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28화
28화
"그렇다면 살려 보내서 오히려 적들이 아군을 강하게 평가하게 된다는 건 어떤 이유입니까?"
이종무가 두 번째로 궁금하던 것을 양녕에게 물었다.
"적들을 살려서 보낼 정도로 여유가 있다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물론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오. 본디 두려움이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잘 몰라서 생기는 두려움이나 반대로 잘 알아서 생기는 두려움보다도 큰 것이 어설프게 알아서 생기는 두려움이오."
"그렇지요. 차라리 잘 모르면 무모하게 덤벼들 만용이라도 부릴 수 있고, 잘 알면 어떻게 대처라도 할 수 있지만 어설프게 알고 어설프게 모르는 것이 전쟁에서는 실로 독이 됩니다."
이종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적들은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인화살이나 조총, 산탄과 같은 신무기들과 중기병대의 돌격과 같은 전술에 일방적으로 당하고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소. 이제 살아남은 이들이 우리의 무기와 전술에 관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할 때마다 그 부정확함과 공포가 같이 전달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무기와 전술도 과장될 것이오."
"맞는 말씀입니다. 특히 시부카와군 같은 경우에는 겁쟁이나 배신자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선군이 엄청 강하다고 해야 그나마 패배를 정당화할 수 있겠지요. 대군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을 듣고 보니 이제 조금 전에 전달하신 문서의 내용하고도 이어져서 이해가 되는군요."
"그렇다니 다행이오. 오, 거의 다 왔나 보오."
저 앞에 아직도 가늘게나마 연기를 피워 올리는 패가대 시가지가 보였다.
* * *
잠시 후.
패가대 시가지 남쪽. 조선군 진영.
진영에 도착한 양녕은 쉬지도 않고 최윤덕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다음으로 패가대를 포함해서 냉천만 곳곳에 있던 적 잔당들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주전장이었던 나가강 일대에서 일단 군마들과 제 발로 걸을 수 있는 적병들은 모두 끌고 왔습니다. 하지만 갑옷이나 무기, 마구 같은 것을 모두 거둬와 전리품으로 정리하고 적들의 시체를 태워 전염병을 막으려면 병사들이 좀 쉰 다음 움직여야 해서 하루는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잘하셨소. 전리품이나 시체가 달아날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죽은 척했다가 달아나는 적이 생기면 곤란하니 그것만 주의하시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아군 피해입니다. 지금까지 파악된 것으로는 오늘 일어난 모든 전투에서 생긴 경상, 중상, 사망자를 다 합쳐 100명을 넘지 않습니다."
"생각보다도 훨씬 적구려."
"예. 대신 병사들이 상하지 않는 것을 우선하느라 화약과 인화살은 예상보다 좀 많이 썼습니다."
"그건 괜찮소. 어찌 화약과 백린이 병사의 목숨보다 귀하겠소. 그럼 보고는 이상이로군. 난 그럼 지휘소로 가 보겠소."
"예. 그럼 전 다친 병사들을 살펴보러 가겠습니다."
최윤덕의 말에 양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지금 최윤덕을 따라 병사들을 치료하러 간다면 김홍빈으로 살며 익힌 기본적인 의료지식을 활용해 좀 더 많은 병사들을 잘 치료할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전문적인 의료지식은 없어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정동군 도원수인 자신이 그동안 다른 일을 미루면 결과적으로 더 많은 병사들이 다치고 죽을 수 있었다.
"대군?"
"아, 별것 아니오. 병사들을 치료할 때 중요한 것 두 가지를 말해 주고 가려고 생각을 좀 정리하고 있었소."
양녕은 일단 기본적인 의료지식을 최윤덕에게 전해 주고 도원수의 일을 하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것입니까?"
"우선 치료법이오. 다친 부위는 맑은 물로 씻을 것. 붕대는 자주 갈아주고, 재료는 깨끗하게 빨아서 햇볕에 말린 천이 좋지만 없으면 최대한 깨끗한 천을 쓸 것. 뼈나 관절을 다친 자는 부목을 대고 끈으로 단단히 고정하고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게 할 것. 고름을 빼거나 화살촉을 빼는 등 살에 칼을 대야 할 경우 불로 달구었다 식힌 칼을 쓸 것. 크게 벌어진 상처는 불에 달구었다 식힌 바늘과 깨끗한 실로 봉합할 수도 있소. 사실 나도 이것들이 정말로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오."
"맑은 물, 깨끗한 붕대, 부목 고정, 불에 달군 날붙이로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대군께서 보실 수 있게 부상자마다 치료한 내용과 그 경과를 정리하여 두겠습니다."
