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17화
17화
잠시 후.
한성부, 공조.
양녕과 이천 그리고 그들에게 불려온 최해산의 세 명이 탁자에 둘러앉아 발화통의 양산 문제에 대해 회의하고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쉽게 만들 것인가, 어떤 재료로 바꿀 것인가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재료마다 가공법이 달라지니 일단 재료를 먼저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자네 말이 맞네. 일단 구리는 재료가 부족하니 안 되고, 쇠는 구리보다도 가공이 어려우니 금속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최해산의 말에 양녕이 동의했다.
"그러면 남은 재료는 도자기 아니면 나무 아니겠습니까?"
"전쟁터에서 도자기로 된 걸 쓸 수는 없네. 기름이 든 물건인데 불붙은 상태로 떨어져서 깨지기라도 하면 불바다가 될 것 아닌가. 나중에 민간에서 만든다고 해도 금지해야 할 물건이네."
"그러면 나무가 어떻습니까? 떨어져도 깨지지 않고, 칼로 깎으면 되니 놋쇠보다 가공하기 쉽지 않겠습니까?"
최해산의 말에 이번에는 이천이 대답한다.
"각 부속끼리 잘 맞물리게 하려면 결국 가공이 어렵지는 않아도 시간은 들기 마련이네. 게다가 나무로 만들면 기름을 점점 흡수할 텐데, 기름 먹은 나무토막으로 불을 붙이고 화약을 다루는 건 딱히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이 참판의 말이 맞는 것 같소. 결국 불에 탈 수 있는 재료로는 못 만들고, 깨지는 재료로도 못 만드니 남은 재료는 도로 금속뿐이구려."
양녕의 말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한숨을 쉬었다.
"요즘은 궁에서 나오는 것 말고 민간에서 나오는 것까지 소변을 모아서 인을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차라리 성냥을 더 만들어서 쓰면 어떻겠습니까. 성냥이면 한 손으로도 다룰 수 있으니 더 낫지 않겠습니까?"
이천이 문득 떠오른 것을 말했다.
"사실 저희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모든 총의 화승에 불을 붙어야 하니, 한 번 전투가 있을 때마다 포수 숫자만큼 성냥이 필요합니다. 계산해 보니 인 생산량이 지금보다 훨씬 늘어나지 않는 한 소모량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최해산의 대답에 이천이 머리를 감싸 쥔다.
"그런데 굳이 불이 필요한가?"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양녕이 한마디 했다.
"설마하니 발화통을 포기하자 하시는 것은 아니실 것이고, 혹시 묘수가 있으십니까?"
"화승이 전투 중에 갑자기 꺼져서 다시 붙일 때면 몰라도, 전투 전에는 단숨에 불을 붙여야 할 필요는 없겠지?"
최해산의 질문에도 양녕은 대답 대신 다른 질문으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투 시작 전까지만 붙이면 되지요."
"화승에는 꼭 불을 가져다 대야 불이 붙는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불로만 붙여봤습니다."
"그러면 직접 해보면 알겠지. 지금 바로 해볼 것이니 작은 대나무 통과 그 통 안에 들어갈 만한 굵기의 삼끈, 가느다란 끈, 부싯돌, 부시쇠, 화승을 준비해 주게."
결국 양녕이 뭘 하려는지는 듣지 못한 채 엉겁결에 재료를 구하러 나가는 최해산이었다.
잠시 뒤.
양녕이 말했던 물건들이 탁자 위에 전부 갖추어졌다.
양녕이 과연 무엇을 하려는지 최해산과 이천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럼 만들어 보겠네."
놋쇠 발화통으로 불을 켜고, 삼끈 한쪽 끝을 불에 그을려서 살짝 탄화시킨다. 이어서 삼끈을 탄화된 부분부터 대나무 통 한쪽 끝에 넣어 반대쪽으로 삼끈이 어느 정도 튀어나오게 한다. 다음으로 가느다란 끈을 집어 들었다. 끈 끝을 대나무 통에 묶고, 끈 중간쯤에 부싯돌을 튼튼하게 묶고, 끈 끝에 부시쇠를 묶고는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러면 일단 완성은 되었어. 그럼 어디 잘 되는지 해보겠네."
삼끈의 탄화된 부분이 끈으로 묶어놓은 부싯돌 위로 올라가게 겹쳐 잡고, 마찬가지로 끈으로 묶어놓은 부시쇠로 부싯돌을 몇 번 치자 불꽃이 튀었다.
탄화된 부분에 작게 불꽃이 달라붙은 것을 본 양녕이 살살 입김을 불자 삼끈 끝에 큼직한 불씨가 생겼다. 이어서 대나무 통 부분을 손잡이처럼 잡고 불씨를 화승 끝에 가져다 대고 또 입김을 불었다.
