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20화
20화
잠시 뒤.
군막 안.
"조금 전 했던 이야기를 이어서 하겠소. 이번 원정에서는 적 수급을 공적의 기준으로 쓰지 않으려 하오. 공적은 얼마나 전쟁에 기여했는지, 개인의 무훈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만 가지고 평가할 것이오. 수급을 아예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적장이나 중요한 인물들의 수급은 확인용으로는 쓸 것이외다. 공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양녕의 말에 정동군단장 이종무가 대답했다.
"수급으로 공적을 따지는 폐해가 크니 바꾸는 것은 지극히 옳은 것이지만, 전쟁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하는 것은 추상적이라 계산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다른 문제점들도 당연히 있을 것이오. 하지만 이번 원정은 그런 것들을 시험해 보고 문제점을 찾아 고칠 기회가 아니겠소. 군공을 세우고 포상하는 제도를 평시에 시험해 볼 수는 없으니 말이오. 정동군단장께서는 이런 의도도 포함해서 다른 사단장들에게도 전파해 주시고, 조정에 올릴 보고도 정리해 주시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응적제승도 도입되어서 각 부대가 저마다 작전 목표를 받으니 그 달성 여부로 상을 주면 어떻겠습니까? 부대 단위로 상을 준다면 부대마다 단결도 잘 될 것입니다. 또 개인이 특출 난 공을 세운 경우는 부대장이나 병사들에게 제보를 받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오. 그리하시오."
이종무의 제안을 승낙한 양녕이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그럼 내가 여기 온 본론으로 넘어가겠소이다. 지금 바다를 건너 전쟁하는 만큼 조선 본토, 대마도, 일기도, 구주도를 이을 항로와 보급선이 매우 중요한데, 이는 결국 수군이 유지해야 하는 것이오. 따라서 수군여단장인 박초 공에게 대마도와 일기도의 병력주둔, 요새화, 방위를 맡기겠소."
"명을 받들겠습니다, 대군."
"또한 군사업무에 더해서 대마진과 일기진의 지사 대리도 맡기겠소. 지사 업무는 군사 분야가 아니니 보고와 문의는 나에게 직접 하되, 좌군사단장과 정동군단장에게도 통보하시오."
"이리도 중책을 믿고 맡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기대에 부응하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마도와 일기도의 군사, 행정 업무를 맡게 된 박초가 고개를 숙여 양녕에게 인사했다.
인사를 받은 양녕은 이어서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 기왕 이렇게 모인 김에 지사 업무 지시와 작전 지시도 같이 하겠소. 지금 일기도 각지에서 작전 중이라 부재중인 사단장들에게는 정동군단장께서 전파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먼저 작전 지시를 하겠소. 해안을 전부 확보한 다음, 출정을 위한 모든 정비를 오늘 내로 끝내야 하오. 섬 내부에 갇힌 적들을 소탕할 소수 병력만 남겨 두고 내일 해가 뜨는 대로 바로 구주도에 상륙할 것이오. 가능하겠소?"
"내일 상륙을 해야만 아군 피해가 더 적지 않겠습니까. 할 수 있나 할 수 없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니 반드시 오늘 내로 끝내겠습니다. 자신들의 목숨도 걸린 일이니 병사들도 따라 줄 것입니다."
이종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양녕이 이번에는 박초에게 말했다.
"과거 원나라와 고려가 일본을 공격했을 때는 일본이 수군으로 우회해서 일기도를 탈환해 후방을 끊은 적이 있었소. 이번에도 적들이 그것을 노릴 수 있으니, 남겨지는 병력들은 섬을 제압하면서 요새화도 같이 해야 함을 명심하시오."
"알겠습니다, 대군. 일기도는 대마도에 비하면 한참 작고 산세도 험하지 않은 섬이고, 주 병력도 상륙전 때 다 소멸했으니, 제압은 금방 될 것입니다."
"좋소. 그럼 다음으로 지사 업무 지시를 하겠소. 대마도는 하던 대로 화전과 간척을 계속 진행하시오. 조선 본토 산간에서 살던 이들이라 겨울 추위 걱정은 크게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대비를 잘하게 하시오. 무너뜨릴 계획이 있는 비탈의 나무들을 싹 베어다 땔감으로도 쓰고 집과 요새를 짓는 데에도 쓰면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일기도에서는 과거 왜가 삼한을 정복했다느니 하는 허황된 소리를 늘어놓는 사당과 사찰은 모조리 헐어 주춧돌은 뽑아 바다에 던져 버리고, 값나가는 기물들과 구리로 된 것들은 조정으로 보내시오. 섬 곳곳을 뒤져 원나라와 고려에 대항해 싸우다 죽은 이들을 기념한 것들을 찾아내시오. 세운 것은 무너뜨리고, 새긴 것은 깎아 버리고, 적은 것을 태워 버리시오. 섬 깊은 곳에 아마 그 당시 쓰인 성곽의 터가 있을 것이니, 그 돌들은 모두 뽑아 요새를 만드는 데에 써 버리시오."
