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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5화 (1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15화

15화

며칠 뒤.

한성부. 군기시.

"시험적으로 주조한 게 완성되었다길래 왔네."

"아, 오셨습니까. 그늘에 의자를 두었으니 앉아서 기다리시지요. 가져오겠습니다."

최해산의 안내를 받은 양녕이 마당 그늘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대마도 원정을 떠나기 전보다도 바쁘고 분주해진 군기시 안을 둘러보고 있자 최해산이 천으로 싼 긴 꾸러미를 들고 와 내려놓고, 그 안에서 하나를 꺼낸다.

"먼저 진흙으로 속 거푸집을 만들어 주조한 것 중에 제일 잘 된 물건입니다."

"어디 보세."

최해산에게 총열을 건네받은 양녕이 마당 중앙, 햇빛이 밝게 비치는 곳에서 총열을 이리저리 살핀다.

"겉은 문제없고, 속은 어디 보자……."

햇빛이 총구를 비추게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어가며 들여다보던 양녕이 순간 멈칫했다.

"강선이 얕은데다가 그나마도 들쭉날쭉한 것 같은데? 이게 제일 잘 된 게 맞는가?"

"주조 자체는 잘 된 게 맞습니다. 주조하고 난 다음 총열 안쪽을 매끈하게 다듬는 과정에서 강선이 다 날아가는 게 문제지요."

양녕으로선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총알이 중간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공정이니 생략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연마하고도 남아 있을 정도로 강선을 깊게 주조하려고 하면……."

"주조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겠지요."

양녕이 흐린 말끝을 최해산이 대신 받아 말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속 거푸집을 쇠로 만든 것들은 어떤가?"

"이렇습니다."

최해산이 바닥에 둔 꾸러미를 풀자, 안에서 구리 총열 여러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이건……."

양녕은 들고 살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모든 총열에 쇠 거푸집이 그대로 박혀 총구로 튀어나와 있었다.

"저도 처음에는 잘 될 거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주조해 보니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말문이 막힌 양녕 대신 최해산이 총열 하나를 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쇠라는 것이 달아오르면 팽창하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녹인 구리를 부으면 그 열에 쇠 거푸집이 팽창하고, 식으면서 쇠 거푸집하고 구리 총열이 둘 다 수축하는데 그 정도도 둘 다 달라서, 구리는 많이 수축하고 쇠는 덜 수축하니 안에서 둘이 비틀리면서 끼어 버립니다. 돌려서 빼는 건 고사하고 쪼개서 꺼내야 할 판입니다."

그 말에 양녕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다른 시도가 다 안 먹혔으니, 남은 방법은 깎는 것뿐이군."

어차피 철로 총열을 만들게 되면 깎는 것만 방법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리는 재료 특성이 다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전쟁이 코앞이라 양산이 시급해서 주조로 가능한지 시험해 본 것인데 안 된다면 방법이 없다.

"일단 강선이 없는 구리 총열은 많이 생산되어 있고, 강선이 없어도 도토리 모양 탄을 쓰면 명중률은 제법 괜찮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강선을 깎았던 장인에게 다른 장인들에게도 끌 다루는 요령을 가르쳐 주라 하겠습니다."

말없이 서 있는 양녕이 낙담한 것이라 생각한 최해산이 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럴 것 없네. 자하고 종이, 깃털 붓하고 먹물을 준비해 주게."

"전부 다 건물 안에 있으니 바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헌데 무엇을 하시려 그러십니까?"

"설계도를 하나 그려 주겠네. 어차피 언젠가는 만들었어야 하는 물건이네. 주조로 만드는 게 실패해서 앞당겨지는 것뿐이지."

"그게 무엇입니까?"

건물에 들어가려 신발을 벗던 양녕이 짧게 답했다.

"강선 깎는 틀일세."

* * *

같은 날 오후.

한성부. 공조.

동정군의 구주도 원정을 앞두고 공조에서도 원정에 쓰일 물건들의 개발이 한창이었다. 그중 하나가 거리 측정용 도구인 측거의였다.

그 모양새가 긴 막대의 왼쪽 끝에 가늠쇠와 가늠자가 달린 짧은 막대가 고정되어 있고, 오른쪽 끝에는 같은 짧은 막대가 가동식으로 달려 있다. 왼쪽의 고정된 막대로 목표를 겨누고, 오른쪽의 가동식 막대를 움직여 같은 목표를 겨눈 다음 오른쪽 막대가 움직인 각도를 이용해 거리를 구한다.

문제는 그 거리를 구하는 원리가 삼각함수라는 점이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많이 되었소."

