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32화
32화
"그리 놀랄 것 없소. 이유가 있어서 담장을 헐어내는 것이지, 두 절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아니오."
"그, 그렇습니까. 혹시 어떤 이유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양녕의 말에 료게가 다시 웃는 얼굴을 하려 애쓰며 말했다.
"지금 조선과 큐슈를 잇는 항로가 필요한데, 아직 화재의 여파가 다 수습되지 않아 시가지의 항구시설을 쓸 수가 없소. 급한 대로 큰 배는 레이센만(냉천만)에 임시 부두를 만들어 쓸 계획이지만 작은 배를 댈 시설까지 거기 만들기는 어렵소. 마침 히에카와(비혜강)가 죠텐지 남쪽을 지나가니 강 양쪽에 접안시설을 만들고, 죠텐지 남쪽 담장을 헐고 접안시설로 이어지는 계단을 만들 것이오."
"나루터로 쓰신다는 말씀이셨군요."
"그렇소. 강 남쪽, 정동군 진영이 있는 쪽은 어차피 평지니 아무 데나 싣고 내려도 상관없지만, 시가지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물자는 쌓아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경내를 쓰려고 하오. 넓기도 하고, 담장으로 시가지와 구분도 되어있고, 화재 여파를 수습할 필요도 없으니 최적이지. 그래서 기왕에 좀 더 넓게 쓰고자 두 절의 담장을 터서 쓰려는 것이오. 나중에 시가지 항구를 쓸 수 있게 되면 다시 담을 쌓아도 좋소."
무엇이건 한 번 쓰임이 생겨 버리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료게도 알고 있기에 크게 기쁜 말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한쪽 담장이 전부 헐리고 나루터가 되는 최일선은 이웃 사찰인 죠텐지였기에 그나마 나은 처지인 것을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대군. 다른 하실 것은 더 없으십니까?"
"지금은 딱히 없소. 그리고 여기 이 승려가 정동군의 도군승이오. 앞으로 정동군이 점령한 지역에 있는 사찰들은 모두 도군승이 관할 할 것이니, 앞으로는 지시를 내리고 보고를 올리는 것 모두 도군승을 거치면 될 것이오."
"삼한의 고승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료게라 합니다."
"나야말로 영광이오. 석휴라 하오."
점령 지역 사찰을 모두 관할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방금 처음 들어 얼떨떨해하면서도, 석휴는 료게와 마주 합장하며 인사했다.
"그럼 기왕 이렇게 왔으니 경내를 좀 안내해 주시겠소? 어디가 어느 건물인지 알아야 우리도 병사들에게 기도하러 가거나 나루터로 쓸 때 어디부터는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 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오."
"아, 네. 알겠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가까운 대웅전부터 보시겠습니까?"
"건물 안까지는 안 보아도 괜찮소. 시간도 없을뿐더러, 갑옷 입고 칼까지 차고 불전에 들어가는 것도 좀 그래서 말이오. 내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다시 오면 그때 자세히 안내해 주시고, 오늘은 가볍게 돌아보기만 하겠소."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한 바퀴 돌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료게가 앞서서 걸어 나가고, 양녕과 장수들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우선 이 큰 건물이 대웅전입니다. 석가세존, 아미타불, 미륵불 세 분의 장육존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저쪽에 있는 것이 종루입니다."
"고려 시절 양식으로 만들어진 종이군."
걸어가며 설명을 듣다 종을 보고 툭 던진 양녕의 한마디에 료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군, 저것은 결코 악업이 쌓일 만한 짓으로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번 상인들이 절간에 종을 시주하려고 해도 이곳 장인들은 칼과 갑옷은 몰라도 종을 만드는 기술은……."
"알고 있소."
엷은 미소를 지은 양녕이 당황한 료게의 말을 끊고 말했다.
"상왕 전하께서 상왕으로 물러나시기 한참 전부터 조선에 예물을 바치며 범종을 구하러 오는 왜인들이 많았소. 그럴 때면 버려진 절에서 녹슬어 갈 운명이던 작고 큰 종들을 하사해 주시곤 하셨지. 어쩌면 녹여져서 동전이나 화포가 되었을 수도 있던 종들이 여기서라도 종소리를 내고 있으니 좋은 일이오."
"네, 맞습니다. 그렇지요. 허허허. 조선국 상왕 전하의 공덕이 실로 크십니다."
"그리고 역시 스님께서는 소식을 들으셨구려."
양녕의 말에 웃으며 대답하던 료게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표정이 어두우신 것을 보니 조선이 큐슈를 칠 것이라는 소식 말고도 대마도에서 해적들과 마을, 특히 사당에 어떤 벌을 내렸는지도 들으신 것 같소."
