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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33화 (3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33화

33화

잠시 후.

석성진 동쪽. 거기포(하코자키)

성복사에서 시범을 보인 것처럼 하라며 석휴에게 병력 일부를 떼어 승천사에 보내고, 장수들과 남은 병력을 이끌고 양녕이 향한 곳은 전날 기병여단이 상륙했던 거기포 해안이었다.

소나무숲과 바다 사이로 길게 뻗은 모래사장을 따라 한참 가자 사당의 입구임을 알리는 붉은 도리이가 백사장을 향해 서 있었다. 그 안쪽에 2층 누각으로 된 문이 바다를 향해 서 있었고, 문 좌우에서 뻗어나와 본전을 넓게 감싼 회랑과 그 바깥의 소나무들에 둘러싸인 사당이 있었다.

패가대 일대 최대의 사당인 하코자키 하치만궁이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나?"

양녕이 정문을 지키던 병사에게 물었다. 하치만궁의 정문은 물론이고 회랑 주변까지 병사들이 돌아다니며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예. 빠져나간 놈도 없고, 밖으로 무슨 신호를 보낸 것도 없었습니다."

"좋아. 잘했네."

고개를 끄덕인 양녕이 사당 정문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고, 장수와 병사들이 따라 들어갔다.

"아무도 안 나오는군."

주변을 둘러본 양녕이 말했다.

그 말대로 양녕과 장수들은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경내에 다 들어오도록 사당에서는 한 사람도 나와 보지 않았다. 눈빛이 날카로워진 양녕이 목을 가다듬고는 크게 외쳤다.

"조선의 대군이 왔는데 한 놈도 나와 보지 않다니 무엄하다! 너희는 가서 신관들을 끌고 오고 일부는 창고를 뒤져 보아라!"

"예!"

병사들이 우르르 사당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던 최윤덕이 말했다.

"여기가 하치만궁이면 대마도와 일기도에서 헐어 버린 사당들과 같은 이름 아닙니까?"

"맞소. 신공이라는 여왕과 그 아들인 하치만을 무예의 신으로 모시는 사당이오."

"왜인들이 나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시절에 바다를 건너 삼한을 정벌했다는 얘기를 진지하게 믿고 사당까지 세우다니 참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오. 정확히는 신공 여왕이 만삭인 상태에서 주술을 부려 애가 나오지 않게 막았다가, 삼한을 정벌하고 여기 와서 낳았다 하오."

양녕의 말에 최윤덕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참 내, 괴력난신도 이런 괴력난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당인데 여기저기 무슨 보살이라 쓰여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 이따 알려 주겠소."

최윤덕의 질문에 양녕이 대답하려는데 병사들이 사당 안쪽에서 신관들을 끌고 나오는 바람에 대화가 끊겼다. 등 뒤로 손을 묶인 채 일렬로 서 있는 신관 중 가장 잘 차려입은 자에게 양녕이 물었다.

"네가 이곳의 궁사(사당에서 가장 높은 신관)냐? 어째서 조선의 대군이자 정동군의 도원수가 온다는데 내다보지도 않았느냐?"

조금 전에 성복사에서 주지인 양예에게 말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말일 뿐만 아니라 고압적인 말투였다.

"조선의 왕자가 하치만신께 기도드리러 온 것도 아닐 텐데 내가 굳이 나와야 할 필요가 있소? 우리는 일본의 다른 영주들이 이 근처에서 치고받고 싸울 때에도 나와 보지 않았소."

"너희는 츠시마와 이키의 두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문으로라도 듣지 못했느냐?"

뻣뻣한 말투에도 양녕이 피식 웃으며 물어보자 잠시 머뭇거리던 궁사가 대답했다.

"못 들었소."

"그래. 다행이다. 그 소식들을 듣고서도 안 나와 본 것이라고 하면 네 간이 얼마나 크게 부었는지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네가 못 들었다니 알려 주마. 우리는 그 두 섬에서 하치만과 스미요시를 모시는 모든 사당을 헐어 버리고 주춧돌까지 뽑아 바다에 던졌다. 기물들은 조선에 보냈으니 지금쯤 녹아서 다른 게 되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요."

궁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불보살을 모신 사찰도 아니고 일개 잡신을 모신 사당일 뿐이지 않느냐. 유학자가 괴력난신을 모시는 사당을 헐어 버리는 데에 이유가 있느냐?"

"잡신이라니! 사당으로 지어졌고 신관인 우리가 모시고 있을 뿐, 엄연히 하치만 대보살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잡신이라는 말에 발끈한 궁사가 항의했다.

"목소리가 크구나."