최해산에게 설계도를 그려주고 쉴 틈도 없이 공조로 온 양녕이 탁자 위에 놓인 삼각함수표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양녕의 말이 무색하게도 숫자가 있는 칸보다 빈칸이 더 많았고, 그나마 있는 숫자들도 자릿수가 부족했다.

"호조에서 온 산학박사(수학 전문직)들이 재주가 뛰어나서 다행입니다. 대군께서 알려주신 삼각비, 좌표나 소수점 같은 것들을 산학박사들이 먼저 이해하고 관원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시작은 고사하고 아직도 교육 중이었을 것입니다."

양녕의 말에 대답한 이는 공조의 차관, 공조참판 이천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후에 군선 건조, 철제 화포 제작, 활자의 주조는 물론이고 앙부일구와 혼천의 등의 천문기구 제작의 책임자를 맡은 조선 초 최고의 물리학자 겸 기술자였다.

"그래도 산학박사들이 잘 이해했다니 다행이구려."

"산경십서에 통달한 이들입니다. 그 삼각함수라는 것이 해도산경에서 나온 것이라 하셨으니 산학박사들이 금방 이해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중요 수학서 10권의 모음인 산경십서에 속하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수학자 유휘가 집필한 해도산경은 초보적인 삼각비를 이용해 멀리 떨어진 물체의 거리나 크기를 측량하는 법을 다룬 책이다. 조선시대에도 지리 측량에 곧잘 쓰였을 만큼 당대 수학자들의 기본기였으니, 그 발전형인 삼각함수와 삼각측량은 양녕이 개념을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쉽게 받아들여졌다.

"또 대군께서 바둑을 두시다 떠올리셨다는 좌표란 것이나, 분수보다 계산이 편한 소수라는 것도 삼각함수를 계산하는 데에도 유용합니다. 문제는 그래도 계산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지요. 어려운 것은 아니니 언젠가는 다 되겠지만, 지금 급하게 측거의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렇소. 새로 만든 화포나 병기들을 이번 원정에서 제대로 쓰려고 측거의를 만드는 것인데, 전쟁 뒤에나 만들어진다면 의미가 없지."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던 양녕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이 삼각함수표가 미완성이긴 하나, 지금까지 계산된 숫자들로 일단 측거의를 만들어 보고 크게 문제가 없으면 써도 괜찮지 않겠소?"

"사실 저희도 그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 말하며 이천이 방문을 열고 마당에 있는 측거의를 가리킨다.

"오전에 시험 삼아 만들어 본 것입니다. 저것으로 재보니 공조 문 앞에서 광화문 해태상까지 딱 300보가 나오더군요."

"실제 거리는 어땠소?"

"직접 재보니 350보였습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정확한 계산이 아니면 오차가 심각하게 생기더군요."

"50보나 차이가 난다면 군용으로는 못 쓰겠구려."

양녕은 작게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지금 산학박사를 더 뽑는다고는 하는데, 사람을 더 써서 제때 삼각함수표를 완성하고 측거의 시제품을 만들어도 양산을 시작하면 오차가 생기는 것도 고려해야 됩니다."

"첩첩산중이군. 알겠소, 달리 방법이 없으니 하던 대로 하는 수밖에 없겠지. 참판께서도 너무 초조해하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큰 진척이 있으면 대군께 꼭 알려드리겠습니다."

* * *

잠시 후.

한성부. 양녕대군 사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조금 일찍 귀가한 양녕이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발 앞에 무언가 날아와 떨어졌다.

"뭐지?"

집어 들고 살펴보니 짧은 나무막대였다. 이윽고 저쪽에서 긴 나무막대를 든 사내아이와 맨손의 사내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양녕을 올려다보고 머뭇거린다.

"아버지 잘 다녀오셨어요."

맨손의 사내아이가 머뭇거리며 꾸벅 인사를 한다.

양녕의 맏아들인 이개. 원래 역사에서 후에 순성군의 군호를 받는 아이다.

그리고 막대를 든 아이가 따라서 인사를 하려는 찰나, 일하다 뛰어나온 여종 사철이가 아이를 붙잡는다.

"죄송합니다, 마님. 이 녀석이 아무리 말려도 자꾸 도련님 공부하시는 방해를 해서……."

"사철이 자네 동생인가 보구나. 괜찮다. 아이들은 잘 뛰어노는 것이 우선이지. 내 아들도 같이 놀 아이가 마땅히 없으니 잘 된 일 아닌가."

그렇게 말하며 사철이의 동생이라는 아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자치기를 하고 있었나 보구나."