잠시 뒤, 양녕이 불씨를 떼자 화승 끝에 불이 붙어 조금씩 타고 있었다.
"되는군."
눈이 휘둥그레진 최해산과 이천이 보는 가운데, 이번에는 불씨가 있는 반대쪽 삼끈을 살짝 당기자 불씨가 대나무 통 안으로 들어갔다. 불씨가 들어간 대나무 통 입구를 잠시 손가락으로 막고 기다렸다가, 떼고 안을 들여다본다.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고는 부싯돌과 부시쇠가 달린 끈을 대나무 통에 돌돌 감아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상일세."
양녕이 방금 만든 것은 로프 라이터라는 물건이었다. 직접 불이 붙어서 타는 게 아니라 불씨를 만드는 도구라 양녕도 금방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물건이고 부싯돌만 쓸 줄 알면 다루기도 쉽네. 전투 시작 전에는 이걸로 화승 불을 붙이고, 성냥도 한 사람당 몇 개씩은 보급해서 전투 중에 화승이 갑자기 꺼졌을 때에만 쓰게 하면 될 걸세."
양녕에게 다가온 최해산과 이천이 저마다 감탄하며 말한다.
"부싯깃, 부시쇠, 부싯돌을 따로 부시쌈지에 넣어 다니는 것보다 낫고, 불씨를 붙이고 옮기는 것도 편한 물건이로군요."
"이 정도로 간단하면 민간에 바로 제작법을 가르쳐 널리 쓰이게 만들어도 좋고, 전장에서 병사들이 직접 만들어도 되겠습니다. 이 물건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천의 질문에 로프 라이터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양녕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부시끈이라고 하는 게 어떻겠소?"
"부시끈이라. 바로 알 수 있는 이름이군요. 그러면 부시통을 최대한 만들면서, 여유가 있는 장인들을 시켜 부시끈도 만들어 보급하겠습니다."
"좋소. 그럼 강선 조총에서 발화통까지 모든 급한 문제는 다 해결되었으니, 남은 건 준비가 되는 대로 출정하는 것뿐이오."
* * *
1419년 10월 초순 모일.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내일이면 형님께서 또 한성을 떠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주상. 한 달이 참 금방 가는군요."
부시끈이 완성되고 열흘가량이 지났다. 구주도 원정을 위한 준비도 다 끝나고, 출발 전날을 맞이한 양녕은 떠나기 전 이도에게 인사를 하러 와 있었다.
"가족들하고 또 떨어져서 지내셔야 하니 쓸쓸하시겠습니다."
"천년만년 떨어질 것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잘 끝내고 돌아오면 되지요."
"잘 끝내고 돌아오시려면 거기 가 계신 동안에도 건강을 잘 챙기셔야 합니다. 고기반찬도 제때 드시고요. 왜인들도 소나 돼지는 키우겠지만, 살생을 꺼리고 풀과 생선을 즐겨 먹는다고 하니 혹시라도 고기를 구하기 어려우시면 언제라도 기별을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주상. 참, 가기 전에 드릴 게 있습니다."
양녕은 대화주제를 고기에서 돌리며 제목이 적히지 않은 책을 두 권 꺼냈다. 이도가 위에 있는 책을 집어 들어 몇 장 넘기다 묻는다.
"이 책은 농법에 관한 내용인가 봅니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농기구를 이것저것 고안해 봤어요. 곧 수확 철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역시 형님께서는 대단하십니다. 농기구라고는 쟁기니 도리깨니 하는 것밖에 몰랐는데, 신기한 게 참 많군요."
흥미가 동했는지 이도가 눈을 빛내며 책을 읽어간다.
"이 나선양수기라는 것은 구조도 간단하고 옮기기도 좋아 보이고, 손잡이를 돌리기만 하면 물을 퍼낼 수 있으니 쓰임이 많겠군요. 헌데 이런 원리라면 몸통이 세로로 반만 있어도 될 것 같습니다."
"과연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그러는 게 만들기도 쉽고, 몸통 한 개 만들 나무로 두 개를 만들 수 있겠군요."
아르키메데스 나선양수기의 원리를 단숨에 이해하고 개선안을 내놓은 이도가 계속 책장을 넘긴다.
"이 풍구라는 도구는 크기가 크니 몇 집마다 한 대씩 놓고 공용으로 쓰면 되겠습니다. 만드는 품이 얼마나 드는지,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보급할 테니 일단 공조에서 만들어 보라 시켜야겠군요."
즐겁게 책장을 넘기던 이도의 손이 멈췄다.