료게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하긴. 조선에 와 있던 왜인들은 상인과 사신 가릴 것 없이 다 억류했다고는 하지만 명나라 상인들까지 어찌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들을 통해 교역항인 여기로 소식이 넘어오는 것도 당연하오. 군사를 움직이는 일이라 기밀 단속을 철저히 했으니 그들이 전달한 소식이라고 해봐야 일부분이겠지만 말이오."
흔들리는 료게의 눈빛을 본 양녕이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여기는 해적 대신 수행자들이 있고, 괴력난신이 아니라 석가여래가 계신 곳이 아니오이까. 스님께서는 소문, 그것도 뜬소문에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오. 자, 시간이 촉박하니 마저 안내해 주시겠소?"
당신이 들은 소식은 모두 사실이다. 대마도를 완전히 빈 섬으로 만들었던 것은 해적의 소굴이었기 때문이고, 사당을 모조리 없애 버린 것은 허황되게도 삼한을 정벌했다는 진구황후와 그 아들인 하치만을 모신 곳이어서 그렇다. 이 사찰은 해당이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대신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이니 더 퍼지게 하지 말라.
소문이라는 단어를 굳이 강조한 양녕의 그런 의도를 눈치챈 료게가 다시 걸어가며 안내를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옆에 있는 것이 좌선당입니다. 앞에 보이는 두 건물은 각각 주지인 제가 거주하는 방장과 다른 승려들이 지내는 고리입니다. 중요한 건물들은 이것이 다입니다."
"저 큰 건물은 무엇이오?"
양녕이 가리킨 곳에는 작은 창문을 제외하고는 모든 벽에 흰 회칠이 된 건물이 있었다.
"저 흰 건물은 그냥 창고입니다."
"안을 좀 보겠소."
료게가 뭐라 하기도 전에 양녕이 성큼성큼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료게는 물론이고 석휴와 장수들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면서도 양녕을 따라 창고 앞으로 가고, 승려 하나가 허겁지겁 뛰어가 열쇠를 가져와 창고 문을 열 때까지도 양녕은 말이 없었다.
이윽고 창고 문이 열리고 오후의 햇빛이 창고 안을 비췄다.
"그냥 절에서 쓰는 물건들을 넣어놓은 창고는 아닌 것 같군."
창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양녕이 말했다. 그 말대로 창고 안에서는 오래 묵은 먼지 냄새가 아닌 전혀 다른 냄새가 나고 있었다.
"매운 냄새, 단 냄새, 꽃향기 비슷한 냄새도 나긴 하지만 이 역한 냄새는 그거로군."
눈빛이 달라진 양녕이 창고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안에 있는 상자들을 하나씩 열어 보기 시작했다. 뚜껑을 열고 후추가 보이자 다시 닫고, 육계가 나온 상자도 닫고, 구리 덩어리가 나온 상자와 백단목이 나온 상자도 닫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상자 뚜껑을 열자, 그 자리에서 가장 둔한 사람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강한 냄새를 풍기며 상자 가득 노란 덩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뚜껑을 닫지 않고 옆에 내려놓은 양녕이 다른 이들이 볼 수 있게 비켜섰다.
"이것은 유황이 아닙니까."
뜻밖의 물건에 장수들 모두 아무 말도 없는 가운데, 석휴가 말했다.
"그렇소. 아무래도 사찰 소유의 교역품들을 보관하는 창고였던 모양이군. 맞소?"
"예. 맞습니다."
양녕의 눈치를 보며 료게가 대답했다.
"창고를 보니까 할 일이 생겼소. 정확히는 요청할 일이지. 우선 이 절 산문에 걸려 있던 현판을 떼어 이 창고에 보관하시오."
"그것은……."
료게가 머뭇거린다. 산문 앞에 걸려있는 것은 쇼후쿠지가 세워질 때 일본 최초의 선종 사찰임을 기념해 창건 당시의 미카도(왜황)가 하사한 '부상최초선굴'이라 적힌 현판이었다. 벌써 200년이 되어 가는 물건일 뿐만 아니라 쇼후쿠지의 정통성과 자부심과도 직결되는 물건이었다.
"다음으로 이 창고에 있는 것들을 우리가 사겠소. 향신료나 목재는 말고, 창고에 있는 유황 전체와 구리 전체만 있으면 되오. 대신 값은 나중에 치르겠소."
양녕은 료게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다음 요청을 했다. 말만 요청이지 사실상 통보나 지시에 가까웠다. 그 내용이 내용인지라 료게가 머뭇거리면서도 입을 열었다.
"저, 그것은 조금 저희도……."
"시간도 없고, 더 돌려 말하기도 번거롭고, 주지 스님께서도 대강 상황을 아시는 것 같으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이번에 조선에서 정동군을 보낸 것은 큐슈 전체를 정복해 조선의 영토로 삼기 위함이오. 이는 명나라의 황제께서도 윤허하신 일이니 명분은 완벽하고, 우리는 우리가 질 것이라는 걱정은 조금도 하고 있지 않소. 조선 땅이 될 곳의 사찰이니 일본 최초의 선종 사찰이라는 현판을 걸어 두어 무엇하겠소?"