"네, 대군마님!"

양녕의 온화한 목소리에 아이가 해맑게 웃는다.

"그래. 둘 다 다치지 않게만 놀거라."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마루로 가서 앉는다. 마루에는 이미 그의 부인인 삼한국대부인 김 씨가 앉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대군."

"예, 부인.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오늘은 좀 일찍 왔어요."

양녕은 부인의 옆으로 슬며시 이동했다.

"아이들이 저리 즐거이 노는 모습을 보니 참 흐뭇합니다."

부인 김씨는 정말로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부인께서 저 아이가 종과 어울린다고 뭐라 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설마요. 제가 설령 탐탁지 않았더라도 놀게는 두었을 것입니다. 대군의 아들이라 하여 기고만장하게 자라는 것도, 권세가의 자식과 어울리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는 것도 얼마나 위험한지 아니까요."

부인 김 씨의 아버지. 즉 양녕의 장인인 김한로는 양녕이 세자일 때 친 사고들의 책임을 다 뒤집어쓰고 귀양까지 갔었다.

하지만 양녕의 행실이 정반대가 된 뒤 김한로는 복직되어 돌아오고, 반대로 왕이 된 이도의 장인인 심온은 외척을 경계한 이방원에게 숙청되어 사약을 받았다.

그 모습을 보며 외척과 종친은 조금만 무언가 어긋나도 죽고 사는 것이 갈리는 위험한 자리라는 것을 그녀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아버지!"

"마님!"

한참을 놀다 지쳤는지 두 아이가 양녕이 앉은 곳으로 뛰어왔다. 아들 이개는 어머니 김 씨의 옆에 붙어 앉고, 사철이의 동생은 바닥에 편하게 털썩 앉아 자치기하던 막대들을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새끼자는 그냥 나뭇가지인데 어미자는 다듬은 나무 같구나."

가만히 보다가 문득 던진 양녕의 말에 신난 아이가 재잘재잘 얘기를 시작한다.

"네! 길 건너 목수 아저씨가 만들어줬어요! 동네 애들하고 자치기하는데 새끼자 길이를 세 치로 하자 네 치로 하자 싸우다가 네 치로 정했더니 목수 아저씨네 큰애가 아빠한테 말해서 잘라왔어요."

말하며 자랑스럽게 내미는 새끼자와 어미자를 양녕이 받아든다.

"규칙을 꼼꼼히도 만들었구나. 헌데 어미자에 여기 금이 가 있구나. 톱질을 잘못한 거 같은데?"

"금 간 게 아니에요. 자치기하다가 새끼자를 자꾸 잃어버렸는데, 맨날 목수 아저씨한테 잘라 달라고 하기 미안해서 맨 마지막에 받은 네 치짜리 새끼자 대고 칼금 그어놓은 거예요! 이제 잃어버려도 여기다가 대보고 맞추면 새끼자를 네 치로 만들 수 있어요."

"꾀가 대단하구나. 그런데 새끼자가 다듬은 나무가 아닌 걸 보니 결국 잃어버리고 새로 맞춘 게로구나."

양녕의 말에 아이가 히히거리며 웃는다.

그 순간 갑자기 양녕이 아이에게 새끼자와 어미자를 주면서 자리에서 굳은 얼굴로 일어섰다. 웃던 아이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부인 김 씨와 그 품에 안겨 응석을 부리던 아들도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대군,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안 좋으십니까?"

부인 김 씨가 당황해서 묻자 양녕은 서둘러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내 잠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솜씨 좋은 종들을 시켜서 고기반찬을 해주세요."

"그럼 언제쯤 오십니까? 오실 때에 맞춰서 차려놓겠습니다."

"아, 나는 언제 올지 모르니 조금만 남겨놓으면 돼요. 많이 차려서 오늘은 식솔들을 배불리 먹이세요."

아직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은 부인과 아들이 의아한 눈으로 보는 가운데, 양녕은 몸을 낮춰 바닥에 앉아 있던 아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자기가 무엇인가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 바짝 얼어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양녕이 말했다.

"네가 내가 하는 일에 큰 도움을 주어서 그 덕에 다 같이 고기를 먹는 것이니, 오늘은 많이 먹거라.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양녕에게 영문 모를 칭찬을 듣고 안심한 아이가 말한다.

"저는 다들 개똥이라고 불러요."

"기특한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구나. 내 이름을 새로 지어줄 테니 앞으로는 기특이라 하거라."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헤헤 웃는 기특이를 다시 한 번 쓰다듬어주고 대문을 나선 양녕은 공조 방향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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