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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30화 (30/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30화

30화

1419년 10월 초순 모일 오전.

석성진(구 패가대). 정동군 진영.

"어제 오후에 전투하고 오늘 아침이 되었을 뿐인데 벌써 수거가 다 끝났소?"

양녕은 정동군 진영 한쪽에 수북하게 쌓인 전리품들을 보며 말했다.

"정동군 병력이 많다 보니 한 명이 하나씩만 수거한다 쳐도 금방입니다. 적들의 시체들도 다 처리할 여력은 없지만 일단 강물이 오염되지 않게 나가강 근처에서는 치워 뒀습니다."

어제 양녕의 지시대로 전리품을 거두어 놓은 최윤덕이 대답했다.

"시체 처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소. 일단 전리품 처리부터 논합시다."

양녕은 어제의 격전지였던 나가강 상류 쪽으로 새까맣게 떼를 지어 날아가는 까마귀들을 흘끗 보고는 첫 전리품 더미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깃대에서 풀어 낸 깃발들이 쌓여 있었다.

"깃발들도 전리품으로 챙기라고 하셔서 전부 거둬오기는 했으나, 조선에서 쓰는 군용 깃발들과 생김이 달라 무슨 깃발들인지 알 수가 없어서 포로들을 데려다 물어보았습니다. 군용 깃발이 아니라 쇼니와 시부카와 가문과 거기 속한 가신들, 혹은 호족들 가문의 상징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아직도 호족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전쟁이 나면 각자 사병들로 부대를 꾸려 출전하오. 그러니 결국 호족 가문 깃발이 곧 각 부대의 깃발이자 장수의 깃발이 되는 것이오. 잡졸들의 목만 베어서는 얻을 수 없고 반드시 적장이나 적 부대를 확실하게 무너뜨려야만 얻을 수 있고, 적장의 목을 치지 않고 살려두면서도 승리의 증표로 삼을 수 있는 물건이지."

"과연. 수급 대신 공적을 증명할 목적으로 가져오라 하신 것이로군요. 수급으로 공적을 따지는 폐해가 없으면서도 얼마나 전투에 기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적 목을 하나하나 자르는 것보다 깃발을 거두는 게 시간도 짧고요."

"그렇소. 일단 앞으로는 이렇게 깃발을 공적의 기준으로 삼고, 문제점이 나오면 조금씩 고쳐 갈까 하오."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 있는 깃발들은 설명을 덧붙여서 조정에 보내겠습니다."

"내가 어제 얻은 쇼니 가문의 비단 깃발도 같이 보내도록 하시오."

"솜으로 누벼서 깔개로 쓰시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전날 있던 일을 들어 알고 있던 최윤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장의 장수에게 비단 깔개가 무슨 쓸모가 있겠소. 그건 그저 쇼니 미츠사다에게 굴욕을 주어 놈의 기세를 꺾으려던 것이었소. 그 깃발은 내 의자가 아니라 종묘의 태조대왕 신위 앞에 바치는 것이 옳을 것이오. 그리고 비단 중에서도 적장의 비단옷은 깨끗이 세탁하고 말린 다음 그 실을 풀어내어 부상병들 상처를 꿰매는 데에 쓰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갑옷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멀쩡한 것하고 깨지고 상한 것은 나눠 두었습니다."

양녕의 대답에 은근히 감동받은 얼굴로 최윤덕이 물었다.

"멀쩡한 갑옷이라고 해도 입어 봤자 아군에게 적으로 오인만 받을 뿐이오. 조정에 전리품으로 보내는 것이 맞을 것이오."

"나머지는 어떻게 할까요?"

"우리 화기에는 약하긴 했으나, 적어도 왜인들끼리 싸울 때 쓰는 무기들은 막을 수 있으니 저들도 입고서 싸웠을 것이오. 우리가 잘만 쓴다면 저들의 무기를 막는 데에 쓸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말하며 깨진 갑옷 더미에서 갑옷 몸통 부분 하나를 들어 올렸다. 조총 탄환에 제대로 맞았는지 가운데 부분에 구멍이 나 있었고, 구멍 주변의 갑옷 조각들은 끈이 풀려 너덜거리고 있었다.

"왜인들 갑옷은 작은 쇠나 가죽 조각을 엮어서 판을 만들고, 그 판을 이어서 갑옷을 만드니, 엮고 잇는 데 쓴 끈만 적당히 자르면 작은 판이나 조각으로 다시 나눌 수 있소. 그걸 아군 사슬갑옷에 덧대어 경번갑으로 만들거나, 아예 다른 옷 안에 붙여 두정갑처럼 만들 수 있을 것이오."

