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22화
22화
"궁수와 조총 모두 준비가 되는 대로 조준해서 쏴라! 대신 이쪽을 노리는 놈들만 쏘고 낭비하지 마라! 긴 막대기 든 놈이 궁수다!"
이미 모든 병사들에게 교육한 내용이지만 이종무가 다시 외쳤다. 재료와 기술의 문제로 충분한 위력과 사거리를 내려면 길이를 늘여야만 하는 일본 활 특유의, 쏘는 사람의 키보다 긴 활은 그 자체로 표적이나 다름없었다.
총소리와 활시위 튕기는 소리가 날 때마다 식빈도(오키노하마) 건물 지붕 위에서 활을 들고 있던 적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지붕 안쪽으로 떨어져 보이지 않는 놈, 바깥으로 떨어져 축대에 머리부터 떨어진 놈, 그냥 풀썩 쓰러진 놈 등 모습도 다양했다.
"인화살 발사!"
다음 지시에 날아간 인화살들이 지붕 위가 아닌, 지붕 너머까지 날아가 터지고, 대장선이 있는 곳까지 비명소리가 들렸다.
지붕 위에 아무리 쏴 봤자 올라온 병사들만 잡을 수 있고, 지붕 자체는 기와를 얹어 놓아서 아무리 불붙은 백린이 떨어져도 별 피해를 줄 수 없었다.
하지만 건물을 넘겨서 터뜨리면 목재로 된 기둥에 불이 붙는 것도 노릴 수 있고, 건물 아래 시가지에 있던 적군에게 혼란과 피해를 동시에 줄 수 있는 것은 물론, 건물 아래에 불이 나면 지붕에 올라온 병사들 사기가 떨어진다는 이점도 있었다.
"곧 만에 진입한다! 식빈도 근접!"
좁은 빙천만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 대장선이 식빈도 쪽으로 붙기 시작했다.
대장선 망루에서는 병사들이 방패를 들어 양녕을 포함한 장수들을 보호했고, 갑판에 있는 병사들도 대다수가 방패 뒤에 숨었다. 포수들만 방패 틈새로 적 궁수를 노려 간간히 사격하고, 날아온 적 화살들이 방패에 맞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대장선 측면이 식빈도를 바라보는 위치가 되었다.
"방포하라!"
이종무의 쩌렁쩌렁한 외침은 이어진 포성에 묻혀 버렸다.
대장선 측면에 늘어선 대포들이 천둥소리를 내며 불을 뿜고, 맹렬한 기세로 포탄들이 날아갔다. 따뜻한 지역인 데다가 지반이 약한 인공섬 위라는 두 조건 때문에 두껍게 짓지 않은 식빈도 위 건물들 벽이 종잇장처럼 뚫렸다.
잠시 뒤 바닷바람이 화약연기를 걷어냈을 때 대장선에서 본 식빈도에서는, 운 없이도 기둥에 제대로 맞았는지 건물 하나가 옆으로 기울어 무너지고 있었다.
"식빈도 통과! 천천히 해안에서 거리 벌리고 사격 준비!"
식빈도를 지나 패가대(하카타)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하자 다시 궁수들이 방패 뒤에서 일어나 시가지 안을 향해 인화살을 발사했다. 뒤에서는 대장선을 따라오던 배가 식빈도에 두 번째 대포를 발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 * *
얼마 뒤.
하카타 시가지
일본은 물론이고 명과 유구에서도 상인들이 와서 교역하던 일본 유수의 교역항이었던 하카타가 지금은 불과 연기로 가득했다. 전쟁이 난다는 소문에 이미 외국 상인들은 다 빠져나가고 없었다.
평민들은 건드리지 않는 일본식 전쟁만 생각하거나, 기껏해야 바다에서 화살이나 몇 개 날아올 거라 생각한 일본인 상인들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남아 있던 상인들도 시가지로 날아 들어온 화살이 폭발하며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고,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쇳덩어리가 건물을 종잇장처럼 찢어놓는 상황에는 더 버티지 못했다.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비싼 것만 챙겨서, 혹은 몸만이라도 살아서 나가려는 상인들이 건물 밖으로 죄다 뛰어나와 거리를 채웠고, 방어 중이던 시부카와 요시토시 휘하의 병력들까지 거기에 휘말리자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여기 더 있으면 다 타 죽는다! 밖으로 퇴각해라! 건물 위에 있는 놈들도 그대로 구워지기 싫으면 어떻게든 내려와라!"
하카타 방위를 맡았던 무사 대장 하나가 급하게 소리치며 뛰어다녔다.
