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19화
19화
대열 앞으로 나온 왜구 대장이 뒤로 돌아섰다. 이윽고 수평선 너머로 선체까지 드러내기 시작한 조선군 함대를 등지고 부하들을 바라본다.
부하라고는 해도 진짜로 싸울 줄 아는 이들은 갑옷을 입은 소수에 불과하다. 땅이 척박한 탓에 모든 사내가 해적질을 하며 단련된 대마도와 다르게, 농지가 제법 있는 일기도는 모두가 싸울 필요가 없었다. 역설적으로 농지가 많아 인구가 많은데도 싸울 사람은 더 적은 것이다.
"방패를 든 너희들 대부분은 무기라고는 잡아본 적도 없고, 농사나 짓고 고기나 잡던 이들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여기 말고 다른 해안을 지키고 있을 방패병들도 똑같지!"
왜구 대장이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연설을 시작했다.
"백 년도 더 전에 몽골이 고려와 함께 이키섬을 유린하러 왔을 때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지만 결국 큐슈의 원군이 와서 섬을 되찾지 않았는가! 섬을 막았던 타이라노 카게타카 공과 섬을 되찾은 쇼니 스케토키 공처럼 나 또한 이키의 슈고다이(태수 대리)다. 그리고 그 두 분처럼 싸우다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
연설을 잠시 멈추고 슬쩍 둘러본다. 갑옷을 차려입은 이들은 눈을 빛내고 있지만, 정작 사기를 올려야하는 대상인 농민이나 어민 출신 방패병들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하치만 대보살, 즉 하치만신을 모시는 신사가 섬 곳곳에 있는 것은 너희도 알 것이다! 너희는 하치만신을 어부들을 지켜주는 신으로만 여기지만 사실 하치만 대보살께서는 원래 무사들을 수호하시는 신이다!"
익숙한 신앙 이야기로 넘어가자 방패병들이 귀를 기울인다.
"또한 하치만신은 먼 옛날 배를 타고 삼한을 정복하셨다는 진구황후의 아드님이시다! 삼한이 지금의 고려이니 저 고려인들을 맞서 싸우는 우리에게 하치만신께서 가호를 내리실 것이다! 자! 하치만신께 들리도록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맞서 싸울 준비를 하자!"
"와아아아아!"
조금 전 왜구 대장과 이야기했던 무사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나서서 크게 소리를 지른다. 그 분위기에 이끌려 방패병들도 하나둘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왜구 대장의 등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한 무사의 크게 벌린 입안으로 날아들었다.
"방패 제대로 잡아!"
입에서 피를 토하며 뒤로 천천히 쓰러지는 무사를 멍하니 바라보던 방패병들에게 왜구 대장이 큰소리로 외치며 방패 벽 뒤로 뛰어 들어갔다.
"내가 얘기를 좀 길게 했다고는 해도 아직 배가 저 멀리 있는데, 고려인들의 화살은 여기까지 닿는단 말이냐?"
몸을 숙이고 방패 너머로 바다를 살피며 말했다. 눈앞에서 무사가 죽는 광경을 본 방패병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두 손으로 방패를 꽉 붙잡고 덜덜 떨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부하들도 겁은 먹지 않았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 화살에 맞은 건 운이 없어서 그렇다! 이 거리면 화살이 날아와도 큰 힘이 없으니 방패는 절대로 못 뚫어! 방패 단단히들 잡고 대기해라!"
어떻게든 사기를 끌어 올리려 노력하는 왜구 대장의 눈에, 저 멀리서 연기가 나는 무언가를 달고 날아오는 화살 하나가 보였다.
* * *
같은 시각.
츠츠키 앞 해상, 정동군 대장선.
"인화살 적진 앞에서 폭발 확인! 일기도까지 거리는 곧 200보에 돌입!"
대장선 망루에서 측거의로 해안까지의 거리를 재던 병사가 외쳤다.
"역시 250보에서 쏘면 인화살을 머리 위에서 터뜨리기는 어렵군. 다음은 200보에서 쏴야겠소."
양녕의 말을 들은 이종무가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외쳐 지시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화살 받은 궁수들은 200보에서 다음 인화살 쏘고 대기하라! 나머지는 계속 준비하고 있어라!"
강선을 판 조총은 유효 사거리가 조선의 군용 활인 각궁만큼 나오지만, 선두에서 전진 중인 대장선에는 궁수가 대다수였고 포수는 몇 없었다. 그나마 그 궁수들도 대다수가 대기하고 있고, 활 솜씨가 뛰어난 몇 명만이 인화살을 두 개씩 받아 250보에서 한 발씩 쏘았을 뿐이었다.
