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23화
23화
미츠사다의 좌절감에 덩달아 휩쓸릴 뻔한 요시토시가 정신을 차리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진정하시오, 토노. 예상보다 적이 체력을 좀 더 온존했고, 좀 더 일찍 도착하기는 하겠지만 그뿐이오. 벌써 이리 진 것처럼 나카가와에 방어선을 깔 필요는 없소. 대포라는 것이 쏘는 데에 준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오? 그럼 적이 나카가와까지 와서 쏠 준비를 하고 나서 싸우는 것보다 우리가 먼저 가서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붙어야 하지 않겠소?"
"나도 그 생각은 했소."
예상 밖의 대답에 요시토시의 말이 딱 멈췄다. 미츠사다가 그 모습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기지는 못해도 진격속도를 늦춰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서 선발대를 꾸려서 보냈소. 선발대가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마침 적 선두가 구릉지를 막 빠져나온 상태였고, 대포도 준비 안 된 상태길래 습격을 시도했다고 하오."
"어찌 되었소?"
이어지는 내용이 절대로 좋은 소식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요시토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접근도 제대로 못 하고 참패했소. 결코 적은 병력을 보낸 게 아니었지만 살아 돌아온 건 일부였소."
"적들이 대포를 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급습했는데도 패했단 말이오? 혹시 활 때문이었소?"
조선의 활과 그 쏘는 솜씨가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떠올린 요시토시가 물었다.
"아니오. 조선의 활에 대비해서 튼튼한 갑옷을 입은 무사들만 추려서 보냈었소. 살아 돌아온 이들이 말하기를, 화살은 튕겨 냈지만 처음 보는 무기에 당했다더군. 나도 처음 듣는 무기여서 증언을 토대로 추정만 할 수 있었소."
"그래서 어떤 무기로 추정하시오?"
"손에 들고 쏠 수 있는 작은 대포요."
대포의 위력을 체감한 지 불과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요시토시가 손에 들고 쏘기까지 한다는 말에 얼어붙었다가, 잠시 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토노께서 왜 이러시는지 이유를 알겠소. 나카가와에 방어선을 최대한 구축해야겠구려."
* * *
같은 시각.
냉천만(레이센만) 남쪽 해안가.
"그야말로 몰살이군요."
해안에 접안한 대장선에서 내리며 이종무가 말했다. 이종무의 말대로 해안에는 조금 전 해상과 지상 양쪽에서 조선군에게 협공을 당한 적들의 시체가 사방에 널려있었다.
"그러게 말이오. 생각보다 적 병력이 적은 걸 보니 아무래도 해안에는 최소한만 남기고 이미 이동한 모양이오. 예상 범위 이내로군."
이종무와 함께 내린 양녕이 주변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럼 저는 계획대로 냉천만과 패가대 앞바다를 계속 다니며 견제하겠습니다."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양녕이 돌아보았다. 최윤덕이 대장선 갑판 위에 서 있었다.
"알겠소. 그럴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신호를 보내시오."
"알겠습니다. 대군께서도 몸이 상하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점령이 끝난 뒤에 뵙겠습니다."
최윤덕이 탄 대장선이 다시 바다로 나가고, 이번에는 지상의 부대에서 장수 한 명이 다가왔다. 서부 해안 상륙의 총지휘를 맡은 우군사단장 이지실이었다.
"우군사단장께서 수고가 많으셨소. 다친 곳은 없으시오?"
"대군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합니다. 대군께서도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나도 괜찮소. 여기까지 오는 동안 특별한 일이 있었소?"
"적 선발대로 보이는 부대가 습격을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소?"
양녕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갑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있어서 화살은 안 통했지만, 상륙 직후부터 포수들에게 발포 준비를 시켜 놓고 이동 중이어서 바로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적 대다수는 시체가 되었고, 일부만 살아서 달아났습니다."
"잘하셨소. 갑옷만 믿고 화살은 막을 수 있다 방심하다가 납탄에 맞고 죽은 게로군. 갑옷을 제대로 입었고 선발대로 왔으면 적들 중에서도 정예를 보낸 것일 텐데, 그런 이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우리에겐 매우 잘된 일이오."
양녕의 칭찬에도 이지실의 표정은 어딘가 걱정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하지만 일부가 살아 돌아간 것이 문제입니다. 적들도 조총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잘한 전투도 없이 바로 맞붙기를 기대할 수도 없고, 모든 전투에서 적을 몰살하기를 바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신무기를 쓰는 시점에서 다 예상한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같은 무관으로 오래 알고 지낸 이종무가 옆에서 이지실을 격려했다.
