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18화
18화
1419년 10월 초순 모일.
대마진, 여량면 관아 겸 정동군 지휘소.
지휘소 한쪽에 펴놓았던 평상에 누워 있던 양녕은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빨리 움직이기 위해 새벽부터 배를 탄 탓인지 멀미 기운이 아직 남아 있었다.
"조금 더 쉬시지요, 대군. 물자들은 미리미리 도착해서 이미 배분해두었습니다. 안 계신 동안에 병사들 사격훈련도 했고, 가기 전에 알려주셨던 제식훈련이라는 것도 수시로 해뒀습니다. 가장 최근 소식과 자료들도 한성부에서 바로 파발로 보내주어서 이미 장수들은 다 읽었습니다."
양녕이 깬 것을 보고 다가온 이종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계급하고 편제를 개편한 건 군사 분야라 자세한 자료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오. 내가 자세한 내용을 가져왔고, 지금 좀 몸 상태가 괜찮아진 동안에 설명하고자 하니 장수들을 모아주시오."
"알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모아오겠습니다."
이종무가 장수들을 부르러 간 사이 양녕이 탁자 위에 서류함을 꺼내 놓았다.
잠시 뒤, 지휘소에 모인 장수들이 탁자 주변에 빙 둘러섰다.
"자, 이게 이번에 시험 삼아 적용해 볼 계급과 부대 체계요."
양녕이 서류함에서 첫 종이를 꺼내 탁자에 펼쳤다.
"원수라는 계급이 가장 위에 있고 그 아래에 대장, 부장, 참장이 있소. 이 넷은 기존 무관 품계에서 장군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던 정3품부터 종4품까지 네 품계에 대응되오. 원수계급을 제외하고 대장, 부장, 참장이 맡는 부대의 명칭은 각 군단, 사단, 여단이오."
"군, 사, 여라 하면 주나라에서 쓰던 부대 단위로군요."
"그렇소. 그 아래로 정령, 부령, 정위, 참위가 있소. 이 넷은 마찬가지로 교위라는 글자가 들어가던 네 품계에 대응되오. 맡는 부대는 순서대로 연대, 대대, 중대, 소대요. 중대를 기준으로 삼아 큰 것이 대대, 대대를 이은 것이니 연대라 하였고, 중대보다 작은 것을 소대, 소대를 나눈 것이니 분대라 하였소. 이상 여덟 계급이 군관(장교)이오."
양녕은 거기까지 설명하고 장수들을 보았다. 조선군이 기존에 사용하던 부대 단위의 명칭을 바꾼 정도이고, 기존 품계에 대응되게 조절한 덕분에 어색함이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장교(부사관)라는 명칭을 군교라 고친 것이 정교, 부교, 참교이오. 이 셋은 정이나 종을 따지지 않고 7, 8, 9품에 대응되오. 위에서 말한 분대는 이 군교들이 맡을 것이오."
"기존 품계에서 부위라는 글자가 들어가던 품계에 해당하는군요. 그럼 이 군교 계급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아닙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소. 병사들 가운데 경험이 많은 자를 뽑아서 임명한다는 제도를 확실하게 정리한 정도가 달라진 점이라 하겠지."
"그런데 정동군에 이걸 다 적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옆에서 종이를 보던 최윤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설마. 이건 조정에서 검토하시라 상왕 전하께 드린 것과 같은 것이오. 조선의 모든 군대에 적용하면 몰라도 우리가 쓰기에는 너무 크지. 이번 동정군에서 사용할 것은 조금 간략하게 한 이것이오."
그렇게 대답하며 탁자 위에 다른 종이를 펼치고 막대로 짚어가며 설명을 시작한다.
"제일 위에 총책임자인 나 양녕이 원수계급으로 임시직인 정동군 도원수. 그 아래에 삼군 도체찰사 이종무 공이 대장계급으로 정동군단장이 되고, 정동군단 아래에 중군, 좌군, 우군을 사단으로 개편해서 배속시킬 것이오."
"그럼 제가 이제 우군 도절제사가 아니라 우군사단장이 되는군요."
이지실의 말에 양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각 도절제사가 거느리던 절제사들은 참장계급으로 여단장이 될 것이오. 여단들은 병과 별로 숫자를 붙이고, 천자문의 글자를 둘씩 붙여서 구분할 것이오. 우선 우박 공이 중군사단 소속 1기병여단장이오. 천자문으로는 천지에 해당하오."
