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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6화 (26/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26화

26화

"흩어지지 말고 뭉쳐라! 뭉쳐서 대열을 정비해라! 방패를 챙겨라!"

말안장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미츠사다가 악을 쓰듯 외쳤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이미 궁기병대의 화살에 무너져 가고 있던 쇼니군은 조선군 기병대가 근접무기를 뽑아 들고 돌격하자 처참하리만치 이리저리 흩어져서 각개 격파되고 있었다.

날붙이에 느끼는 본능적 두려움, 덩치 큰 말을 탄 기병이 주는 위압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모두 이겨낸 훈련된 무사들과 정예병이 쇼니 가문이 자랑하는 군사력의 근간이기는 하지만, 지휘가 무너지고 대열이 흐트러지고 적이 대처법을 알 수 없는 무기와 전술을 사용해서 생겨나는 혼란은 정예병들이라고 해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하카타 동쪽으로는 하코자키고 어디고 다 소나무숲인데 도대체 이 많은 기병이 다 어디서 나온 거란 말이냐!"

시부카와군이 경비를 게을리했거나 전멸당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하코자키 쪽에서는 적 병력이 많이 올 리가 없으니 소규모 부대로만 막아도 될 것이라 한 것은 미츠사다 본인이었던 탓에 차마 요시토시의 탓을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시부카와군은 조선군에 완전히 밀린 상황인지 시부카와 가문의 깃발은 상류 방향에 몇 개만 간신히 보였고, 그나마도 그중 하나가 또 쓰러지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따져 책임을 묻기 전에 요시토시가 살아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판이었다.

"안 되겠다! 이대로는 막을 방법이 없으니 일단 나카가와 상류 쪽으로 빠진다!"

미츠사다가 분투 중인 휘하 무사들에게 외쳤다.

쇼니 가문의 거점인 다자이후 지역은 나카가와(나가강) 상류가 아닌 히에카와(비혜강) 상류에 있었다. 큐슈의 옛 중심지인 다자이후에는 지역 이름의 유래인 다자이후(태재부) 관청 터 앞으로 펼쳐진 시가지가 있다.

주변에는 방어에 유리한 산세를 살려 고대에 지어져 지금까지 이어져온 성들은 물론이고, 쇼니 가문이 다자이후의 지배자가 된 이후로 새로 쌓은 방어용 성들도 여럿 있으니, 할 수만 있다면 다자이후로 가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조선군을 뚫고 바로 동남쪽의 다자이후로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서남쪽의 나카가와 상류로 퇴각해 일단 조선군의 추격을 끊어낸 다음, 다른 영주들의 도움을 받아 다자이후로 가 다시 병력을 모으는 게 현실성 있는 방안이었다.

"전군! 나카가와를 끼고 상류 쪽으로 퇴각한다! 대열을 유지해라! 흐트러지면 퇴각이고 뭐고 다 죽는다! 살아야 기회가 있다!"

그렇게 외치듯 지시하는 미츠사다도 부대 단위로 퇴각이 제대로 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화포가 있다고는 하지만 조선군 보병과 붙은 시부카와군이 제대로 퇴각도 못 하고 궤멸당했다면, 보병보다 기동성이 좋은 기병과 싸우는 쇼니군이 퇴각에 성공할 가능성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대열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고 버텨서 자신이 달아날 시간을 벌었으면 하는 계산이었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 혼자 달아나려는 것이 아니었다.

쇼니 가문의 현 가독(당주)인 자신이 여기서 죽어 버리면 어린 아들이 새 가독이 될 것이다. 그러면 가문 내적으로는 정치적으로 흔들리게 되고 외교적으로는 다른 세력의 도전을 받을 위험이 있다.

가문을 위해서라도 미츠사다는 살아야 했다.

"토노! 적들이! 아아악!"

퇴각할 생각을 한참 하던 미츠사다가 갑자기 들려온 비명에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조선군 기병들이 미츠사다와 주변의 병력들을 둘러싸고 조금씩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밀리는 싸움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아군 병력이 조금만 남고 포위되는 상황이 될 리는 없었다. 아무래도 미츠사다를 노리고 쇼니군 부대를 끊어 낸 다음 포위한 것 같았다.

'오히려 기회다.'

