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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5화 (2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25화

25화

나가강 전투 개시 전.

패가대 동북부.

중장갑을 입고 말을 탄 젊은 군관 하나가 목에 걸린 나침반을 한참 들여다보다 말했다.

"서남쪽으로 맞게 가고 있습니다."

"알겠네. 그럼 계속해서 숲을 오른쪽에 끼고 가면 되겠군."

군관의 말을 들은 장수가 대답했다.

정동군 내의 유일한 기병여단의 여단장, 우박이었다.

"장군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조금 전의 군관이 슬쩍 말을 걸었다.

"좋고말고. 내가 제안한 기병 작전을 대군께서 흔쾌히 수락해 주셨으니, 일평생 말을 타고 살아온 보람이 있지 않은가."

기마술에 능한 여진족과 국경을 맞댄 평야 지대인 평안도에서 두 번, 그것도 한 번은 최전방인 의주에서 지방관을 지내고, 이번 원정에 오기 전까지도 제주도 도안무사로 말과 기병을 키워 내는 일을 맡았을 정도로 기병으로는 인정을 받은 우박이었다. 전날 상륙 계획을 짤 때 자신이 제안한 조금 무모한 제안을 양녕이 승인해 준 것이 기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작은 섬에 해적들을 치러 가는데 나처럼 말 타는 재주만 있는 놈을 뭐 하러 보내시나 했지. 생각지도 못하게 원정이 커지더니 기병을 이만큼이나 몰 수 있게 되어서 기쁜 것도 있네."

말을 마친 우박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천여 기가 넘는 기병들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의기양양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대마도 원정이 구주도 정복으로 확대되며 새로 정동군에 편성된 병력이었다.

"저는 장군께서 이런 작전을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신기합니다."

군관이 정말로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우박을 보며 지금까지의 작전 전개를 떠올려보았다.

맨 처음은 상륙이었다.

대장선을 포함한 함대가 식빈도와 패가대로 먼저 가 화공을 겸해 시가지에 불을 질러 연기를 내고 망루를 부숴 적의 관측을 차단했다. 그 틈을 타서 기병들을 나눠 태운 상륙 함대가 거기포(하코자키) 해안에 내렸다. 거기포는 길게 뻗은 모래사장이 있고 그 안쪽으로 또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우거져있어서 상륙하기에도 좋고 상륙한 뒤에는 패가대 쪽에서 발견하기도 쉽지 않았다.

"솔직히 처음 숲을 봤을 때는 막막했습니다만 들어가고 나서는 좀 안심이 되었습니다. 한데 지도를 보고 대군께서 하신 설명만 들으셨는데 어떻게 저 소나무숲에 기병이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상륙에서 이어진 작전은 기병들을 통째로 이끌고 숲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반신반의했지만, 막상 숲에 들어가 보니 말을 타고 통과하기 충분한 환경이었다.

"대군께서 하신 말씀이면 알기 충분하지. 해안가 옆에 사람이 소나무를 심으면서 생긴 숲이라 하셨으니 땅이 평탄할 것을 알 수 있었고, 소나무는 드문드문 자라고 그 근처에는 다른 초목들이 잘 자라지 못하는 법이니 말이 지나가는 데 장애물이 될 것도 얼마 없을 것 아닌가."

"그래도 기병으로 숲을 지나가실 생각을 하셨다는 게 대단합니다."

"내가 처음 한 생각이 아니야. 보고 배운 것이지. 여진족들은 그보다 더한 숲에서도 말을 타고 돌아다닌다네."

"오랑캐라는 말이 몽골말로 숲에 산다는 뜻이라더니 그럴 만했군요."

군관이 새로운 걸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인들도 그렇게 숲에서 잘 돌아다니는데 우리는 나침반도 있고, 패가대 시가지가 불타면서 나는 연기도 보이고, 때때로 저쪽 부대에서 불꽃도 높이 쏘아서 알려주기까지 하니 숲에서 길을 잃을까 걱정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그렇게 숲을 통과한 다음에는 가끔씩 아군이 멀리서 쏘아 올리는 불꽃을 이정표 삼아 방향을 고쳐가며 진격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추수철이 아니었나? 대군께서 말씀하시길 왜인들은 무사들이 싸워서 땅을 차지하면 거기 속한 백성들은 주인만 바뀌는 것이라 전쟁에 큰 관심이 없다 하셨는데 추수철에 농민들이 하나도 안 보일 수가 있나?"

