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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9화 (29/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29화

29화

자신의 조부를 죽인 것이 이성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 미츠사다가 수치심과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양녕을 노려보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내뱉었다.

"흥. 주군을 배신하고 왕위를 찬탈한 놈이니 그 집안과 나라 꼴을 알 만하구나."

분노한 양녕에게 얼굴을 걷어차이는 것을 각오하고 한 말이었지만, 양녕은 오히려 크게 껄껄 웃고서는 말하기 시작했다.

"나를 열 받게 하려고 갖은 궁리를 다 하는 꼴이 참으로 재밌구나. 망해 가는 남조에 충성한답시고 해적질을 하던 너희에게 그 말을 듣고 웃지 않을 이가 있을 것 같으냐? 싸움에 이기는 재주는 없어도 남을 웃기는 재주는 있으니 무사가 아니라 광대를 하지 그랬느냐?"

양녕의 표정이 다시 싸늘해졌다.

"너희 남조는 그나마 정통성이라도 있지만 고려는 아니었다. 공 있는 신하를 팽하는 임금, 그런 임금을 휘두르는 요승, 권력을 나라가 아니라 탐욕을 위해 쓴 권신들 탓에 백성만이 괴로워하고 있었지. 하지만 그런 기울어져 가는 나라라도 붙잡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다. 태조대왕께서 조선을 세우시면서 더러는 죽고 더러는 낙향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들은 도적질은 하지 않았다. 왜인지 아느냐? 그들은 적어도 자기가 죽을 상황일지라도 무고한 이의 피눈물로 목을 축이는 순간 그 어떤 정통성과 명분일지라도 위선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왜 웃었는지 알겠냐, 해적 놈아?"

양녕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은 미츠사다의 얼굴이 구겨졌다.

"해적질까지 해서 충성한 것이 아까웠는지 너희는 아직도 남조를 붙잡고 있지. 그래서 그런지 망해 가는 꼴조차 그때와 똑같구나. 태조대왕께서 아기발도를 토벌한 것을 손자인 나와 네가 되풀이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기발도를 쏘아 죽인 그 전투가 있기 전, 너희 함대를 모조리 고기밥으로 만들어 퇴로를 끊은 대포를 만든 이의 아들이 오늘 우리가 쓴 이 화포들을 만들었다. 인과응보라는 것이 참으로 오묘하지 않느냐?"

쏘아붙이듯 말한 양녕이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넌 아직 주둥이에 화살이 박히지는 않았으니 내 마지막 기회를 주마. 순순히 복종해서 조선이 큐슈를 정복하고 통치하는 것을 도울 생각은 없느냐? 생각해 보면 너희가 그리 원수로 여기던 고려를 해치워 준 은인이 우리 집안이지 않느냐."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죽여라. 죽여서 내 목이라도 너희 할애비의 무덤에 바쳐라."

양녕의 조롱에도 더 이상 반박할 여지가 남지 않았는지 미츠사다가 체념한 듯 말했다.

"제례에 쓰이는 짐승은 조심스럽게 키운 것 중에서도 흠 없는 것만 골라서 올리는 법인데, 어찌 더러운 해적의 머리를 올릴 수 있겠느냐. 다음 생에 돼지나 소로 태어나거든 그때 시도하거라."

발끝으로 미츠사다의 코를 툭툭 차며 비웃은 양녕이 계속 말했다.

"애초에 널 죽일 생각은 없다. 찢어 죽인다고 해도 네가 협력하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넌 협력하게 될 게다."

"대체…… 무슨 소리지?"

얼핏 모순되는 양녕의 말에 불길함을 느끼고 되물었다.

"붙잡힌 너희 가문원이나 가신들, 병사들을 문초하면 우리가 정복하고 통치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은 충분히 얻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식은 네가 알고 있을 만한 것이라면 전부 네가 실토한 것이 되고, 아니라면 너희 가문원이 실토한 것이 되어 조정에 보고될 것이다. 넌 큐슈 정복 최고의 협력자가 되겠지."

"도대체 왜! 무슨 억하심정이 있길래 그렇게까지 하느냐!"

죽음을 각오하고 체념했던 미츠사다였지만 쇼니 가문의 명예를 완전히 박살 내겠다는 양녕의 말을 듣고는 발버둥 치며 절규하듯 외쳤다.

