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16화
16화
1419년 9월 중순 모일.
한성부 성저십리. 흥인문 인근.
공조 소속 관원 한 사람과 장인 한 사람이 측거의를 붙잡고 앞쪽을 겨누고 있었다. 앞에 펼쳐진 공터에는 크고 작은 여러 색의 깃발들이 꽂혀 있었다.
"220보 작은 깃발 겨누었네."
관원이 측거의 왼쪽 작은 막대로 깃발 하나를 겨누고 장인에게 말한다.
"220보 작은 깃발……. 겨눴습니다."
장인이 오른쪽 작은 막대로 같은 깃발을 겨누고, 측거의의 화살표가 가리킨 위치에 깃털 붓으로 표시를 한다.
"되었습니다. 눈금 파겠습니다."
관원이 뒤로 물러나고, 장인이 작은 조각칼을 들고 표시된 자리에 눈금을 판다.
그리고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양녕과 이천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제 저녁때 와서 말씀해 주신 대로 했더니 오전에만 다섯 개를 만들었습니다."
"순조롭게 된다니 다행이오."
어제 양녕이 자치기 막대를 보고 떠올린 측거의 제작방법은 간단했다.
우선 공터에 기준점을 정해 놓고 기준점에서 10보 거리에 깃발을 세운다. 그 깃발에 가려지지 않는, 기준점에서 20보 거리에 다음 깃발을 세운다. 50보의 배수가 되는 깃발들은 큰 깃발을 세워 구분이 쉽게 하며 이런 식으로 깃발을 500보까지 세우면, 기준점에서 보았을 때 깃발들이 호를 그리며 늘어선 모양이 된다.
다음으로 기준점에 측거의를 놓고 깃발들을 하나씩 직접 겨눠 가면서, 화살표가 가리키는 자리에 그 깃발에 해당하는 거리의 눈금을 새기면 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쓰면 된다니, 저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역시 대군이십니다."
"과찬이시오, 이 참판. 순전히 내 머리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오."
"그렇다고 해도 대단하십니다. 직접 겨눠서 만드니 삼각함수를 쓸 필요도 없고, 측거의마다 직접 조준해서 만드니 양산했다고 오차가 생기지도 않지요. 눈금이 안 맞으면 10보 거리에 깃발을 세우고 겨눈 다음 화살표를 측거의의 10보 눈금과 맞추면 나머지 눈금도 알아서 맞춰지게 되니 전장에서도 쉽게 수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소. 군용으로 쓸 물건인데 전쟁터에서 화살이나 포탄을 하나만 쏘는 것이 아니라 범위에 쏟아지니, 간격이 10보 단위라도 큰 문제가 없기도 하고 말이오."
"급한 불을 끈 덕에 산학박사들도 조금 여유를 갖고 계산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왔군."
이천의 말에 양녕이 옆을 보았다. 다모 두 사람이 찻잔과 다식이 담긴 소반을 하나씩 들고 와 양녕과 이천의 앞에 내려놓는다.
"차 한 잔 드시지요."
"고맙소. 마침 목이 말랐는데 잘되었군. 다모도 수고했네."
두 다모가 인사하고 떠나고, 양녕과 이천은 천천히 차를 마시며 말했다.
"측거의는 해결되었고, 발화통도 잘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개량된 목화(목 긴 가죽신)도 장인들에게 사들이는 숫자나 품질에 문제없습니다."
"다행이오."
그렇게 말하며 양녕은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신고 있는 것이 방금 이천이 말한 개량된 목화였다. 기존 목화의 발목 앞부분을 분리해 혀를 만들고, 남은 좌우 부분에 구멍을 내어 신발 끈을 꿰어 묶는 것만으로도 발에 잘 고정되고 걷기도 편해졌다. 일종의 부츠가 된 것이다.
개량된 목화를 정예병력과 장수들 위주로 보급한다고 해도, 부대 단위로 쓰는 측거의와 다르게 무조건 한 사람에 한 켤레는 있어야 했기에 수요가 훨씬 많았다.
대신 민간 장인들이 견본만 보고도 바로 만들 수 있을 만큼 구조가 간단하여 민간에 만들게 하고 나라에서 구입하는 방식을 시험 삼아 써 보는 중이었다.
"호조에서 말하기로는 관청 소속 장인에게 만들게 하는 것보다 이렇게 민간 장인에게서 사는 것이 이로운 점이 더 많으면 앞으로 관청 소속 장인과 공납을 없애고 대신 쌀이나 돈으로 거둘 것이라고 하던데, 제가 보기에는 그리될 것 같습니다."