"좋은 생각입니다. 지금 동정군에 따라온 대장장이가 많지 않으니 시간은 조금 걸리겠군요."

"굳이 대장간에 바로 맡길 것 없이, 병사들에게 적당히 나누어 주면서 주는 이유만 알려 주시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장에서 살아남는 지혜와 노력은 병사들이 제일이니, 알아서들 갑옷을 보강할 것이오. 어쩌면 우리도 생각하지 못한 활용법을 떠올릴 수도 있고."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직접 하다가 어려운 부분에서는 대장장이를 찾아가라고 하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마지막은 무기들이로군."

양녕이 갑옷을 다시 내려놓고 종류별로 쌓아 놓은 무기 더미 앞으로 가서 섰다.

"우선 활은 멀쩡하지 않은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버리시오. 멀쩡한 것도 성능이 조선군 활에 미치지 못하고 쏘는 법도 다 다르니 그냥 전리품으로 조정에 보내시오. 화살만 길이를 맞춰서 우리가 쓰면 될 것이오."

"그러면 멀쩡하지 않은 활은 땔감으로 쓰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시오. 다음으로 창이나 장병기들은 우리도 바로 쓸 수 있으니 멀쩡한 것들은 필요한 부대에 바로 나눠 주고, 날 부분이 망가진 것과 봉 부분이 부러진 것은 서로 성한 부분을 합쳐 수리한 다음 나눠 주시오. 남은 망가진 날은 사슬로 만들고 부러진 봉은 부러진 부분을 다듬은 다음 합쳐 편곤으로 만들어서 쓰면 될 것 같소."

"알겠습니다."

"다음은 도검이로군."

양녕은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왜도 하나를 손에 쥐어 보았다.

"왜도가 좋은 칼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잡아도 명검이 되는 것은 아니오. 일본 땅은 좋은 철이 나지 않아 날을 얇고 길게 만들기 어려우니 짧고 두껍게 만들어졌소. 그 탓에 무거워서 자루를 두 손으로 잡고 다루고, 짧은 데다 두 손으로 잡아서 칼이 멀리 닿지 않으니 과감히 적진으로 뛰어들어 달라붙어 싸우는 것이오. 저들은 자신들의 칼로 그렇게 싸우는 것에 익숙하니 저들이 왜도를 다루면 명검으로 여겨지는 것이오. 반대로 우리는 화포와 궁시가 주 무기라 병사들이 검술 자체에 별로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그나마 쓰는 도검인 환도도 무게와 길이가 한 손으로 다루기 좋게 맞춰진 것이라 여기에 익숙한 병사들은 왜도로 제 성능을 내기 어렵소."

"그럼 어떻게 할까요?"

"멀쩡한 것 중에서 환도에 가까운 것, 혹은 가깝게 개수할 수 있는 것은 비축했다가 환도가 필요한 군관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조정에 보내시오. 휘어져서 안 펴지거나 아예 부러진 것들은 적당히 자르고 갈아 짧은 칼로 만들어 포수들에게 주시오. 적이 가까이 붙었을 때 뽑아들 수 있는 무기가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하고 집중해서 싸울 수 있을 것이오. 정말로 못 쓰게 망가진 것은 아예 다른 철물로 만들어서 쓰면 될 것이고."

"알겠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나머지 잡다한 것들 중에서 구리로 된 것은 조정에 보내고, 철로 된 것은 여기서 쓰면 될 것이외다. 그리고 조정에 보낼 때 이것도 같이 좀 보내주시겠소? 어제 쓴 것이오."

"조정에 보내시는 겁니까?"

양녕이 건넨 편지봉투를 받은 최윤덕이 물었다.

"정확히는 주상께 보내는 것이오. 이번에 보내는 갑주와 왜도 중에 아바마마와 주상께서 필요 없으신 것은 소유와 처분 권한을 나에게 주셨으면 한다는 내용이오. 자세한 것은 다 편지에 적혀 있으니 전달만 해 주시면 되오."

"조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최윤덕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양녕은 종친 중에서도 대군일 뿐만 아니라 폐세자이기까지 하다. 아무리 오 태백으로 여겨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무기와 갑주를, 그것도 튼튼하고 강하다 알려진 왜도와 왜갑옷을 많이 가지고 있겠다 하면 꼬투리 잡히기에는 충분했다.

"그런 것은 아니오. 나중에 내가 쓰려는 곳이 있으니, 보관은 궁에 하지만 쉽게 처분하지 마시고 내가 필요할 때 얘기하고 꺼내어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오. 내가 설명을 오해할 만하게 했구만. 걱정해 줘서 고맙소."

"그런 것이라면 다행입니다. 그럼 전리품 처리가 끝나면 보고드리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난 이만 가 보겠소."