"어차피 이렇게 불바다에 연기투성이로 만들면 적들도 상륙 못 한다! 아니, 상륙할 생각이 없으니 이렇게 했을 거다! 그러니 하카타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서 결집해라! 강을 건너면 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외칠 만큼 외쳤다 생각한 무사 대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남쪽으로 뛰어서, 하카타 시가지 남쪽 경계인 히에카와에 걸린 다리를 건너 계속 뛰었다.
"탄다이! 큰일입니다!"
한참을 달린 무사 대장이 숨을 몰아쉬며 해안에 있던 시부카와 요시토시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하카타에 연기가 계속 나던데 괜찮은 거냐?"
"오키노하마고 하카타 시가지고 다 난리가 났습니다. 조선군이 쏘는 불화살이 터지면서 불을 붙이는데, 물을 부어도 꺼지질 않습니다. 남아있던 상인들도 살겠다고 다들 뛰쳐나와서 지금 다들 빠져나와 재집결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하카타 쪽을 바라보던 요시토시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는 것을 본 무사 대장이 자기도 고개를 돌려 하카타 쪽을 보고는 똑같이 창백해졌다.
하카타 시가지에 지어졌던 높은 망루가 불길에 휩싸여 천천히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적들의 배에서 천둥소리가 나는 것까지는 들었지만 위력이 저 정도란 말이냐?"
대포의 위력을 방금 처음 본 듯한 요시토시의 반응에 무사 대장이 물었다.
"배가 여기에는 대포를 안 쐈습니까?"
"그래. 저길 봐라. 레이센만에 들어오고서부터 저렇다."
요시토시의 손짓에 바다를 보았다. 일본 활이 닿지 않을 정도 거리를 두고 천천히 움직이는 조선군 배들은 포를 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까 치쿠젠 슈고가 말한 대로 우리를 붙잡아 둘 생각이다. 아니, 붙잡는 것도 아니고 그냥 대놓고 시간을 끌고 있질 않느냐."
"적들은 오키노하마에 근접하자마자 불화살을 쐈습니다. 바로 화공을 시작한 걸 보면 처음부터 상륙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병력을 빼 버리면 상륙할 기회를 진짜로 주는 게 될 수도 있다."
요시토시와 무사 대장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는데 다급하게 몰아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탄다이! 탄다이 계십니까!"
검은 마름모 네 개, 즉 쇼니 가문의 깃발을 등에 달고 있는 전령이 요시토시가 있는 곳까지 다가오며 외쳤다.
"무슨 일이냐?"
"상황이 급해졌으니 최소한의 방어병력만 남기고 빨리 와 달라는 급보입니다."
"대체 무슨……. 아니다. 이유가 있으니 급히 불렀겠지. 그럼 어차피 하카타는 적도 아군도 못 들어가니 비우고 병력 일부만 해안에 남기고 가겠다. 너에게 맡기겠다."
"예, 어차피 멀리서 보면 다쳤는지 구분도 안 갈 테니 하카타에서 퇴각한 병력들을 해안에 두면 됩니다. 그만큼의 병력을 더 데리고 가십시오."
"그러면 되겠구나. 고맙다. 그럼 지금 석축에 올라가 있는 자들은 계속 남아서 방어하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라! 가자!"
요시토시가 지시하고 말 머리를 돌려 이동하려는 순간, 조선군 대장선에서 쏜 화살이 날아와 해안 높은 곳에서 터졌다.
화려한 노란 불꽃이 크게 한 번 터지고, 작은 불꽃들이 또 터지며 대낮에도 보일 만큼 멀리 퍼졌다.
"괜찮아! 겁먹지 마라!"
"진정해라, 진정해. 워워, 으억!"
처음 접해보는 불꽃놀이의 요란한 불꽃과 폭음에 병사들이 놀라 주저앉았다. 말들도 놀라 난동을 부리고, 말이 지나치게 흥분한 몇몇은 말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
"자 다들 정신 차려라! 빨리 이동해야 한다 말이다!"
겨우 낙마하지 않고 버틴 요시토시가 조선군 함대를 악에 받친 얼굴로 노려보며 외쳤다.
* * *
같은 시각.
조선군 대장선.
"역시 언제 보아도 화려하고 대단하군."
망루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양녕이 감탄했다.
조선의 화약 기술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화약으로 만드는 불꽃놀이도 마찬가지여서, 화약 종주국인 명나라에서 온 사신들도 불꽃놀이를 보면 감탄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명나라가 조선의 화력을 경계해서 견제하려 들거나 기술을 빼 가려 시도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와 사신에게 불꽃놀이 보여 주는 것을 줄였을 정도였다.