중간을 건너뛰고 조직도에서 좌군사단 쪽을 짚는다.
"수군을 지휘했던 경험이 있는 박초 공이 1수군여단장이오. 천자문으로는 홍황에 해당하오. 나머지 다섯 명은 보병여단을 하나씩 맡게 될 것이오."
정말로 큰 전쟁이 시작한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하는지 장수들이 누구라 할 것 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가라앉는 분위기를 본 양녕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공들께서는 처음엔 대마도 정벌로 알고 따라오셨는데 갑자기 판이 점점 커져서 큰일이겠소."
"큰일일 리가요. 해적들만 잡고 끝나나 했는데 큰 공을 세울 큰 기회가 생겨서 내색은 안 해도 신난 상태입니다."
재치 있게 받아낸 이종무의 농담에 좌중에 가볍게 웃음이 퍼지고, 굳어 있던 표정들이 조금 펴진다.
"이런. 나만 신난 게 아니었나 보군. 그럼 어디 큰 공을 세울 계획을 짜 봅시다."
양녕도 가볍게 농을 던지며 다음 자료들을 꺼냈다.
"이건 상륙 예정지인 박다(하카타) 일대의 지도고, 이건 구주도 각 지역의 태수들이 거느린 병력들에 관한 자료요."
"상륙 예정지의 자료와 적 병력의 자료를 도대체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이종무가 당황해서 묻는다.
"종정성(소 사다모리)이 협조했소. 병력은 각 태수끼리도 알려주지 않는 자료라 추측이 많아 참고만 되겠지만, 박다 일대에는 직접 와본 적 있다고 했으니 지도는 제법 정확할 것이오."
"종정성이 순순히 협조를 했단 말입니까? 영지를 다 빼앗기고 죄인 신분으로 한성으로 압송당한 자가 아닙니까?"
설명을 듣고 더 당황한 이종무에게 양녕은 풀어서 이야기해 주었다.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이 사실 주리를 틀고 매질을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괴롭소. 하지만 종정성은 그걸 모르니, 매질 한 번도 당하지 않았는데 별것도 아닌 거로 굴복해서 적장이 시킨 대로 허위 자백했다 생각하겠지. 자신이 쉽게 굴복했다는 괴로운 사실은 없앨 수 없으니, 대시 굴복한 게 아니라 자신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조선의 뜻을 옳다고 여겨 개심한 것이라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이오. 어쩌면 허위로 자백한 내용도 진실이라 믿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지금의 태도만이 아니라 과거에 자신이 했던 행동의 이유마저 바꾸게 만든단 것이군요.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종무를 잡아 기둥에 묶고 재우지 말라 하셨을 때부터는 대군께서는 지금 이 상황까지 내다보신 게로군요."
이종무가 무시무시한 것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최윤덕은 양녕을 대단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보았다.
"뭐 그렇소. 그럼 설명은 일단락되었소. 제장들께서는 각자 부대를 편성하시오. 보병여단 하나는 대대 둘로, 대대 하나는 중대 넷으로 구성하면 적당할 것 같소. 또 군관은 기존에 작은 것이라도 품계를 받은 이들 중에서 능력에 따라 임명하고, 군교는 병사들 중에서 경험 많은 자를 뽑아 임명하면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임명한 다음 계급과 편제, 이번 원정의 방향 같은 것들을 가르치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며칠은 걸릴 것 같은데, 멀미한 병사들도 쉬게 할 겸 해서 교육이 다 끝난 다음 출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종무의 제안에 양녕이 끄덕였다.
"그럽시다. 바람 상황도 본 다음 떠날 날을 잡아야 할 테니 굳이 서두를 것 없겠지. 10월 중순을 넘기기 전에만 공격을 시작하면 될 것이오."
"10월 중순인 이유가 있습니까?"
"구주도의 쌀 수확기가 10월 중순이오. 수확 전에 슬슬 군량이 부족할 시기지. 일본은 군역의 제도가 없어 농민들은 싸우는 법을 모르고 무사들만 싸우긴 하지만, 혹여 농민을 동원하고 싶더라도 농민을 동원하면 수확기에 군량을 거둘 사람이 줄어 문제가 생기니 농민 동원이 불가능한 시기인 것이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서 편성과 임명, 교육을 하겠습니다. 대군께서도 멀미하신 게 아직 좀 남으신 것 같으니 푹 쉬십시오."
"고맙소, 군단장. 그럼 난 좀 쉬겠소."