"고맙소. 그리하면 분명히 조선의 의술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그럼 다음은 환자를 넷으로 나누는 법이오. 먼저 보류 환자요. 다치기는 했지만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인 이들이오. 이들은 뒤에 치료해도 괜찮소. 다음은 주의 환자로, 당장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걷지는 못할 정도인 이들이오. 악화되지 않게 잘 살피고 반드시 치료를 해야 하오. 다음은 긴급 환자요. 이들은 가장 먼저 치료를 받아야 살 수 있는 급한 환자들이니 서둘러야 하오."
양녕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최윤덕도 가만히 있어 잠시 정적이 흐르고, 다시 양녕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은 포기 환자요. 이들은 치료해도 가망이 없으니 다른 이들을 치료하는 것이 낫소. 다만 유언이나 출신지를 들어두어 죽어서라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해주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대한 덜 괴롭도록 도와주는 것이 맞겠지. 이미 죽었거나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같은 부대원들에게라도 고향과 이름을 물어보아 기록해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표정이 어두워진 양녕과 최윤덕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 * *
잠시 후.
정동군 임시 지휘소 앞.
"내가 좀 늦었나 보오."
"아닙니다. 저희도 막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다른 장군들께서는 아직 바쁘신가 보군."
양녕이 임시로 설치된 지휘소 천막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준비가 끝나있었다. 총대장을 상징하는 좌독기가 세워진 아래에 나무 의자가 놓여있고, 그 좌우로 정동군단장 이종무와 우군사단장 이지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포박되어 무릎 꿇려진 사내가 있었다.
양녕은 좌독기 아래의 의자에 앉는 대신 그 사내 앞으로 다가가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대조선국 상왕 전하의 아들이자 주상 전하의 형제인 양녕대군이다. 큐슈를 정벌할 정동군의 총대장인 도원수로 여기에 왔지. 네놈이 치쿠젠(축전)의 슈고이자 쇼니 가문의 가독(당주)인 쇼니 미츠사다가 맞느냐?"
갑옷과 무기를 빼앗기고 무장해제 된 것은 물론이고, 끌려오느라 머리마저 반쯤 풀어진 미츠사다가 가만히 있자 뒤에 서 있던 조선군 병사 하나가 조총 개머리판으로 미츠사다의 등을 툭 쳤다.
"그래. 내가 그 쇼니 미츠사다다."
병사가 반말을 하는 미츠사다의 등을 개머리판으로 내리찍으려는 것을 손짓으로 막은 양녕이 말했다.
"이렇게 끌려와 있는데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내가 너희가 올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수백 척 배를 모으고 수천의 병사들을 모았을 것이다. 그 군사를 지휘해 너희 나라로 건너가 고을을 보이는 대로 태우고 백성을 보이는 대로 죽여 본보기를 보였으면 너희가 감히 이리 오지 못했을 것인데 그러지 못해 아쉽구나."
양녕은 대답 대신 무덤덤한 표정으로 미츠사다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균형을 잃은 미츠사다가 옆으로 쓰러져 흙바닥에 한쪽 얼굴을 처박았다.
"바다를 건너 고을을 태우고 백성을 죽이고 약탈한다라. 40년 전에 네놈의 할애비, 쇼니 요리즈미가 정체를 숨기고 하다가 비명에 죽은 그 짓을 너도 하고 싶은 게로구나."
"그걸 어떻게 알……."
양녕의 말에 놀라서 본심이 튀어나온 미츠사다가 황급하게 말을 멈췄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아니, 슬쩍 떠보았을 뿐인데 어떻게 이리 바로 걸려드느냐? 대가리를 차여 바보가 되었느냐?"
그렇게 말하며 정말로 웃긴 듯 껄껄대고 웃던 양녕이 한순간 웃음을 싹 거두며 짧게 말했다.
"네놈들이었구나. 그 왜구들과 후손이 바로 네놈들이었어."
양녕의 표정이 증오와 분노로 가득찼다. 양녕은 조부인 이성계를 닮아 원래부터 강한 인상이었던 탓에 그 모습을 보던 조선군 병사들은 물론, 이종무와 이지실마저 순간 움찔했다.
"전조 고려 때에 반백 년 동안 한 해도 쉬지 않고 대규모로 쳐들어와 미곡을 약탈하고, 조세를 털고, 백성들을 죽이고! 노예로 잡아가고!"