"복수심이 들어가지 않았다고는 못하겠지만 복수가 아닌 필요에 따라서 하는 일이다. 너희는 태풍 덕분에 구사일생했다고는 하지만 고려의 공격을 막아 낸 적이 있고, 해적 짓이기는 하나 고려 땅을 유린한 적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너희 가문은 이미 방어의 상징이자 공격의 상징인데, 여기서 네가 장렬하거나 비참하게 죽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큐슈, 더 나아가서 일본이 조선에 저항하는 상징이 되고, 저항의 구심점이 되겠지. 따라서 조선이 큐슈를 완전히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서 너희는 가장 추하고 더럽게 역사 저편으로 사라져야 한다."

미츠사다의 발버둥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한 양녕이 손짓하자 옆에 있던 병사가 깃발 하나를 가져왔다. 미츠사다가 대장기로 쓰던, 쇼니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비단 깃발이었다.

병사가 깃대에서 풀어 건넨 비단 깃발을 받아 살펴본 양녕이 흡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은 비단으로 만들고 쪽물들인 명주실로 수를 놓은 호화로운 깃발이로구나. 나중에 누벼서 의자 깔개로 써야겠다."

그렇게 말하며 쇼니 가문의 문장이 위로 오게 의자에 깔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분노로 가득 찬 미츠사다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을 이었다.

"조선 조정에 보고할 뿐만 아니라 일본 조정에도 네가 우리에게 협력했다고 증거를 갖추어 보낼 생각이다. 그러면 너희는 일본에서는 남조를 명분 삼아 중앙에 반기를 들던 역적이 되고, 조선에서는 결국 충심도 독기도 없는 변절자 해적이 되고, 큐슈에서는 적에게 빌붙어 땅을 넘긴 줏대 없는 놈이 되겠지. 그래도 너는 천수를 누리다 죽을 수 있을 테니 고맙게 여기거라."

"내가 죽어도 아직 쇼니 가문이 멸망한 것은 아니다. 우리 가문이 다시 일어서면 네 뒤에 펄럭이는 그 잘난 검은 깃발을 발닦개로 쓸 이가 후대에라도 반드시 나올 것이야."

그 말에 양녕은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앞으로 기울여 얼굴을 내밀고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네놈이 배신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너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북조 조정에서 너의 슈고 자리를 유지해 줄 것 같으냐? 슈고 자리가 다른 이에게 넘어가고 나면, 대대로 너희를 고깝게 여기던 다른 호족 가문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으냐?"

양녕의 지적에 미츠사다의 얼굴에서 마지막 남은 저항 의지마저 사라지고 절망과 좌절만이 남았다.

"끌고 가 가두고 감시해라. 자해하지도 탈출하지도 못하게 잘 막아라. 혹시라도 계속 저항한다면 손발의 힘줄 정도는 끊어 버려도 좋다."

"예, 대군."

아예 넋을 놓아 버린 미츠사다를 병사들이 끌고 가는 것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양녕이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크게 켰다.

"자, 그럼 회의하러 가봅시다."

개운한 표정을 지은 양녕이 의자에 깔려있던 깃발을 집어 들고 지휘소 천막 안으로 휙 들어갔다. 남겨진 이종무와 이지실도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뒤따라 들어갔다.

* * *

"식빈도하고 패가대는 잘 진압되었소?"

"진압이라고 할 것도 없이, 제가 군사들을 이끌고 갔을 때는 이미 병사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저희가 온다고 해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불이 번졌을 때 이미 다 달아난 듯합니다."

"전투가 줄어서 다행이군. 그러면 시가지 상태는 어떻소?"

"잔불은 거의 다 껐습니다. 하지만 기둥이 불타 약해져서 주저앉은 건물도 많고, 옆으로 쓰러져 길을 막은 건물도 많습니다. 기울어져서 지붕의 기와가 모조리 길가에 쏟아진 건물은 물론이고, 이 정도로 불이 났으면 지금은 멀쩡히 서 있는 건물들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고 봐야 해서 한동안 식빈도와 패가대는 제대로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차라리 잿더미가 되는 게 정리하긴 편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이종무의 말을 들은 양녕이 작게 흐음 하고 한숨을 쉬었다. 패가대는 교역의 중심지고 방어에 유리하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기준의 가치일 뿐, 화약무기로 무장한 대규모 정벌군인 정동군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문제는 교역하러 온 배들을 수용하기 위해 패가대 곳곳에 있던 항구시설은 바다를 건너 보급선을 유지해야 하는 정동군에게 필요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활용하기 어려워졌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무사한 곳도 있습니다. 패가대 시가지 동남쪽 끝에 있던 승천사(죠텐지)와 그 북쪽에 붙어 있는 성복사(쇼후쿠지)라는 두 절은 멀쩡합니다."