거침없이 직설적으로 말하는 그 내용에 료게 주변에 서 있던 승려 몇이 허억 하고 숨을 들이켰다.
"또 요즘 날이 슬슬 추워져 냉증을 앓는 병사들이 있어 걱정했었는데, 마침 이곳에 와 보니 유황이 있어 약으로 쓰고자 한 것이고, 싸우다 뼈를 다치는 병사가 있을 수 있으니 약으로 쓸 구리도 미리 비축하고자 한 것이오."
일본에 화약 제조와 화포 제작에 대한 지식이 넘어가지 않게 다른 이유를 대가며 말했다.
"물론 이것은 우리 입장이오. 사찰 입장에서는 걱정이 되는 것도 알고 있소. 점령자가 다른 일본 영주도 아니고 외국에서 온 군대인데 지시에 따르고 물건을 팔았다가 나중에 혹시라도 일본이 이겨 버리면 역적 취급을 받지 않겠소? 그래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오. 현판은 떼어 창고에 두고 유황과 구릿값도 나중에 받기로 한다면, 혹시라도 일본이 이기고 추궁받을 때 현판은 조선군을 피해 숨긴 것이고 유황과 구리도 빼앗긴 것이지 돈을 받고 판 것이 아니라고 하면 되지 않겠소?"
설득인지 위협인지 모를 말이 이어지자 쇼후쿠지 승려들이 흘끔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또 큐슈를 정복하고 통치하는 과정에서 사찰들의 도움을 받을 것이오. 일본 땅에서 학문하는 선비는 찾아볼 수가 없고, 사당들은 하나같이 괴력난신을 섬길 뿐만 아니라 왜황의 조상들을 모시고 있으니 도저히 상종할 수 없소. 호족과 무사들은 거칠고 학식이 없어 통치에 어울리지 않는 데다 우리를 적대하니, 오로지 백제로부터 이어진 불도의 법통을 간직한 승려들만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이들이오. 그것이 우리 정동군에 도군승이라는 직책이 있는 이유요. 이제 좀 아시겠소?"
양녕의 말을 다 들은 료게가 손목에 찬 염주를 한참 만지작거리며 생각하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다만 현판을 떼는 데에 머뭇거린 것은 높은 곳에 올라갔다 다치는 이가 나올까 우려했던 것이지 대군의 승리를 의심한 것이 아니고, 유황과 구리를 파는 데에 망설인 것은 이곳 주민들 중에도 아프고 다친 이가 생겼을 때 약재가 모자랄까 우려했던 것이지 그것들을 아까워해서가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알고 있소. 내 어찌 스님을 의심하겠소? 현판은 조심해서 천천히 떼시고, 유황과 구리는 약재로 필요할 때 우리 군에 승려를 보내시면 드리겠소."
결국 굴하면서도 최대한 상황을 좋게 만들려는 료게의 변명에 양녕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양쪽 다 빈말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서로 타협을 봤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 정동군 관할이 되었으니 사찰 이름을 읽는 것도 조선식으로 성복사라 하고, 주지 스님의 법명도 조선식으로 읽어 양예라 하도록 하시오. 다른 스님들도 마찬가지요.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끌었구려. 난 이만 가 보겠소. 유황과 구리는 나중에 병사들을 보내 가져가도록 하겠소."
"알겠습니다, 대군. 살펴 가십시오. 다음에 시간 날 때 오시면 건물 안까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그럼 다음에 뵙겠소."
다시 애써 웃는 얼굴을 한 양예의 인사를 받으며 성복사 밖으로 나온 양녕이 석휴에게 말했다.
"지금 내가 한 것처럼 하는 것이 스님께서 정동군 도군승으로 하실 가장 중요한 일이오. 사찰을 포섭하고, 우리가 시설을 쓸 수 있게 하고, 필요한 물자를 가져다 쓰고, 조선의 사찰이 되게 만드시오. 포섭되려 하지 않거나 다른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나에게 물으시오."
"불제자에게 어찌 사찰의 역사를 지우고 승려를 굴복시키라 하십니까."
석휴가 힘없이 말했다.
"내가 승록사에서 각 종파 판사들을 모아놓고 했던 말을 전해 들으셨던 것 아니었소? 전조 고려의 승려들은 몽골과 싸우면서 활을 쏘아 적장을 죽이기도 했소. 말로 사찰을 포섭하는 것이 그것보다 불제자에게 문제될 것 있소? 젊은 승려들이 흘릴 피를 도군승의 말 몇 마디로 대신할 수 있는 일이니 기쁘게 생각하시구려."
석휴가 기억하던 옛날 모습과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양녕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