"그리고 기술이 넘어갔을 걱정도 없소. 왜인들은 화포나 화약을 다루는 것은 고사하고 화약을 만드는 법조차 모르니 말이오. 걱정이 되는 것은 조총을 정확히는 몰라도 어떤 무기인가 하는 것만 알았다고 해도 지리를 잘 아는 적이 대비책을 마련하면 우리가 불리해진다는 것이오."
"그래서 이미 기습에 대비해서 부대 측면과 후면에 정예병들을 나눠 배치하고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생포한 적을 문초해서 적들이 나가강을 끼고 군사를 모아 방어할 것이라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보시오. 이미 잘 대비하셨지 않소."
"자네는 언제나 대비를 잘해 놓고도 걱정이 많다니까."
양녕과 이종무가 피식 웃자 이지실은 머쓱해 하면서도 조금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그럼 적의 대비책이 견고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일찍 가는 게 좋겠소. 지휘는 우군사단장께서 계속 이어서 하시오."
양녕과 이종무가 준비된 말에 각각 올라타자, 이지실도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말에 타 병사들에게 외쳤다.
"다들 들어라! 적의 선발대도 쓰러뜨렸고, 해안에 있던 적들도 전부 쓸어버렸고, 대군께서도 무사히 합류하셨다! 이제 저 간악한 왜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까지 가 나머지 놈들도 모조리 쓸어버리자! 목표는 나가강이다! 전군 전진 앞으로!"
이지실의 호령에 모든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한참 뒤.
나카가와 일대 쇼니-시부카와 방어군 진영.
서쪽에서부터 급하게 말을 몰아 달려온 전령이 나카가와 서쪽에서 호라가이(신호용 소라고둥)를 꺼내 들어 힘껏 불자, 강 동쪽의 쇼니군 진영까지도 들릴 만큼 길고 큰 소리가 뿌우우 하고 울려 퍼졌다.
"적이 근접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다들 각오를 다져라!"
쇼니 미츠사다가 말 위에 올라탄 채로 주변을 둘러보며 외치기 시작했다. 승리했다는 소식은 한 번도 듣지 못하고 거듭된 패배 끝에 강을 끼고 방어 중인 병사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연설이었다.
"조선인들은 투사무기에 능하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카가와 강을 두고 이만큼 떨어져 있으니, 거리도 멀고 강바람도 불어 화살은 약해질 것이다. 또 적들이 작은 대포를 들고 왔다고 하지만 대포가 작아졌으면 당연히 힘도 약해지지 않았겠느냐? 큰 대포는 위협적이지만 준비할 시간이 오래 걸리니 준비를 하기 전에 적을 쳐서 전투를 끝내면 된다!"
반쯤은 자기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외친 미츠사다는 문득 서늘한 10월의 북풍이 부는 것을 느꼈다. 북동풍인지 북서풍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침 잘된 일이었다.
"보아라! 북동쪽의 하코자키 하치만궁에서 바람이 불고 있다! 삼한을 정벌하신 진구황후의 아들이자 무예의 신인 하치만신께서 우리에게 가호를 내리시는 것이다! 자, 내가 대표로 기도를 올리겠다!"
미츠사다가 북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더니, 과장된 몸짓으로 합장을 하면서 아무 염불이나 생각나는 대로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미츠사다의 이 방법이 먹혔는지, 병사들도 저마다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좋다! 그럼 전투 준비는 끝났다! 함성 준비! 에이! 에이!"
"오!"
병사들과 함께 일본 고유의 전투함성인 토키를 외친 미츠사다는 다시 말머리를 강 쪽으로 돌렸다. 기껏 올린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까 봐 표정은 근엄하게 유지하고 있었지만, 가끔씩 걱정스러운 눈빛이 강 건너 상류 쪽인 남쪽을 향했다.
* * *
미츠사다의 시선이 향하던 곳, 쇼니군 진지에서 나카가와를 건너 조금 남쪽으로 내려간 구릉지의 숲그늘에 요시토시의 부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호라가이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적들이 오고 있나 보군."