이지실의 말에 양녕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절이면 부지도 클 테고, 동남쪽 끝이라면 비혜강도 지나가겠구려. 거기를 활용하면 되겠소. 혹여라도 건물이 상하지는 않았소?"

"예. 절 변두리에 심어져 있던 나무가 몇 그루 탄 것만 빼면 전부 멀쩡합니다. 시가지 동남쪽 외곽에 있어서 서쪽과 북쪽에서 시작된 화재에서 멀었다는 점과 담장과 뜰이 있어 밖에서 불타는 건물들과 절 내부 건물들 사이에 거리가 있던 점 덕분인 것 같습니다. 안에 위치한 우물로 상주하던 승려들이 건물에 미리 물을 뿌려 둔 것도 효과가 있었겠지요. 참, 피난한 왜인들도 있습니다. 저희가 시부카와군이 달아난 시점을 물어본 이들이 바로 그 왜인들입니다."

이지실의 말에 양녕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다행이오. 여기 패가대는 장차 구주도를 정복하는 교두보가 될 것이오. 최우선 순위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남는 인력들을 써서 수습하고 거점으로 만들어야 하오. 비혜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배들은 승천사와 성복사를 항구로 쓰고, 큰 배들은 여기 패가대 남쪽 해안에 임시로 부두를 설치해 항구로 쓰면 될 것 같소."

"알겠습니다. 그럼 부두를 설치하고 일기도와 항로를 잇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겠습니다. 패가대 남쪽 해안에는 시부카와군이 방어용으로 설치해둔 석벽과 목책이 있으니 그것들을 헐어 부두 재료로 삼겠습니다."

"좋소. 그럼 일단락되었으니 조정에 보고를 해야겠군. 그 전에 고을 이름을 새로 지어야겠소."

"대마진과 일기진처럼 이전 이름을 그대로 쓰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지실이 양녕의 지시를 종이에 바쁘게 정리하는 것을 보던 이종무가 말했다.

"나도 그 생각은 해 보았소. 헌데 원래 왜인들이 부르던 이름인 박다는 넓고 많다는 뜻이고, 그 왜말의 소리를 옮긴 패가대는 제패한다는 뜻이니 어느 것을 쓰더라도 이 작은 고을 이름으로는 너무 거창한 것 같아서 말이오."

"그렇다고 아예 새로 이름을 짓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옛 이름이나 별칭에서 따오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종무의 제안을 들은 양녕이 잠시 턱에 손을 대고 생각하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공의 말이 맞소. 패가대는 돌로 축대를 쌓은 모습이 꼭 성과 같다 하여 석성이라는 별명이 있소. 나도 대장선에서 보면서 바다 위에 뜬 성과 같다고 느꼈으니 이 이름을 쓰는 게 어울리겠소. 그럼 이제부터 이 고을의 이름은 석성진이오. 아직 수습도 다 되지 않았고 급한 것도 아니니 당분간은 내가 지사를 맡겠소."

"예, 저희가 적극 보좌하겠습니다."

"믿음직스럽군. 고맙소."

양녕은 지쳤다는 듯 이마를 한 번 쓸어 넘기고 다시 말했다.

"오늘은 전투가 많아 나도 공들도 지쳤고 병사들도 다 지쳤을 것이오. 급한 것은 다 끝낸 것 같으니 이만 쉬고 내일 이어서 합시다. 쉬는 동안 경계는 철저히 유지해 주시오. 그리고 여기 석성진 근처 사찰과 사당들에도 병력을 세워서 지키시오."

"사찰과 사당에도 말입니까?"

이지실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소. 사찰과 사당을 외부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감시 목적으로 지키라는 말이었소. 일본의 사찰과 사당들은 영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거나 그 자신들이 영주이기도 하오. 그들이 왜구들을 통해 손에 넣은 약탈품들을 비롯한 재산들을 몰래 빼돌리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군의 상황을 정탐해서 다른 영주들에게 알리는 것을 막으려면 감시가 필요하오. 대신 사찰에는 최대한 정중히 대하고, 사당에는 조금 강압적으로 대해도 좋소."

"그런 말씀이셨군요. 알겠습니다. 밤눈이 밝은 이들로 가려 뽑아 철저히 지키겠습니다."

이지실은 왕실이나 사대부에서 불교에 우호적인 경우는 흔하니 사찰에 정중히 대하는 건 그렇다 쳐도, 유교적으로 생각하면 사당을 박대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잠시 품었지만 굳이 신경 쓸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해 가볍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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