"충분히 멀어졌으니 사격 중지! 이대로 상륙지점에 갈 때까지 화력을 아껴라! 그동안 각자 무기 점검해두도록!"
한 차례의 전투가 끝나고 잠시 숨을 돌린 이종무가 양녕 근처로 왔다.
"냉천만에 들어왔으니 이제 큰 전투가 더 가까워졌구려. 잘 풀려야 할 텐데."
"잘 풀릴 것입니다. 적이 완전히 우리 예상대로 움직이게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완전히 예상 밖의 행동을 하는 것은 막지 않았습니까."
양녕의 말에 이종무가 답했다. 실제로 조선군은 원나라와 고려가 일본에 상륙하던 당시와 유사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큐슈 방어세력이 볼 수 있게 움직였다. 적군도 그 당시 상황과 전투를 염두에 두고 움직일 수밖에 없게 수를 좁혀 버린 것이다.
"정동군단장 말이 맞소. 그래도 우리가 적의 수를 좁혀 놓은 그 안에서는 뭐가 나올지 모르고, 가능성은 적어도 좁혀놓은 수를 벗어날 수도 있지 않겠소. 적이 우리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으니 말이오."
"맞습니다. 상대의 열 가지 수를 모두 계산하고 싸워도 열한 번째 수가 터져 나오는 것이 전쟁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우는 것이 가장 어렵고, 그걸 성공하는 이가 명장인 것이겠지요. 저희가 명장이라 자부할 수는 없지만, 대군께서 만드신 무기가 신묘하고 또 정동군의 병사들이 하나같이 용맹하니 반드시 승리로 이끌겠습니다. 대군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고맙소.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군."
근심이 조금 줄어든 양녕이 분위기를 바꿀 겸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대장선이 향해가는 상륙 목표지를 보았다.
"상륙 목표지에 거의 도착하면 해안에 근접하기 전에 멀리서도 보이도록 노란색 불꽃놀이를 쏘아야 하는 것을 잊지 마시오."
"예. 아까와 마찬가지로 적이 신호인지 놀라게 하려는 공격인지 분간하지 못하도록 되도록 적진 위쪽에서 터지게 하겠습니다."
양녕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선이 불꽃놀이를 터뜨리는 것은 해안에 접근했다는 신호였다.
서쪽에 상륙해서 동진한 부대가 이 신호를 보면 자신들도 거의 다 도착했을 때 불꽃을 쏘고, 그것을 신호로 배에서 포격을 개시할 계획이었다. 해안의 적은 배에서 쏘는 포격을 상대하면서 내륙에서 오는 적도 양면으로 방어해야 할 것이었다.
* * *
잠시 뒤.
나카가와 하류.
큐슈 내륙에서 북쪽으로 흘러간 나카가와가 레이센만하고 만나는 하류의 강변.
놀란 말과 병사들을 수습해 끌고 온 요시토시가 여기 도착해 처음으로 본 것은 쇼니 가문의 마름모 문장 깃발이 잔뜩 늘어선 모습이었다. 병력만 잔뜩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목책을 강변에 설치하고 있었다.
"오셨소."
근심 어린 표정의 쇼니 미츠사다가 다가왔다.
"나카가와 서쪽으로 레이센만 해안을 방어하러 가신 것 아니었소? 병력들 대다수가 여기 그대로 있는 데다가, 갑자기 방어준비를 하시다니 대체 무슨 일이오?"
"해안 방어병력은 있소. 우리 예상이 틀어져서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다 여기로 모았을 뿐이오."
질문에 대답하는 미츠사다의 말투에서 심상찮음을 느낀 요시토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오?"
"조선군 상황을 살피러 척후를 보냈소. 돌아와서 말하기를, 상륙하려던 지역 해안에 방어병력이 없는 걸 확인한 조선군이 해안에 내려서 걸어오는 대신 쿠사가에만에 들어와서 바로 내렸다 하오."
요시토시는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쿠사가에만은 레이센만에서 고작 곶 하나 옆에 있는 만이었다. 원나라와 고려가 상륙했던 지역보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가까운 자리에 내렸을 뿐만 아니라, 지금 미츠사다가 방어선을 펼치는 나카가와까지 오는 동안 큰 강은 고사하고 장애물도 되지 못할 작은 하천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해안에 방어가 없으면 적이 가까운 만에 들어와서 내려 버릴 수 있다는 걸 간과했소. 나라도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 생각을 못 했으니, 원구를 막아 냈던 선조들을 뵐 면목이 없소."
맨 처음 작전을 제안한 요시토시를 책망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이 덤덤히 말한 미츠사다가 옆에서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