이번에는 우박이 궁금했던 것을 군관에게 물었다. 우박의 말대로 부대가 숲에서 나와 지금 위치까지 오면서 본 농경지에 농민들은 하나도 없었고, 가끔 보이는 민가들은 굳게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원나라와 고려에게 호되게 당한 뒤로 여기 사람들은 몽골과 고려라는 말을 도깨비 이름으로 쓴다고 대군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도깨비들이 돌아다니니 무서워서 못 나오는 것이겠지요."

"그럼 무서운 도깨비 노릇을 해 줘야겠구만!"

끝에 덧붙인 군관의 농담이 재밌었는지 우박이 작게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장군. 저 앞에 하천이 하나 보입니다. 아마 저게 비혜강(히에카와)인 듯합니다. 저걸 건너면 나가강(나카가와)까지는 금방입니다."

군관의 말에 우박이 웃음을 멈추고 앞에 보이는 하천을 자세히 살폈다. 비혜강은 가을철 갈수기인 탓인지 발목이나 겨우 잠길 정도로 수량이 줄어있었다.

"저 정도면 충분히 그냥 건널 수 있겠군. 비혜강을 건너기 어려우면 다리를 찾을 계획이었는데 번거로운 일이 하나 줄었어."

찰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병여단이 비혜강을 건너는데 앞쪽 저 멀리에서 불꽃 하나가 하늘 높이 올라가 터졌다.

"불꽃이 정면으로 보이는 걸 보니 방향도 제대로 잡은듯합니다."

군관이 그렇게 말한 순간, 무어라 외치는 사람 목소리와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전투가 시작된 모양이다. 늦어서는 안 된다. 강에서 나오는 대로 속보로 이동해라!"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이 된 우박이 외쳤다. 우박의 지시에 일제히 말의 속도를 올려 움직이기 시작하자 곧 저 멀리에 깃발을 세워 들고 있는 무리가 보였다.

"저 멀리 적들이 보인다! 우리가 도착했다는 신호를 쏘아라!"

불꽃 하나가 기병여단 머리 위로 높이 날아올라 터지며 노란색 불꽃을 피워냈지만, 포성에 익숙한 조선의 군마들은 전혀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계속 달려 나갔다.

이윽고 저 멀리 보이는 조선군 진영 방향 하늘에서 불꽃이 터졌다.

소금으로 색을 내는 일반 신호용 불꽃의 노란색이 아닌, 조선에서는 잘 나지 않는 구리로 색을 내는 특수 신호용 녹색 불꽃이었다.

"녹색 불꽃! 전투에 돌입해도 된다는 신호다! 구보로 바꿔 적에게 접근한다! 전 부대 전투 준비! 대열을 갖춰라!"

우박의 호령에 각 부대별로 진형을 갖추고 속도를 올렸다. 저 멀리서 뒤늦게 기병대의 접근을 알아차렸는지 적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숲 쪽에서 기병이 쏟아져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 놀랄 만하지! 인화살 준비! 놈들 머리 위에 불벼락을 내리자!"

군관이 지시를 내리며 자신도 활과 인화살을 꺼내들었다.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갑옷 쇠부분에 그어 켠 뒤 심지에 불을 붙였다.

"발사!"

적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 터진 인화살이 백린 부스러기들을 사방으로 쏟아냈다.

"적이 가까워졌다! 중기병들은 무기를 꺼내라! 돌격 준비!"

선두에서 말을 달리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는 우박의 눈에는 오랜만에 맛보는 기병 전투의 고양감과 흥분이 가득했다.

"잊지 마라! 화려한 투구를 쓴 놈들은 생포한다! 아닌 놈들은 모조리 박살 낸다!"

우박의 옆에서 따라 달리던 군관이 큰소리로 외치고는, 허리춤에 찬 태평소를 들어 입에 가져다 대고 힘껏 불었다.

돌격을 알리는 태평소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그 태평소 소리마저 묻어 버릴 기세로 우박이 외쳤다.

"전군 돌격!"

군마들이 일제히 속도를 올리고, 천여 기가 넘는 기병의 물결이 두 배에 달하는 적들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하자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덮었다.

"궁기병대는 나를 따라라! 나머지는 맡기겠다!"

"예, 장군!"

중기병대의 지휘를 군관에게 맡긴 우박이 조선군 기병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궁기병들을 이끌고 먼저 움직였다.

"발사! 위협이 되는 활 든 놈들 먼저 잡는다!"

우박의 지시에 따라 궁기병대가 적에게 접근하며 화살을 쏘았다.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활을 쏘려던 적 궁병대가 목이며 팔에 정확히 화살을 맞고 이리저리 쓰러진다.

"우회! 궁병은 제압했으니 이제 진형을 무너뜨린다!"