양녕의 덤덤한 한마디에 궁사 옆에 있던 병사가 궁사의 오금을 발로 차서 강제로 꿇렸다. 그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다른 신관들도 하나둘 오금을 차여 바닥에 꿇어앉았다.

"지금 하카타의 쇼후쿠지는 석가여래를 모신 유서 깊은 사찰이라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아 아무런 피해를 본 것 없이 무사하다. 너희도 사찰과 다를 것 없다는 증명을 하면 같은 대우를 해 주마."

양녕이 궁사를 내려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너희가 모신다는 그 하치만 대보살이라는 것이 어느 불경에 나오느냐? 내 아우가 불교에 관심이 많아 나도 경전을 좀 읽어 보았지만 일찍이 그런 이름의 보살은 본 적이 없다. 또 너희는 옛 왜황인 오진이 죽은 뒤 하치만 대보살이 되었다 하는데, 출가하지도 않고 죽은 이가 보살이 될 수 있느냐?"

"그분께서 붕어하시고 하치만신으로 모셔진 다음, 몇 백 년 뒤에 출가를 하셔서 그때 조정에서 보살의 호칭을 내린 것이다."

"죽은 귀신이 출가했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 보살을 인간들이 조정에서 임명하는 것이더냐? 인간이 붙인 보살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 굳이 인정받고 싶으면 나도 조선 조정에다가 여래 칭호를 내려달라고 할 테니 나를 부처로 모셔라. 그럼 내 하치만이란 것도 보살이라 인정해 주마. 어떠냐, 지금 바로 양녕여래께 절을 올려보겠느냐?"

양녕의 말에 주변의 장수들과 병사들이 껄껄거리고 웃었다. 얼굴이 벌게진 궁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보살은 존경의 의미로 올린 칭호인 것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하치만신께서는 곧 아미타불의 화신이시니 모실 자격은 충분하다."

"그놈의 화신 운운을 정말로 진지하게 믿느냐? 그럼 그렇다고 치고, 하치만이란 것이 아미타불의 화신이면 아예 아미타불을 모시면 될 것이 아니냐. 머리를 밀기는 싫어서 그러냐?"

장수들과 병사들이 또 껄껄거리고 웃는 도중에 최윤덕이 말했다.

"신을 모신 사당인데 왜 보살이니 뭐니 쓴 것이 붙어 있나 했더니 그런 것이었군요."

"그렇소. 왜인들은 자기네 나라의 신령들이 다 불보살의 화신이라 여기오. 그래서 사당 안에 절이 있기도 하고, 절 안에 사당이 있기도 하오."

최윤덕에게 대답한 양녕이 다시 궁사를 내려다보았다.

"다음 질문이다. 그 하치만이라는 것이 무예의 신이라는데, 중생을 극락정토로 이끄는 자비로운 아미타불의 화신이 어찌 전쟁을 부추기는 무예의 신일 수 있단 말이냐?"

계속해서 예리하게 허점을 찌르는 양녕의 질문에 머뭇거리다가 대답한다.

"전륜성왕 중 철륜왕도 힘으로 온 세상을 정복하지만 석가모니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기에 불교의 수호자로 존중받는다. 그것과 다를 것은 없다."

"하치만이 전륜성왕이라고? 그러면 그 어미인 진구는 어째서 삼한을 정벌했다 주장하느냐? 당시에 이미 삼한에는 불교가 퍼지고 있었고, 일본 땅에는 불교가 퍼지지 않았는데, 전륜성왕이라면 삼한에 화신으로 나타나 일본 땅을 정벌하고 불교를 퍼뜨리는 것이 맞지 않느냐?"

양녕의 지적에 말문이 막힌 궁사가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병사에게 무언가 보고받던 최윤덕이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양녕에게 무언가 건네며 말했다.

"대군. 저 신관들이 끌려 나오기 전까지 사당 안에서 이걸 앞에다 놓고 축문을 읽고 있었다고 합니다."

양녕이 받아든 물건을 살펴보았다. 금가루를 아교에 갠 것으로 글씨를 쓴 쪽물 들인 종이 여러 장이었다. 종이마다 필체는 달랐지만 쓰여 있는 글자는 같았다.

"적국항복."

소리 내어 읽은 양녕이 궁사에게 물었다.

"이 종이들은 무엇이냐?"

궁사는 묵묵부답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면서 좋은 처우를 기대하느냐? 네놈이 말을 안 하더라도 이것이 대대로 왜황이 직접 써 여기에 보낸 것임은 나도 알고 있다. 아마 제일 위에 올려놓은 이 종이는 원나라와 고려의 공격으로 불탄 사당을 재건할 때 그 당시의 왜황이 내린 글씨겠지."