최윤덕과 헤어진 양녕은 쉴 틈도 없이 지휘소로 향했다.

* * *

잠시 후.

정동군 임시 지휘소.

양녕은 지휘소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이종무와 이지실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일단 어제 있던 전투의 흐름과 결과에다가 석성진을 새로 설치한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조정에 올릴 장계는 다 완성되었습니다. 확인하시고 수결을 해 주시면 바로 조정에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럼 어디."

쭉 읽어 내려가며 고개를 끄덕이던 양녕이 문서 맨 끝에 직함과 이름을 적고 초서체로 홍빈이라 수결해 이종무에게 건네며 물었다.

"수고 많으셨소. 시부카와와 쇼니 가문 무사들을 문초한 것은 성과가 있었소?"

"시부카와 가문이 비전(히젠) 서쪽 도서 지역의 마츠라 가문 해적들은 아예 통제를 못 했다고 합니다. 비전 동쪽만 가지고 근거지인 패가대의 무역 수입과 그 근처 농경지를 기반으로 병력을 유지했는데, 그마저도 어제 전투로 잃었으니 시부카와 가문은 더는 병력이 못 나올 것이라 합니다. 지배한 지역이 워낙 좁은 데다 기간도 짧았던 탓에 이것 말고 쓸 만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오. 그나마 근거지는 좀 잘 알 테니 우리가 패가대를 수습하고 석성진을 설치하는 데에는 쓸 수 있을 것이오. 쇼니 가문에서는 어떤 것을 알아내었소?"

이번 질문에는 이지실이 대답했다.

"쇼니 가문도 말만 축전(치쿠젠)의 태수였습니다. 패가대를 포함한 서쪽은 시부카와에, 북쪽은 오우치 가문에 뺏겼고, 남쪽은 인접한 축후(치쿠고)와 풍후(분고) 지방을 모두 장악한 오토모 가문에 점차로 밀려서 근거지인 다자이후 지역 말고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합니다. 그마저도 이번에 유능한 무사들과 정예병들이 쓸려 나갔으니, 동원 가능한 병력을 다 긁어모아도 제대로 싸우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양녕은 끄덕거리며 듣고 있었다.

사실 다들 이상하게 여길 테니 작전에만 은근히 반영하고 말하지는 않았던 내용이지만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이렇게 사방에서 밀린 끝에 미츠사다와 장남은 전사하고, 남은 아들들은 대마도로 도망쳐 간신히 살아남았다. 손자 대에 다시 전성기의 영토를 확보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금방 쇠락해 버린 끝에 미츠사다의 고손자 대에 이르러 쇼니 가문은 멸망해 버렸다.

"악업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남겨지는 법이니, 오래 가지 않아 멸망했을 가문이오. 우리가 직접 옛 원한을 갚아서 앞당겨졌을 뿐이지. 혹시 광산 같은 것은 알아낸 것이 있소?"

주역의 구절을 인용해 대답을 대신한 양녕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안 그래도 어제 전투로 화약을 많이 쓴 것을 보충하고자 유황 광산이 있는지부터 문초했습니다. 구주도 중앙에 있는 화산인 아소산 근처에는 풍부하다고 하지만 여기 근처에는 유황 광산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 말고 광산에 대해 알아낸 것은 아군 점령지역에서 동쪽으로 더 간 곳에 있는 몇몇 고을에서 석탄이 난다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별 소득이 없던 탓인지 이지실은 조금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아주 대단한 성과요. 앞으로 동쪽으로 진출했을 때 활용할 수 있게 어느 고을에서 났는지 추가로 문초해 정리해 주시오."

"네,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양녕이 정반대로 기쁜 얼굴을 하고 말하자 오히려 이지실이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해 버렸다.

같은 소식에 대한 이지실과 양녕의 반응 차이는 석탄의 쓰임을 단순한 연료로만 아는가, 그 이상의 용도를 아는가에서도 나온 것이지만, 양녕에겐 뒤늦게 다른 기억이 떠올라 더욱 기쁠 수밖에 없었다.

치쿠호(축풍) 탄전.

원래 역사에서 훗날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될 석탄 매장지대이다.

이름의 유래답게 치쿠젠(축전)과 부젠(풍전)의 두 지역에 걸쳐 있을 만큼 면적이 방대하며 그에 걸맞게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한때 일본 전체 석탄 공급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매장량도 엄청났다. 게다가 15세기에 발견된 뒤 곧장 농가의 연료로 쓰일 만큼 근대기술 없이도 채굴이 쉬웠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곳에 매장된 석탄이 한반도에서 나는 무연탄이 아니라, 코크스의 재료가 되는 역청탄이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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