"그렇소. 장인들 입장에서도 자기가 만든 물건을 조정에서 사 갔다 하면 품질이 좋고 가격이 우수하다는 평판이 날 테니까. 나라에서 신발값도 쳐주는 데다가 자기 재주를 홍보할 기회까지 주는 것이니 장인들에게도 이롭고, 쌀이나 돈으로 내면 되니 백성들도 이롭고, 싸고 좋은 것을 골라서 살 수 있으니 조정에도 이로운 일이지요."
양녕의 설명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인 이천이 말한다.
"다만 군대에서 쓰이는 무기나 인 같은 것은 함부로 민간에 제조법을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니, 군기시는 지금도 쉬지 못하는데 앞으로도 계속 고생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참, 발화통은 언제쯤 완성될 것 같소?"
"며칠 내로 될 것 같습니다. 연락을 드릴까요?"
"그러시지요. 그럼 난 이만 가 보겠소. 차 잘 마셨소, 이 참판."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한 양녕은 이천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 * *
며칠 뒤.
한성부. 군기시.
양녕과 최해산이 작업장 한쪽에 서 있고, 그 앞에는 완성된 강선 깎는 틀이 놓여 있었다.
탁자 정도 높이의 다리가 달린 긴 작업대의 한쪽 끝에는 총열을 고정하는 부분이 있고, 강선 깎는 강철 날이 옆에 달린 긴 막대와 거기 연결된 회전하는 구동부가 있는 구조다.
양녕이 구동부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당기자, 날이 달린 막대가 천천히 회전하며 손잡이를 따라 움직였다.
"움직이는 건 일단 잘 되는군. 깎이는 건 잘 깎이던가?"
"예. 깎는 데 한참 걸리긴 하지만 깎이는 것 자체는 문제없습니다. 이게 이 틀로 깎아 본 총열입니다."
최해산에게 총열을 받아든 양녕은 밖으로 나가 밝은 곳에서 총열 안을 살펴보았다.
"강선 네 줄 다 깔끔하게 파였고 깊이도 적당하니 성능은 충분하겠군. 역시 문제는 작업 속도인가?"
"그렇지요. 청동도 금속인지라 날이 달린 막대로 한 번 깎는다고 단번에 파이지가 않습니다. 적당한 깊이가 될 때까지 몇 번씩 같은 자리를 깎고, 다 깎으면 총열을 돌려서 다음 강선을 깎아야 하니까요."
"장인이 끌로 깎는 것보다 빠르고, 틀 사용법만 배우면 누구라도 깎을 수 있게는 되었지만, 그래도 시간은 여전히 상당히 걸린다는 것이군. 그러면 강선 깎는 틀도 계속 만들어 가면서 깎는다고 치면 어떨 것 같은가?"
양녕의 질문에 최해산이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대답한다.
"그래도 총열 50개나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강선이 없는 걸 먼저 보급해서 쓰면서, 강선 깎는 틀도 원정에 가져가셔서 여유가 되는 대로 깎아 주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단번에 다 깎을 도리가 없으니 그 방법은 무조건 써야겠지. 다만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최대한 많이 깎아서 들려 줄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할 뿐이네."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칫한 양녕이 말한다.
"장인들을 모아 주게. 이 틀로 강선을 깎은 장인, 틀을 만든 장인, 저번에 끌로 깎았던 장인 다 상관없네. 강선에 대해 아는 장인이면 돼."
"다 모아올 수 있습니다. 헌데 어떤 이유이신지요?"
"내가 며칠 전 어린아이에게서 큰 가르침을 얻은 적이 있는데, 하물며 그 분야의 장인에게서 가르침을 얻을 게 없겠는가?"
잠시 뒤, 양녕의 호출을 받은 장인들이 작업실로 모였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지금 소총 총열에 강선을 파는 일이 시급한데 뾰족한 수가 없네. 혹시라도 생각해본 바가 있으면 거리낌 없이 말해주게나."
대군에게 직접 불린 장인들이 잠시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이윽고 하나둘 입을 열었다.
"강선 파는 거 하고는 상관없지만, 저 틀을 좀만 손보면 총열 안을 매끈하게 다듬는 틀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한 적은 있습니다."
"오, 아주 좋은 생각이네. 이건 바로 도입할 수 있겠어."
"부품끼리 닿는 부분에 쓸 수 있게 구리를 좀 주시면 틀이 좀 오래 가지 않겠습니까?"
"구리에 여유가 생기면 생각해 보겠네."
"그 강선이라는 게 네 개를 다 파야 하는 겁니까?"