덤덤한 말투로 삭막한 지시를 하는 양녕이었지만, 대마도의 사당에 내린 처분에서 범위가 커진 정도였기에 박초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또 주민들은 모두 붙잡아 조선으로 압송하시오. 가산은 모두 몰수해서 필요한 데에 쓰시오. 비축해둔 곡식과 아직 수확하지 않은 논밭의 작물들은 군량으로 삼으면 되겠군. 이 과정에서 저항하는 자는 베어도 좋소."
"모든 주민이 대상입니까?"
박초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맞소. 왜 그리 표정이 굳으셨소이까. 대마도에서 한 것과 똑같이 하는 것뿐이오."
양녕은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대마도는 모든 주민이 해적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리 한 것 아닙니까. 여기 일기도는 농토가 많아 다수가 농민과 어민이고, 그나마 있던 해적들도 상륙전에서 거의 다 죽었습니다. 게다가 여기를 초토화해버리면 정착할 백성을 또 조선에서 데려와야 합니다."
"여기에 무고한 이는 없소."
어떻게든 설득하려던 박초의 말을 양녕이 딱 끊었다.
"공께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고 있소. 조선에 끌려가면 사내들은 왜구로 간주되어 참수된 다음 명나라에 수급이 보내지겠지. 참수를 면하더라도 아녀자들이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각지로 흩어져 노비가 될 것이오. 그러나 그중에 무고한 자는 없소."
양녕은 탁자 위에 올려진, 수급이 담긴 상자 위에 손을 턱 올리고 말을 이었다.
"해적과 그 식솔들은 당연히 죄가 있소. 그러나 다른 주민들도 해적질에 대한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오. 돈 될 것은 하나도 없이 무기만 챙겨 들고 배를 타고 나가서 온갖 재물이며 사람을 끌고 오는데, 그걸 교역해서 사 온다 생각할 수는 없을 것 아니오? 주민들도 남을 고통스럽게 하고 죽여 가며 얻은 피 묻은 이익임을 알면서 나눠 먹은 이들이오. 그 값을 치러 마땅하지."
옆에서 듣던 이종무도 나섰다.
"몇 년 전에 두만강 쪽 여진족들이 자꾸 국경을 넘어 조선 백성들을 약탈하는 일이 있었네. 병사들을 보내 약탈하러 온 놈들을 오는 족족 격파해보아도 별 효과가 없었어. 대병력을 보내 여진족 마을들을 철저히 파괴하고 몰살하고, 결국 그 수장인 동맹가첩목아가 서쪽으로 도망치듯 이주하면서 겨우 두만강 일대가 평화로워졌어. 약탈이 이익이 된다는 걸 알아 버린 놈들은 절대로 반성하지 않으니 없애는 것이 답일세."
"군단장의 말이 맞소. 윗마을 농부는 왜구의 군량을 대고, 아랫마을 어부는 왜구의 배를 만든 것이오. 게다가 원나라와 고려군에게 초토화된 역사가 있어 우리에게 원한도 깊겠지. 그런 이들을 중요한 군사적 교두보인 이곳에 그냥 둘 수는 없소. 대신 수군여단장께서 그리 마음에 걸려 하시니 방침을 조금 바꾸겠소."
양녕의 말에 장수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수색할 때 약탈품이나 노예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은 집이 있다면 그 집은 일반 백성으로 대우하시오. 그 집은 노비가 되지도 않고, 재산을 빼앗기지도 않고 다만 조선으로 이주될 뿐이오. 다만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약탈품을 숨기거나 버리는 이가 나올 테니 주민들은 모르게 진행하시오."
"알겠습니다, 대군."
"대신."
조금 안도한 표정을 지은 박초에게 양녕이 덧붙였다.
"이것은 오랑캐들에게도 인정을 베풀고자 하는 공의 마음을 위하여 적용하는 것이오. 도중에 마음이 바뀌면 내가 맨 처음 지시한 대로 하여도 좋소."
첨언하는 양녕을 향해 이종무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 * *
같은 날. 늦은 오후.
임시 지휘소.
바로 다음 날로 다가온 상륙전 준비를 하기 위해 양녕을 비롯한 장수들이 모두 모여 작전을 짜고 있었다.
"이것이 종정성이 협조해서 만든 이번 상륙지역의 지도요."
양녕이 탁자 위에 상륙지역 일대(현 후쿠오카)의 지도를 펼치고, 막대를 꺼내 들었다.