일기도의 병력들은 숫자도 적고, 갑옷을 제대로 입은 이들도 얼마 없다. 굳이 조총으로 잡을 필요 없이 최대한 화살로 잡는 쪽이 화약도 아낄 수 있고, 멀쩡한 화살은 상륙 후에 다시 뽑아서 쓸 수도 있다.
"200보 돌입!"
"인화살 발사!"
이종무가 호령한다. 인화살 궁수 옆에서 대기하던 보조 병사들이 시위에 메겨진 인화살 심지에 불을 붙여 주자, 인화살들이 하얀 꼬리를 이끌며 허공을 가른다.
"인화살 적 머리 위에서 폭발!"
"좋아! 인화살 궁수들은 인화살 다 쏘는 대로 일반 화살로 바꿔들어라! 포수들은 마지막으로 화승 상태 확인해!"
갑옷 입은 적들을 상대할 목적으로 강선 조총을 받은, 사격 솜씨 좋은 포수 십여 명이 일제히 화승을 점검한다.
"150보 돌입!"
"전 궁수들 사격 준비!"
이종무의 지시에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시위에 메겨 잡아당기는 모습을 보던 양녕은 침을 삼켰다. 인화살은 머리 위까지만 날아가서 터지면 되니 최대 사거리에서 쏘면 되지만, 일반 화살은 맞춰야 하니 유효 사거리까지 접근해야 한다.
조선 활의 유효 사거리는 해상에서 대략 100보. 100보에 돌입해 화살을 쏘고 나면 금세 해안에 도착할 것이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100보 돌입!"
"전 궁수 발사!"
곧 다가올 전투의 긴장을 떨치려 관측병은 악을 쓰듯 외치고, 그 긴장마저 눌러버릴 듯 이종무가 우렁찬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깃대에 노란 깃발이 올라가고 태평소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진다.
점점 좁혀져 가는 조선군 함대와 츠츠키우라 해안 사이의 하늘에 화살 비가 쏟아진다.
"이제 포수들도 사격을 개시해라! 초조해하지 말고 각자 알아서 침착하게 쏴라! 너희 목표는 갑옷 입은 놈들이다! 그중에서도 머리통에 크게 장식을 단 놈들이 장수니 가능하면 그놈들부터 노려라!"
* * *
같은 시각.
이키노쿠니, 츠츠키.
츠츠키우라 해안가는 난장판이었다.
첫 인화살이 방패 앞에서 터졌을 때는 방패병들도 그리 크게 동요하지 않았지만, 곧 다음 인화살이 머리 위에서 터져버렸다. 끄려고 해도 꺼지지 않고 살까지 태우는 불에 방패병들은 소란스러워졌고, 일반 화살까지 하나둘 날아와 옆의 동료들을 맞추기 시작하자 아예 혼란에 빠져버렸다.
"방패병들이 통제가 안 됩니다!"
"어차피 이놈들은 갑옷이 없어서 화살 맞으면 죽어! 우리가 앞으로 나가야 해!"
갑옷 입은 부하의 외침에 왜구 대장이 대답하며 칼을 뽑아 들고 방패 벽 앞으로 나간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몸을 숙이고 천천히 전진하는 왜구 대장 뒤로 다른 부하들도 무기를 고쳐 잡고 머뭇거리며 따라 나온다.
"나한테 저 안 꺼지는 불이 좀 튀긴 했지만 갑옷을 파고들지는 못하고 꺼졌다! 고려의 화살이 그 힘은 세도 우리 갑옷을 정면으로 뚫을 정도는 아니야! 고려인들은 활 솜씨가 뛰어나니 갑옷 틈새로 맞는 것만 조심해라!"
왜구 대장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침 날아온 화살이 어깨 갑옷에 맞았다. 왜구 대장이 휘청거릴 만큼의 위력이었지만 화살은 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봐! 안 뚫리잖아! 우리가 앞에서 막고 있는 걸 보면 방패병들도 좀 정신을 차릴 거다! 우리는 여기서 시간을 끌겠다! 너희 중 몇 명은 방패병들을 모아서 섬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티며 싸울 준비를 해라!"
"버티며 싸운다 해도 대장님이 오셔야 통솔이 됩니다!"
"알아! 나도 곧 갈 거다! 시간은 좀 더 끌 수 있어! 고려인들이 화포를 쏘려면 배가 더 가까이 와야 하니 지금은……."
소리치던 왜구 대장의 말을 끊은 것은 정확히 몸통으로 날아온 총알이었다. 총알은 갑옷을 뚫고 왜구 대장의 몸을 완전히 관통한 뒤, 등까지 뚫고 날아갔다. 그 뒤를 따라 뿜어지는 피보라.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던 왜구 대장은 눈을 부릅뜬 채로 뒤로 쓰러져 절명했다.
