다. 목재는 요새를 짓는 데 쓰고, 거둔 물건들은 조정에 보냈습니다. 원나라와 고려에 맞서 싸운 것을 기념한 비석들을 쪼개고, 사당과 사찰의 주춧돌은 뽑고 성곽은 헐어내 그 석재들을 모두 요새를 짓는 데에 쓰고 있습니다."

"마을들은 어찌하였소?"

"가산은 전부 몰수했습니다. 정동군에서 쓸 것과 조정에 보낼 것을 분류했고, 곡식들은 모아서 보관했습니다. 논밭의 작물들도 수확하면 양이 제법 될 테니, 군량에 보태거나 혹시라도 대마도에 겨울 식량이 모자랄 때 쓰면 될 것입니다. 주민들은 모조리 붙잡아서 조선으로 압송하는 중입니다. 저항해서 베어 버린 놈도 제법 있지만 다친 병사는 없습니다. 압송은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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