한차례 화살을 쏟아붓고 옆으로 돌아나간 다음 그대로 계속 기동하며 거리를 두고 쉴 새 없이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기병에 대한 유효한 견제수단인 궁병대가 기병에게 역으로 차례차례 박살 나고, 기습당한 충격과 대규모 기병이 주는 본능적인 공포에 더해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까지 맞은 적군의 대열이 천천히 뭉개지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차례다! 중기병대! 돌격!"

군관이 호령하고 말을 몰아 달려나가며 무기를 뽑아 들고, 뒤따르는 중기병들도 같은 무기를 뽑아 들었다. 양녕의 건의로 200여 년 일찍 조선군에 채택된 전투용 도리깨인 편곤이었다.

"진형을 갖추고 진입한다! 모조리 박살 내라!"

군관을 선두로 하는 중기병들이 쐐기 모양 대형을 만들고, 가장 적들의 대열이 흐트러진 곳으로 달려 들어갔다.

"흐랴아아앗!"

갑옷을 제법 차려입은 적 무사 하나가 무너진 대열 사이에서 창을 들고 발악하듯 고함을 지르며 막아섰지만, 제아무리 조선군의 화살을 튕겨내던 갑옷이라도 말의 체중과 속도가 실린 편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군관이 휘두른 편곤의 타격 마디인 자편에 제대로 명치를 맞은 적 무사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넘어졌다.

"이거 좋구만!"

넘어진 적 무사가 뒤따라오던 기병들의 말발굽에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군관이 호쾌하게 외쳤다.

신무기의 도입에 조심스럽기 마련인 군대에서, 양녕이 건의했다지만 기병의 근접무기를 창에서 편곤으로 금방 바꾼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이런 타격무기의 장점 때문이었다. 갑옷을 뚫으려면 힘껏 찔러야 하면서도 그러다 적의 몸에 너무 깊게 박히면 다시 뽑기 어려워 버려야 하는 창과 달리 편곤은 적을 때리는 무기라 그럴 걱정이 없었다.

"저 앞에 방패 든 놈들이 다음이다!"

대열이 흐트러진 적들을 마구 짓밟은 중기병대가 다음으로 향한 곳에는 어찌어찌 대열을 수습한 적들이 나무방패를 들고 잔뜩 뭉쳐 방어하고 있었다. 고려 말, 왜구들이 정규군을 만났을 때 곧잘 쓰던 방어진이다. 방패가 제법 크고 두툼한 덕인지 궁기병들이 지나가며 쏜 화살이 곳곳에 뚫지 못하고 박혀만 있었다.

"돌파가 아니라 선회하며 잡는다!"

"예!"

선두가 먼저 접근하자, 적이 방패를 더욱 꽉 붙잡으며 서로 밀착했다. 창기병이었다면 뚫을 방법이 없었겠지만, 지금 조선군 기병의 무기는 편곤이었다.

말을 달려 방패 앞으로 지나가며 방패 위쪽으로 편곤을 휘두르자, 자편이 방패 너머로 빙그르르 돌며 퍽 하는 소리를 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방패병이 머리를 맞고 기절했는지 손에서 떨어진 방패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편곤 채택의 두 번째 이유인 넓은 공격 범위였다. 예측이나 방어가 불가능한 방향에서 들어오는 공격은 지금처럼 방패를 든 적이라도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완전한 군용 무기인 창과 달리, 농촌에서 나고 자라면서 도리깨를 다뤄 본 대다수의 조선 장정이라면 누구나 금방 익힐 수 있다는 점에, 예리하면서도 강한 날붙이를 만들어야 하는 창과 달리 쇠못과 사슬만 만들 수 있다면 어느 대장간에서나 만들 수 있다는 점까지 있으니 조선군 기병으로서는 편곤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좋아, 이탈!"

상당수의 방패를 넘어뜨린 중기병대가 그대로 말을 달려 벗어나자, 한 바퀴 돌아서 교대하듯 온 궁기병대가 방패가 넘어지며 생긴 공간으로 화살을 쏘아 넣었다.

남은 방패병과 밀착하자니 쓰러진 아군이 방해되고, 그대로 서 있자니 옆구리에 화살이 박히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 적 대열이 우왕좌왕하며 무너지기 시작한 것을 본 우박이 외쳤다.

"잘했다! 이제 근접전에 돌입한다!"

그 외침을 신호로, 경기병대가 일제히 활을 활집에 집어넣고 환도를 뽑아 들었다.

근접전을 알리는 태평소의 큰 소리와 번쩍이는 날붙이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에 와해되기 시작한 적들을 향해 조선군 기병대가 사방에서 환도와 편곤을 들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곡식이 아닌 적들의 목숨을 수확하고 탈곡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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