화살도 아니고 대포알도 아닌 정체 모를 것이 날아와 대장을 단숨에 죽이는 모습을 본 갑옷 입은 부하들의 눈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경악은 곧 갑옷을 입어도 안전하지 않다는 두려움이 되어 모두를 집어삼킨다.
지휘관까지 없어진 탓에 방패병들과 뒤섞여 공황에 빠져 버린 부하들을 향해 조선군 함대가 해안가로 다가오고 있었다.
* * *
잠시 뒤.
츠츠키우라 해변.
"대비를 하고 기다린 일기도 놈들이 어째 기습당했던 대마도보다 더 쉽게 상륙 당한 것 같습니다."
해변가 모래 위를 걸어가며 정동군단장 이종무가 말했다. 상륙이 거의 다 끝난 해안에는 널브러진 시체와 모래에 스며든 핏자국, 불타는 방패가 곳곳에 있었다.
"대마도는 상륙할 곳이 몇 없고 그나마도 좁은 공간이었소. 그런 곳에 상륙하려니 좁은 골목에서 싸우는 것과 같아서, 한쪽의 숫자가 많아도 한 번에 싸울 수 있는 숫자는 서로 비슷하니 숫자의 우세를 살릴 수 없지. 여기 일기도는 상륙할 곳이 많고 넓으니, 적은 그나마도 적은 병력을 더 흩어야 하고 우리는 숫자의 우세를 살릴 수 있는 것이지요."
이종무 옆에서 호위를 받으며 걸어가던 양녕이 대답했다.
"좁은 곳에서 싸우면 그렇겠군요. 이해했습니다. 그나저나 촌부들까지 끌어모아 방패를 들려주고 준비한 걸 보면 이미 구주도에도 연락이 갔겠습니다."
"어쩔 수 없소. 그저 구주도에서 최대한 준비를 못 했을 때 한시라도 일찍 칠 수 있게 서두르는 것이 최선일 것이오."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말을 잇는다.
"일단 이곳 일기도를 확실하게 확보해야 하오. 대마도는 조선에서 가까운 섬이었지만 여기는 대마도를 건너서 와야 하고, 구주도와 매우 가깝소. 마땅한 다른 항로가 없으니 보급로로도 유일하오. 원나라가 고려를 끌고 일본을 쳤을 때도 이 섬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여러 번 있었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오."
"아군이 공격하기 유리한 지형이었다는 얘기는 아군이 방어하기에는 어려운 지형이라는 것이겠지요. 구주도 상륙 이후에 보급선을 유지하려면 방비를 철저히 해야겠습니다."
"확실하게 중간기지화 하려면 주둔부대도 있어야 할 것이오. 중상자들은 어쩔 수 없이 남겨야 하고, 손상된 배들도 남겨서 수리하면서 방어나 물자 수송에 써야지. 대마도에서 한 것처럼 요새도 지어야 하고. 행정구역은 대마도처럼 진을 설치해서 일기진으로 삼아야겠소."
해야 할 일들을 말하며 한숨을 쉬는 양녕에게 이종무가 걱정스럽게 말한다.
"도원수의 일을 하시면서 두 곳의 지사까지 겸하시는 것은 너무 일이 많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오. 일을 좀 나누어야겠소. 서두릅시다."
양녕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잠시 뒤.
해안 안쪽.
막 설치된 임시 지휘소에 도착한 양녕과 이종무가 처음으로 본 것은 모랫바닥에 드러누운 시체였다. 피에 젖기는 했지만 제법 괜찮은 재질로 된 일본식 옷을 입고 있었고, 옆에는 중간이 터진 갑옷이 벗겨져 있었다.
"이자, 목은 어디 두고 온 모양인데."
"대군 오셨습니까. 이놈의 목은 저기 있습니다."
좌군사단장 유습이 양녕에게 다가오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양녕이 그쪽을 바라보자 병사 몇이 잘린 머리통을 닦아 상자에 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양녕은 문득 떠오른 것을 말했다.
"수급으로 공을 세는 것은 단점이 많지 않소? 싸우는 와중에 적의 수급을 자르려 들어 산만하게 되고, 싸우고 나서 목을 닦고 수레에 담느라 시간과 운송수단을 낭비하게 되고, 공에 눈이 멀어 아군과 백성의 목을 노리는 이들도 생길 수 있소."
"역사가 오랜 폐단들이지요. 사실 그래서 지금 적장 목은 벴지만 잡졸들 목은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양녕의 말에 유습이 대답했다.
"적장의 수급은 필요가 있으니 취하는 것이 맞소. 그럼 마침 말이 나온 김에 수급에 관한 것도 같이 논하도록 하겠소. 수군여단장을 불러주시고 좌군사단장께서도 들어오시오. 임시 회의를 시작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