미츠사다가 이를 악물고 주변 상황을 살폈다. 포위해 다가오는 조선군 기병의 숫자가 엄청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조선군도 일부 병력을 나누어 포위를 시도하고 나머지 병력들은 다른 쇼니군을 공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쇼니군 전체로 보면 각개격파 당하는 중인 상황이었지만, 미츠사다만 본다면 탈출할 때 뚫어야 할 적들이 줄어든 상황이다.

또 적들의 말은 상륙해서 나카가와까지 온 다음 빠른 걸음으로 접근하고 뒤이어 기동과 돌격을 반복한 상황이라 지쳤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적게 움직인 자신의 말은 체력이 충분히 남아있을 테니 돌파만 성공한다면 적들의 추격을 뿌리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대략적인 탈출계획을 세운 미츠사다가 돌파구를 뚫을 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창을 들이밀고 어떻게든 방어하려던 무사가 창대 옆으로 휘어지듯 날아 들어온 편곤의 자편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는 곳.

지레 겁먹고 뒤로 넘어진 무사를 조선군 중기병이 말발굽으로 밟아 버려 제압하는 곳.

날 부분이 부러진 창을 집어던지고 칼을 뽑으려던 무사가 조선군이 휘두른 환도에 베여 목에서 피를 뿜어대는 곳.

창을 들고 방어하던 무사의 시선을 환도를 든 조선군이 끄는 동안 다른 조선군이 목덜미에 화살을 꽂아 넣는 곳.

천천히 좁혀드는 적들 사이로 돌파구가 얼추 보였을 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미츠사다의 손과 말의 등 사이로 절묘하게 날아 들어와 말고삐를 전부 자르고 지나갔다.

"맞췄다! 봤지?"

"이 거리에서 촉 넓은 화살을 썼는데 그 정도는 맞춰야지!"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간 화살에 말이 놀라서 이리저리 뛰기 시작했다. 그 탓에, 조선군이 뭐라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워어, 워어. 이이익! 진정해라! 워워!"

미츠사다는 고삐를 잡아당겨 진정시키려고 해도 잘리고 남은 고삐는 이미 말 몸통 옆으로 늘어져 있는 데다가 말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통에 붙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말을 진정시키는 것은 포기하고, 낙마하는 대신 겨우겨우 뛰어내려 착지했다.

휘청거리면서도 자세를 잡고 일어나서 주변을 살펴보니 이미 조선군 기병 여럿에게 둘러싸인 상황이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한 명은 갑옷을 보니 조금 전에 중기병대를 몰고 돌격해 온 부대의 대장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젊다 못해 어리다고 해야 할 나이였다.

"여기에만 비단으로 만든 깃발이 있고 그 아래 혼자만 말 탄 놈도 있어서 우선 포위해 봤는데, 가까이서 보니 갑옷이 오늘 본 놈 중에서 제일 화려한 것이 이놈이 적장 맞는 것 같군."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이놈만 제대로 생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제는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미츠사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조선이 침공한다는 것도 소문만 있는 상황이어서 전 병력을 동원한 것도 아니었다.

비록 바로 데려올 수 있는 정예 무사들과 가신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탓에 오늘의 전멸은 장기적으로도 뼈아픈 피해겠지만, 쇼니 가문은 이보다 더 큰 피해를 겪고서도 매번 부활했다.

가독 한 사람이 여기서 전장의 고혼이 된다고 한들 너무 걱정할 것은 없었다. 쇼니 가문은 살아남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믿으며 미츠사다가 칼을 뽑아 들고 외쳤다. 다가오던 조선군들이 순간 멈춘다.

"역적 타이라노 마사카도를 토벌하시고 미카미산의 요괴 지네를 해치우신 후지와라노 히데사토님의 후손인 무토 요리히라님의 조카이자 양자로 다자이쇼니에 임명되어 쇼니 씨의 시조가 되신 스케요리님으로부터 9대손이자, 쇼니 가문의 11대 당주이자 다자이쇼니이자 치쿠젠의 슈고인! 쇼니 미츠사다다!"

한 호흡에 전부 쏟아낸 다음 숨을 돌리고 다시 외친다.

"스케요리님의 아들이자 최초로 쇼니씨를 칭하신 스케요시님은 이키섬에서 원구(원과 고려의 일본 정벌군)와 싸우다 돌아가셨으며 그 아들이신 츠네스케님 또한 아들이신 스케토키님을 원구와의 싸움에서 잃으셨지만 끝내 원구를 물리치셨다! 그 아들이신……."

"이놈!"

눈앞의 중기병대 대장이 갑자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는 바람에 미츠사다의 말이 끊겼다. 중기병대 대장이 미츠사다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재밌다는 듯 말을 이었다.