요시토시가 뒤를 돌아 얘기했다. 기습을 준비 중인 부대가 큰 소리로 말할 수는 없어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저쪽 부대는 사기 진작을 위해서 조선군이 약하다고 하고 있을 것 같지만, 직접 붙어야 하는 우리는 정확히 알아야 각오를 다질 수 있다. 조선의 투사무기는 강하다. 그래서 멀리서부터 접근해야 되는 상황이 되면 우리가 불리하다."
단정 짓는 듯한 그 말에 병사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요시토시는 상관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이제 저쪽 부대가 강을 끼고 적을 유도할 것이다. 적이 강에 가까이 붙으면 우리는 적의 측면이나 후면을 급습해서 근접전으로 몰아갈 것이다. 조선이 투사무기에는 능하지만 근접전에는 약하니, 단숨에 가까이 붙어 버리면 우리가 유리하다. 근접전 상황이 아닌 적들도 아군을 쏠 위험이 있으니 우리를 향해 투사무기를 제대로 쏘지 못할 것이야. 이것이 내가 너희들에게 있는 그대로를 말해 준 이유다."
조선의 투사무기가 약하다고 하면 순간적으로 사기는 올라가겠지만, 방심하고 천천히 접근하다가 죽을 수 있다. 조선의 투사무기가 강한 것을 알려 줘야 필사적으로 근접하려 달려가 오히려 살 확률이 크다.
요시토시의 의도를 드디어 이해한 병사들의 눈빛이 각오로 차올랐다.
"좋다. 그럼 급습하기 전까지 적의 척후에게 들키지 않게 깃발은 눕혀서 들고 있어라. 조선군이 나카가와에 도달하고 전투가 시작되면 카부라야(일본식 효시)를 쏴서 신호한다고 했으니, 그때 깃발을 들고 다같이 밀고 나간다. 부대는 반으로 나눈다. 1번대는 내가, 2번대는 미츠나오가 맡을 것이다."
병사들이 일제히 깃발을 눕혀드는 모습을 보며 요시토시가 함성 대신 병사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병사들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요시토시에게 2번대 대장으로 지목받은, 요시토시의 사촌동생 시부카와 미츠나오가 말을 몰아 요시토시에게 다가왔다.
"형님. 차라리 제가 선두에 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되었다. 우리 군사들은 목숨을 걸고 적에게 달려들어야 하는데, 총대장인 내가 뒤로 빠지면 통솔도 안 되고 사기도 떨어질 것이다. 대신 이걸 받아 두거라."
요시토시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주변에서 보이지 않게 손으로 최대한 감싸 쥐고 미츠나오에게 건넸다.
"이건 아끼시던 물건이 아닙니까."
놀란 미츠나오가 작은 소리로 되물었다. 요시토시가 준 것은 화려하게 금박이 들어간 작은 접부채였다.
"무사가 죽을 각오를 하고 전장에 나서는 것이 뭐 그리 놀랄 일이냐. 만일을 대비해서 내가 가장 신뢰하는 너에게 뒷일을 맡긴다는 증표다. 그 만일의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나에게 돌려주면 된다."
요시토시의 단호한 표정에, 미츠나오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부채를 조심스럽게 품에 넣었다.
* * *
잠시 후.
나카가와 서쪽, 조선군 부대.
거의 다 강변에 도달하자 병사 하나가 수레에 실린 측거의로 대략적인 거리를 쟀다.
"적과의 거리 200보 이하 150보 이상!"
"적당한 거리다. 여기서 멈춰서 대열을 갖춰라!"
이지실의 외침에 조선군이 멈춰서고, 강을 사이에 두고 쇼니군과 마주보는 최전열의 병사들이 방패를 꺼내들었다.
"대군. 조심하십시오."
조선군이 오다 멈춘 것을 본 쇼니군에서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이종무의 말을 들은 양녕이 투구를 눌러쓴 것이 무색하게, 화살은 순풍인 북동풍을 타고 날아왔으면서도 최전열 병사의 방패에 맞고 힘없이 튕겨 나갔다.
"바람이 저쪽 편이군. 우리 화살은 닿을지 모르겠는데."
양녕의 중얼거림에 대답이라도 하듯, 조선군 진영에서 날아간 화살에 맞은 적 선두 한 명이 뒤로 넘어갔다.
"우리 화살은 닿고 저놈들 화살은 안 닿으니 적들이 사거리를 확보하러 가까이 올 것이다! 그 전에 잡아라!"
이지실의 외침에 이어 전투 개시를 알리는 노란색 불꽃이 하늘 높이에서 터지고, 뒤따라서 쇼니군이 쏜 카부라야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