양녕이 종이의 정체를 정확하게 맞추자 궁사가 흠칫 놀랐다.

종이에 적힌 적국이란 사당 창건 당시에는 삼한을 뜻했지만 후에는 원나라와 고려로도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더 나아가 원래 역사에서는 나중에 지금 종이 더미 제일 위에 있는, 원나라 격퇴 당시 왜황의 글씨로 현판을 만들어서 사당 입구에 걸어 놓았고, 태평양 전쟁 때는 그 현판 그림을 넣은 우표까지 만들었다. 적국에 미국을 대입하고, 원나라를 막았을 때처럼 태풍 같은 요행으로라도 전쟁에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었겠지만 인쇄한 우표를 전국에 보내기도 전에 패전해 버렸다.

"조금 전에 너희가 굳이 나올 필요가 없어서 안 나와 본 것이라 한 것은 순전히 거짓이었고, 이걸 놓고 제사를 지내느라 안 나온 것이었구나. 이딴 종이 쪼가리를 놓고 제사 지내고 그 잡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우리를 항복시키고 싶었느냐?"

굳은 표정의 궁사를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양녕이 말을 이었다.

"너희가 사당이고 싶어도 하고, 사찰이고 싶어도 하니 내 특별히 둘 다로 여겨 주겠다. 조선에서 괴력난신을 섬기는 사당과 자격 없는 사찰에 어떻게 하는지 보여 주마."

말을 마친 양녕이 뒤돌아서서 장수들을 보았다.

"제장들께서는 혹시 여기 지명이 왜 거기포인지 아시오?"

"모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양녕의 질문에 최윤덕이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삼한을 정벌했다는 그 신공이라는 여왕이 왜국에 돌아와 하치만을 낳고, 그 태반을 광주리에 담아 땅에 묻은 곳이 여기라 하오."

"그래서 광주리 거 자를 써서 거기포였던 것이군요."

"그렇소. 그리고 그 묻은 자리에 표식 삼아 소나무를 심었다 하오. 그 이후로 이 지역 왜인들이 소나무를 신성한 나무로 여기고 많이 심어 여기 소나무숲이 생긴 것이오."

"과연, 해안에 뜬금없는 소나무숲이 있던 이유가 그것이었군요. 그런데 갑자기 그것은 왜 알려 주시는 겝니까?"

"이제 조선 땅이 되었는데 괴력난신, 그것도 왜황에게서 비롯된 이름을 그대로 쓸 수는 없지 않겠소? 그래서 생각해 본 것인데, 여기에 기병여단이 상륙해서 어제의 승리를 이끌었으니 말 마 자를 써서 마기포라 이름하여 기념하는 것은 어떨까 하오."

양녕의 말을 듣던 기병여단장 우박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모자란 장수가 한 것을 기념해 지명으로 길이 남게 해 주신다 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나 대군께서 저의 공적을 인정해 주심은 기쁘지만 저에게는 과분한 호사입니다. 차라리 해안에 소나무가 많으니 송기포라 함은 어떻겠습니까?"

"소나무가 이제는 많지 않을 것이니 그 이름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오."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보는 장수들에게 양녕이 사당을 둘러싼 소나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는 석성진에 가까운 해안인데도 소나무가 많고 해안을 가려 시야를 막고 있소. 기병여단이 상륙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기는 하나, 우리가 석성진을 점령한 지금은 위험요소일 뿐이오. 마침 석성진에 새 건물도 지어야 하고, 비혜강 물길도 새로 내야 하고, 외성 목책도 쌓아야 하오. 게다가 밥 지을 연료는 물론이고 겨울이 오니 땔감도 필요하지. 이 숲이 석성진에서 가까우면서도 큰 소나무가 많으니 아낌없이 베어서 쓰면 될 것이오."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사당 입구 옆에 있는, 울타리로 둘러싸인 노송 한그루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첫 번째는 저 나무가 될 것이오."

양녕의 말을 들은 궁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을 병사가 찍어 눌러서 다시 꿇어 앉혔다. 강제로 앉혀지고서도 뭐라 소리 지르고 발버둥을 치던 궁사는 쓰고 있던 검은 관모가 떨어질 정도로 머리통을 세게 맞고서야 얌전해졌다.

"저 소나무가 무엇이길래 따로 심겨 있고, 또 저자가 저리 반응하는 것입니까?"

최윤덕의 질문에 양녕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하치만의 태반 광주리를 묻고 표식으로 심었다는 바로 그 소나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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