장수들이 인사하고 떠나가고, 양녕은 다시 평상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대마도 상황을 들었어야 하는데 깜빡했구만."
문득 잊은 것이 기억난 양녕에게 옆에 있던 종사관이 괜찮다는 듯 대답했다.
"그만큼 별일 없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선 푹 쉬시고 하셔도 됩니다."
"고맙네, 종사관. 그럼 눈 좀 붙이겠네."
양녕은 종사관 곽존중의 말에 안심하고 평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대군. 일어나십시오."
한참 뒤, 곽존중이 부르는 소리에 양녕이 눈을 떴다.
"얼마 안 잔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좀 지났나 보군."
"시간은 얼마 안 지났습니다만, 일이 좀 생겨서 일어나시라 한 것입니다."
"일이라니?"
그 말에 몸을 일으킨 양녕이 방 안을 둘러보자 군단장 이종무와 세 사단장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오? 세 사람 다 표정이 진지한 것이 심상치가 않은데."
"섬 근처에서 돌아다니던 수상한 배를 붙잡았습니다. 왜선이었고 탄 이들도 일본인이었습니다."
이종무의 말에 양녕은 잠기운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어찌 되었소?"
"섬 주변에 있던 배는 놓친 것 없이 다 잡았습니다. 잡힌 놈들을 패서 물어보니 이번이 처음 정탐하러 온 것이고, 달아난 배도 없다고 합니다."
"공들의 표정이 어둡고, 이렇게 급히 깨우러 온 걸 보면 무사히 전부 잡고 끝난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뭔가 있는 게로군."
"예. 구주도에서 이미 대마도가 점령당한 것과 곧 공격이 시작될 것임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합니다. 이번 정탐은 그게 사실인지 확인하러 온 것이라 합니다."
"일본 조정에서도 알고 있는 것이오? 아니면 일부 태수들만 아는 것이오?"
"정탐하러 보낸 아랫것들이라 그런지 거기까지는 모른다합니다."
장수들의 보고에 양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구주도 일대의 관찰사에 해당하는 구주탐제의 처소가 구주도의 북쪽 해안이자 우리의 상륙 예정지인 박다(하카타)에 있소. 일기도와 대마도로 향하는 항로가 거기서 시작하니 적어도 구주탐제는 대마도에 무슨 일이 있어 정탐을 보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오."
"관찰사가 안다면 일본 조정에서도 아는 거 아닙니까?"
"알았다 하더라도 지금 일본은 옛 중국의 춘추시대처럼 조정의 권위가 흔들리는 정국이니 일본 조정에서 바로 대응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보다도 대마도가 점령당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러 정탐을 보낼 정도면 아직 전쟁이 난다는 확신은 없을 테니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종무의 물음에 양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오늘 내로 최대한 채비를 갖추시오. 내일 해가 뜨는 대로 바로 일기도를 치고 모레에는 구주도로 갈 것이오."
* * *
다음 날.
이키노쿠니(일기도), 츠츠키(두두기)
일기도 동남쪽의 츠츠키우라 해안가. 길게 뻗은 모래톱 위에 나무 방패 수십 개가 담벼락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방패를 들고 서 있는 이의 숫자는 많았지만, 대다수가 갑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사내들이었다.
"대장, 정말로 왔습니다."
방패 벽 뒤에 서 있던, 그나마 갑옷을 차려입은 십수 명의 사내 중 하나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일기도의 다른 상륙 가능한 해안가와 마찬가지로, 사내가 보고 있는 수평선 너머에서는 수많은 돛대가 하나둘 올라오고 있었다.
"다음 날이 될 때까지 아무도 못 돌아오면 고려인들이 쳐들어오는 것으로 간주해 달라던 정탐병들 말이 맞았군."
대장이라 불린, 가장 제대로 된 갑옷을 입고 화려한 장식이 달린 투구까지 갖추어 쓴 사내가 대답했다.
"큐슈에 연락은 보냈지?"
"예. 정탐병들의 주군인 치쿠젠 슈고에게 바로 가 알리도록 했습니다."
"좋다. 그럼 정탐들이 우리에게 부탁했던 것도 다 들어주었으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자네는 준비 다 했나?"
"죽을 준비를 하고 다니지 않는 칼잡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처음으로 배를 타고 나가 약탈하던 날부터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사내의 말에 왜구 대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 시작하지."
투구와 갑옷 매무새를 정리한 왜구 대장이 방패 벽 앞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