이전 삶의 지식 덕에 어지간한 동시대인보다 잘 알고 있는 고려 말 왜구 침공의 참상이 그대로 분노가 되어 쏟아져나와 양녕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고려 임금의 영정을 훔치고! 관리를 죽이고! 사찰을 약탈하고! 재화를 빼앗고! 그래,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고려에서 훔쳐 간 불상과 경전을 사찰이며 사당에 바치면 그 죄가 덜어질 줄 알았겠지? 내가 드디어 너희에게 그 죗값을 제대로 치르게 하여 죽어간 백성들의 복수를 하는구나."
소리는 조금 작아졌지만 여전히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양녕이 말했다.
"먼저 피를 본 것은 너희였다! 몽골과 손을 잡고 츠시마와 이키를 짓밟고 백성들을 끌고 간 것! 그 복수일 뿐이었다!"
미츠사다가 버둥거리며 외쳤다. 양녕은 차분히 한 걸음 다가가 발악하는 미츠사다의 머리통을 한쪽 발로 밟았다.
"채 1년도 가지 않은 전쟁의 복수를 50년을 한단 말이냐? 네가 말한 두 섬의 초토화를 주도한 것이 몽골임을 너희도 아는데 왜 너희는 원나라로는 가지도 않고 고려만을 들쑤셨느냐? 아니, 애초에 너희는 신이 태풍을 보내 주어 이겼다고 좋아하지 않았더냐? 이기게 해 주어서 고맙다며 이세신궁 변두리에 구색만 갖춰져 있던 바람 신의 사당을 크게 고쳐 지은 것은 너희 왜놈들이 아니라 어디 다른 나라의 조정이었나 보지?"
냉소가 가득한 표정으로 천천히 미츠사다의 한쪽 얼굴을 짓밟으며 말을 잇는다.
"너희가 자랑하는 무사의 긍지라는 것이 이긴 전쟁을 명분 삼아 복수한답시고 정규군을 피해가며 무고한 백성을 약탈하는 것이냐? 그런 건 무사라고 하지 않는다. 해적 놈들의 합리화일 뿐이지. 남의 나라 백성들을 약탈해 자기네 군량미와 군자금을 채우려는 해적 놈들 말이다."
해적이라는 말을 강조해 말하던 양녕이 발을 뗐다. 군화에 짓밟혀 흙투성이가 된 미츠사다의 얼굴에는 굴욕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런 해적 놈들에게 어울리는 결말은 명예로운 무사처럼 전장에서 죽는 게 아니다. 해적질하다 그 탐욕스러운 아가리에 화살을 맞고 비참하게 죽는 것이지. 그래, 너의 할애비인 쇼니 요리즈미, 고려인들이 아기발도라고 부르던 그놈처럼 말이다."
그제야 양녕과 미츠사다의 대화를 따라잡은 이종무와 이지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기발도 그 도적놈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나? 너희가 수치스러운 과거라 고치고 싶어도 자세히 모르고 잘못 고쳤다가는 들킬까 봐 그저 책에 히고로 망명 갔다가 객사했다는 몇 줄로 때운 그 최후의 진짜 꼬라지를 알고 싶으냐?"
미츠사다의 반응을 유도해 아기발도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 지난 삶에서 얻은 지식을 떠올리며 양녕이 비웃었다.
"모르는 모양이니 내 친히 가르쳐주마. 네놈의 할애비 요리즈미를 해치운 건 놈에게 아기발도라는 이름을 붙인 바로 그 군대를 이끄시던, 당시에는 전조 고려의 장수셨던 나의 조부, 태조대왕이시다!"
잠시 가만히 있던 미츠사다가 드디어 양녕의 말을 이해했는지 경악했다.
"아기발도놈의 투구 꼭대기를 태조대왕께서 맞추시고 그놈이 놀라서 입을 벌린 틈을 타서 의형제셨던 양렬공(이지란)께서 그 주둥이 안으로 화살을 쏘아 넣어 해치우셨지. 정말로 해적 놈에게 어울리는 최후 아니냐? 그 전투에서 보병과 기병이 아예 몰살을 당하고 너희 쇼니 해적 집안의 가세가 완전히 기울었을 것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즐거운 것이 없다."
미츠사다가 이를 악무는 것을 본 양녕이 즐겁다는 듯 말했다.
"재밌지 않느냐? 영웅의 손자와 해적의 손자가 이렇게 다시 만났단 말이다. 이번에는 고려 땅이 아니라 일본 땅에서 말이야. 하지만 달라진 것은 땅뿐이다. 이번에도 이긴 것은 영웅의 핏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