고개를 숙이고 귀로만 들으며 종이에 적어 가던 양녕은 뜻밖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방금 질문한 사람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소인이 잘은 모르지만, 듣자 하니 강선이라는 것이 총알을 빙빙 돌려서 똑바로 서서 날아가게 하려고 파는 거 아닙니까?"
"그렇네."
"그럼 팽이 같은 것인데, 팽이는 줄 하나로 감아서 던져도 잘만 돌아가지 않습니까?"
생각도 못 한 발상에, 양녕이 멍한 표정으로 똑같이 멍한 표정을 한 최해산을 본다.
"저 말이 맞는가?"
"보겠습니다."
다급하게 작업실 밖으로 나간 최해산이 잠시 뒤 종이 한 장을 들고 돌아와 펼친다.
양녕이 한성에 돌아와 처음으로 군기시에 들렸을 때 최해산이 보여 주었던, 강선과 탄 종류별로 명중률을 비교한 자료였다. 손으로 그 위를 이리저리 짚어가며 살피던 최해산이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시험한 내용 중에 강선 하나만 판 게 있었습니다. 결과는…… 네 줄을 다 판 것보다는 좀 떨어지지만, 아예 안 판 것보다는 월등히 명중률이 높습니다."
"되었군. 단숨에 작업 속도가 네 배가 되었어. 원정에 틀을 가져가서 강선을 깎아 줄 때도 우선 한 줄씩 깎아서 주고 모든 총열을 다 깎은 다음에 세 줄을 마저 깎아 주면 되겠어."
문제가 해결되어 신난 양녕이 노인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말한다.
"자네 덕분에 큰 문제 하나가 해결되었네. 혹시 바라는 게 있는가? 내 가능한 것이라면 뭐라도 들어주겠네."
"소인들이 요즘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기력이 쇠한 느낌입니다. 고기를 좀 먹으면 좋아질 것 같습니다만……."
"좋아. 내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보내 주겠네. 사이좋게들 나눠 먹고 힘내서 열심히들 일하게."
고기라는 말에 다른 장인들이 노인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 *
며칠 뒤.
한성부. 공조.
"드디어 발화통도 완성되었군."
옆에서 공조참판 이천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녕이 탁자에 놓인 작은 놋쇠통을 들어 올린다. 놋쇠 몸체에 위에는 작은 뚜껑이 있고, 뚜껑 옆에는 부싯돌이 붙어 있는 물건이었다.
양녕이 뚜껑을 열어 탁자에 내려놓자 뚜껑에 덮여 있던 기름 먹은 심지가 나온다. 부시쇠를 오른손에 집어 들고, 놋쇠통을 왼손에 든다.
타닥! 탁!
양녕이 부시쇠를 몇 번 부싯돌에 부딪히자 불꽃이 튀더니 심지에 붙어 밝게 빛난다. 그 심지를 살짝 후 불자 심지 끝에서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양녕이 공조에 설계도를 주어 만든 발화통이라는 것은 초보적인 형태의 기름 라이터였다. 소형 합금 부시쇠와 회전하는 부싯돌 대신, 조선에서 이미 쓰이던 부시쇠와 부싯돌을 달아서 쓴다는 점을 제외하면 현대의 지포라이터와 같은 구조였다.
잠시 그 불꽃을 보던 양녕은 뚜껑을 심지에 덮어 불을 껐다.
"만족스럽게 잘 되는구려. 그런데 이거 양산은 가능하겠소?"
발화통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양녕이 이천에게 묻는다.
"굳이 물어보시는 걸 보면 대군께서도 짐작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양산은 어렵습니다. 구조나 원리가 어려운 건 아닙니다. 하지만 구리가 많이 들어가고, 그걸 두들겨 만들어야 하니 손도 많이 갑니다."
이천이 덤덤하게 말한다.
"나중에 구주도를 점령하고 광산을 확보하면 구리에 여유가 생기겠지만, 애초에 소총이나 대포 같은 화포에 쓰려고 발화통을 만드는 것이니 그래서는 순서가 반대가 될 것이오."
"지금 당장 어디서 구리를 구해 온다고 해도 만드는 시간이 한참 걸리니 충분하게 보급하기도 어렵겠지요."
양녕이 지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앉는다.
"당장 원정에 필요한 물건은 이거 하나 남았는데 여기서도 또 발목을 붙잡히는구만."
"어찌하시겠습니까?"
"시간이 얼마 없으니 최대한 빨리 해결을 봐야지. 군기시의 최 정을 불러주시오. 셋이서 회의를 해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