"왜놈들 잡으러 오기 전에 급하게 배운 왜말이라 다는 못 알아듣겠지만 그게 너희 집 족보인 모양이구나! 족보를 줄줄 읊는 걸 보니 너도 오늘이 너희 집안 줄초상이 나는 날인 줄은 아느냐?"

중기병대 대장의 말에 주변에 있던 조선군들이 박장대소한다.

미츠사다는 조선말은 잘 알지 못하지만 비웃음당한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가문을 읊는 도중에 비웃음을 당한 미츠사다가 모욕감에 이를 갈았다.

"조금 전에 이놈이 자기 이름을 미츠사다라고 했으니 적장이 확실해졌다. 생포한다!"

적장의 지시에 조선군이 일제히 자신을 향해 무기를 고쳐 잡았지만 미츠사다는 주변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적장 쪽으로 칼끝을 겨누고 노려보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한 놈이라도 더 저승으로 데려갈 생각이고, 기왕 데려간다면 쇼니 가문을 모욕한 놈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적장이 씩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너희 집 족보를 들어놓고도 내가 통성명도 안 해서 화가 많이 났느냐?"

주변의 조선군들이 다시 넘어갈 듯 웃기 시작했지만, 미츠사다는 침착하게 적장을 죽이는 것만 계산했다.

먼저 낙마를 노리려 했지만 말에도 갑옷을 입힌 데다가 주변에 적이 많아, 낙마 이후에 추가 공격을 가할 기회가 없어 보였다.

그럼 장수를 노려야 하는데 사슬과 철판이 결합된 갑옷이라 몸통을 잘못 찌르면 공격이 막힐 수 있으니 목을 노려서 한 번에 찔러야 할 것이다.

그나마 놈이 들고 있는 무기는 도리깨처럼 생겼으니 들어서 휘두르려면 동작이 크고 시간이 걸리고, 그대로 쓰기에는 자루 부분이 짧으니 막기 어려울 것이다.

그때 조선군 대장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자기소개를 하마! 나는 대조선국 선략장군 정동군 중군사단 1기병여단 천지부대의!"

"히얏!"

최대한 예상하지 못하게, 말을 하는 도중에서도 또 문장 도중에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미츠사다가 재빠르게 발을 굴러 돌격하면서 온몸의 힘을 담은 칼끝으로 갑옷이 약한 목덜미를 노리고 찔렀지만, 적장은 별거 아니라는 듯 슬쩍 편곤을 든 손을 움직였다. 편곤 사슬 부분에 칼끝이 맞춘 듯이 쏙 들어가고, 그대로 적장이 편곤을 들어 올리자 관성을 이기지 못한 칼끝이 딸려 올라가 허공을 찌른다. 미츠사다의 몸도 관성 때문에 그대로 앞으로 나가버린 탓에 적장에게 바짝 다가가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눈 깜짝할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스스로도 놀라 당황한 미츠사다가 가소롭다는 표정의 상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얼굴에 제대로 꽂힌 주먹을 맞고 뒤로 넘어지는 미츠사다를 향해 적장이 외쳤다.

"중기병연대장 이징옥이다!"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대자로 넘어진 미츠사다는 머릿속까지 울리는 주먹의 충격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참 내. 자기는 족보 읊다가 끊으니 성질을 내놓고서는, 정작 남이 자기소개할 때는 도중에 공격을 하다니. 그 잘난 족보에 실린 조상님들이 그리 가르치더냐?"

기병여단장 우박을 옆에서 따라오던 젊은 군관이자, 중기병연대의 연대장인 십 대의 장수, 이징옥의 말에 다시 한 번 주변의 조선군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목을 칠 수는 없으니 투구라도 내걸어야겠다. 이놈들은 투구가 다 특이하니 그것만 걸어도 자기네 대장이 잡힌 걸 알고 사기가 떨어지겠지."

누군가 말에서 내려 다가와 꼼짝도 하지 못하는 미츠사다의 투구를 벗기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창을 집어 들어 그 끝에 투구를 걸어서 적장에게 건네주었다.

"적장을 사로잡았다! 이제 나머지 놈들은 가능하면 생포하고 여의치 않으면 모조리 죽여도 좋다!"

적장이 자신의 투구가 걸린 창을 높게 치켜들며 외치는 것을 바라만 보던 미츠사다는 뒤이은 조선군의 함성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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