"우선 바다가 북쪽이고 땅이 남쪽이오. 해안은 내륙 방향으로 휘어져 만을 이루고 있소. 즉 우리는 북에서 남을 향해 상륙할 것이오. 해안에는 원나라와 고려가 일본을 쳤을 때 일본에서 방어용으로 쌓은 석벽이 있었는데, 종정성의 말로는 그 이후로 관리가 안 되었는지 지금은 구실을 못 한다고 하오."
양녕이 막대 끝으로 해안선을 따라가며 설명했다. 대규모 간척을 거쳐 면적도 넓어지고 해안선도 가지런해지기 이전인 탓에 해안선도 복잡하고 내륙으로 들어가 있었다.
"여기 해안 중앙에서 동쪽의 해안에 살짝 튀어나와 있는 이곳이 박다(하카타), 혹은 패가대라 하는 곳이오. 교역의 중심지라 여러 건물들로 시가지를 이루고 있소. 여기 해안에는 시가지 보호를 위해 제방이 잘 쌓여 있다고 하오."
양녕이 막대를 들어 패가대의 동쪽을 짚었다.
"패가대 동쪽에는 거기(하코자키)포라는 곳인데, 모래사장이 있고 소나무숲이 우거져있소."
이번에는 패가대의 서쪽 만을 짚었다.
"패가대 서쪽에는 냉천(레이센)만이라는 만이 있소, 냉천만은 서에서 동으로 곶이 뻗어 나와 입구를 막은 탓에 입구는 좁고 안은 넓소. 그 서쪽으로는 만과 곶이 번갈아 가며 이어지오. 지도 설명은 이 정도요. 제장들께서는 어찌하시는 게 좋다 생각하시오?"
양녕은 막대를 내려놓으며 물어보았다. 대마도와 일기도에 상륙할 때는 신무기가 중심이니 양녕이 지시를 많이 했지만, 전장이 더 커지면 더 잘 아는 무장들에게 맡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여기 냉천만 안쪽 해안은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중군사단장 최윤덕이 양녕에게 질문했다. 양녕이 막대를 다시 들고 설명한다.
"냉천만의 좁은 입구로 들어가서 패가대 남쪽에 흐르는 이것이 비혜강(히에카와)이오. 강 건너 남서쪽에서 바다로 튀어나온 곶에 주길(스미요시)궁이라 하는 사당이 있고, 그 서쪽에 바로 나가강(나카가와)가 흐르고 강 서쪽으로는 평지가 있소."
"패가대는 제방이 있으니 상륙하기도 힘들고, 시가지면 좁은 길목에서 싸워야 하니 근접전에 능한 일본이 유리해집니다. 그렇다고 우회해서 상륙하자니 동쪽의 거기포는 소나무 숲이 막고 있고, 서쪽의 냉천만은 포위된 지형이니 들어가기도 위험하고 설령 들어간다 쳐도 상륙할 만한 곳이 없군요."
양녕의 설명에 최윤덕이 막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소. 서쪽 평지에 상륙한다 해도 패가대로 가려면 하천을 둘이나 건너야 하는 데다가, 주길궁이 있는 곶이 시야를 가리고 있소. 왜인들은 사당 주변에 나무를 무성히 심으니 매복의 위험도 있소."
"원나라가 공격했을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원나라는 일단 그때 상륙은 성공했으니 참고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어진 이종무의 질문에 양녕은 막대로 지도가 아닌 탁자 한 곳을 짚었다. 지도의 서쪽 바깥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이쯤 떨어진 곳에 상륙해서 패가대까지 주파해서 밀고 들어갔소."
"흠……. 몽골인들이나 가능하지 저희는 못 하겠군요."
원나라 기병이니까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상상 이상의 전술에 이종무가 한숨을 쉬었다.
"대군, 원나라 군대가 상륙까지 성공해 놓고 결국 패배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말없이 가만히 지도를 들여다보던 1기병여단장 우박이 불쑥 물었다.
"당시 원나라와 고려는 두 번의 원정 모두 거점을 땅 위에 만들지 않고, 패가대 앞바다에 띄운 함대를 거점으로 삼았소. 그러다가 하필 두 원정 모두 태풍이 불어 함대가 박살 나면서 엄청난 타격을 받고 패배했소. 일본인들은 이 태풍을 자신들을 지키러 신이 보내준 것이라 하여 신의 바람(카미카제)이라 부른다더군."
"그렇다면 원나라와 고려는 일본 태풍과 싸워서는 졌을지언정 일본 병력과 싸워서는 진 것이 아니로군요."
"듣고 보니 그렇군. 공의 말대로요."
"저에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기병 중심인 북방의 절제사와 남방의 수군도절제사를 모두 지내 본 우박이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