"형님. 그런데 이 홀태와 호롱기라는 두 도구는 쓰임이 겹치는 것 아닙니까?"
쇠로 된 큰 빗살로 이삭을 훑어내는 홀태와, 쇠못이 박힌 원통을 회전시켜 이삭을 털어내는 호롱기는 탈곡이라는 용도가 겹친다는 것을 확인한 이도가 물었다.
"맞습니다. 단번에 전국의 장인들이 호롱기 같은 복잡한 물건을 만들어 팔 수도, 농민이 그걸 살 여유도 없지 않습니까. 도리깨로 탈곡하던 이들이 조금씩 부를 쌓아 홀태를 사고, 그 홀태로 더 부를 쌓아 호롱기를 사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래서 간단한 것과 복잡하고 좋은 것을 두루 생각해보았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형님께서는 항상 몇 수 앞서 내다보시는군요. 다음 책은 어떤 내용입니까?"
이도가 읽던 책을 내려놓고 다음 책을 들어 펼치며 물었다.
"군현제를 개편하는 방안을 좀 써보았습니다."
"군현제를요?"
이도가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전조인 고려의 행정구역을 이어 쓰면서 그나마 시행한, 속현 제도와 향, 소, 부곡의 철폐가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군현제를 효율적으로 개편하는 방안은 시급한 것이었다.
"전국을 도로 나누는 것은 당나라의 제도로, 도 아래 주를 두고 그 아래 현을 두었습니다. 당나라의 도의 크기가 지금 명나라의 성과 비슷한 정도로 큰데, 그 제도를 그대로 땅이 좁은 우리나라에 쓰니 아이가 큰 옷을 입은 것처럼 잘 맞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크기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와 다르게 도 아래에 바로 고을들을 둔 것도 문제지요. 경상도만 하더라도 동서남북으로 각 400리가 되는 땅에 고을이 70여 개에 달하는데 관찰사는 한 사람이니, 예하 고을들의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형님께서 생각하신 이런 문제들의 해결책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 펴신 다음 쪽에 있습니다."
양녕의 말에 이도가 한 장 넘겨 차분히 읽어 보았다.
"도보다 작은 크기로 전국을 나누어 부라고 하고 부윤을 둘 것. 각 부의 중심이 되는 큰 고을을 목이라 하고 목사를 둘 것. 목 외의 고을은 큰 것을 군, 작은 것을 현이라 하고 각각 군수와 현령을 둘 것. 대충 이렇게 정리되는군요. 부가 아래에 고을들을 두는 구조나, 중심고을의 이름을 그대로 부의 이름으로 삼는다는 것이 명나라의 제도와 비슷합니다."
"맞습니다. 명나라의 제도에서 성을 뺀 것을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주상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좋아 보입니다. 형님께서 쓰셔서 믿음이 가는 것도 있지만 이미 명나라에서 쓰이는 검증된 제도가 아닙니까. 검증된 제도에 필요성도 있으니 신하들도 긍정적으로 나올 것입니다. 다만 중국과 우리가 똑같지 않고, 사람이 많은 곳과 적은 곳, 섬마을과 산간마을이 같을 수 없으니 많은 검토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겠지요."
"그래서 말입니다만. 주상, 혹시 제가 이번 원정에서 점령하는 지역에 먼저 이 제도를 써서 고을을 두어 봐도 되겠습니까?"
양녕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을을 설치하는 것은 군주의 권한이고, 지방관은 곧 군주의 대리인이다. 동정군 총지휘관이 아니라 영의정이라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일이기에 조심스러운 것이다.
"무엇을 그리 걱정하십니까."
이도가 자신감과 신뢰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형님께서는 동정군의 삼도 도통사기도 하지만 부상백이기도 합니다. 형님을 백작으로 책봉한 제 뜻이 벌써 그러했으니, 형님께서 정복하여 얻으시는 모든 땅은 손바닥만 한 흙덩어리라도 전부 형님의 봉토입니다."
"감사합니다, 주상. 그러면 제가 고을을 설치하고 무관 중에 재주 있는 이를 골라 임시로 지방관으로 삼되, 그 상세한 내용을 모두 빠짐없이 적어 조정으로 보낼 것이니, 본토에 적용하는 데에 참고하시옵소서."
"제가 더 감사하지요. 형님께서는 다만 다치지 않게 조심하시고 무사히 돌아오세요. 그것이면 됩니다."
이도의 눈에 비치는 자신과 신뢰, 그리고 야심을 보며 양녕은 문득 군주가 자기 아래에 실권 있는 군주를 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자신을 백작으로 책봉한 뜻이라는 것이 무슨 뜻일지 신경 쓰였으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