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14화
14화
며칠 뒤.
한성부. 승록사.
조정에서 사찰이나 승려 등 불교 전반을 담당하는 관청인 승록사에 모인 일곱 승려는 긴장된 공기 속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렇게 오늘 일곱 종파의 판사(종파 최고 관리직)분들을 모이게 한 것은 내 할 말이 있어서외다."
일곱 판사를 불러모은 당사자인 양녕은 제법 고압적인 자세로 앉아 말을 시작했다.
"일곱 분 다 법랍이 지긋하시니 이미 아시겠지만, 지금 나라에서 불교의 각 종파들을 통합해서 줄이고, 사찰에 속한 땅과 노비를 거두고, 특혜를 줄이고 출가를 억제한 지가 한참 되었소. 이렇게 백성에게서 멀어지고 선비들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린 승려들이 사고를 치고 있소."
좋은 소리를 하러 부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판사들이 조심조심 눈치를 본다.
"절에 온 부녀자와 놀아나고,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수행은 게을리하고! 아마 이대로 가면 나라에서 찍어 눌러서일지 백성들이 등을 돌려서일지 이유는 몰라도 이 나라에서 불교가 사라지고도 남지 않겠소?"
일곱 명이 다 움츠러드는 것을 본 양녕은 더욱 어조를 높여 갔다.
"지금 나라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쓰일 화포를 만들고, 또 돈을 만들어 유통시키려 하는데 구리가 부족한 상황이오. 그런 연유로 폐사지의 범종과 불상을 녹여 쓰자는 상소가 쉼 없이 올라오는데, 지금은 상왕 전하께서 넘어가 주시지만 이렇게 불가에서 미운 짓만 계속하면 그 인내심이 무한정이겠소?"
불교가 사라진다는 추상적인 위험에서 폐사지의 위기로 연결한다. 이어서 더 현실적인 위험을 들이민다.
"지금 나라에서 종파를 다 합치고 있는데, 합치면서 각 종파마다 절 몇 개씩만 허락하면 나머지 절들은 버려질 것이오. 그럼 그 절들도 폐사지가 되고, 범종과 불상은 나라에서 거두겠지. 마침 큰 절이 사람도 많고 사고도 많이 치는데, 그런 절을 폐사하면서 거두면 구리가 더 많이 나오지 않겠소? 지은 죄가 있으니 뭐라 할 말도 없을 것 아니오!"
슬슬 목소리를 높인다. 원래 역사에서도 일어났던 일이니 이보다 더 현실적일 수 없는 경고다.
"그렇게 큰 절들까지 폐사되는 지경이 되면 폐사되지 않은 절들이라고 무사할 수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양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좌중을 살폈다. 일곱 판사가 모두 고개를 푹 숙인 것을 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내가 잔소리만 하려고 부른 것도 아니고, 없애겠다 위협하러 부른 것도 아니오. 불교가 나라에 도움이 됨을 보여 이 조선 땅에서 법맥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길을 알려드리려고 부른 것이오."
"소승들이 수행이 부족하여 대군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활로를 터주자, 수염이 하얗게 센 자은종판사가 저자세로 나오며 물었다.
"첫째로 절마다 전패를 모시고 상왕 전하와 대비 전하, 주상 전하와 왕비 전하의 만수무강을 비시오. 둘째로 길가의 시체와 백골을 수습해주고, 이름 없는 무덤을 보살펴주시오. 셋째로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데려다 보살피고 가르치시오. 승려로 키우는 것이 아니니 고기를 시주받아 먹이고 사서삼경을 가르쳐야 할 것이오. 이 세 가지는 절의 사치를 줄이고 승려들도 일하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스님들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며 마땅히 했어야 하는 일들입니다. 소승들이 게으르게 관리하여 대군께서 직접 말씀하시게 만든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판사 중에서 제일 법랍이 많은지 이번에도 자은종판사가 대표로 대답한다.
"그럼 다음 방책들을 말하겠소. 넷째로 승려 된 자로서 수행은 뒷전이고 부녀자들과 놀고 도박하고 술 마시고 하는 이들을 환속시키시오. 종파의 위신이 걱정된다면, 그들이 파계되어 쫓겨나는 게 아니라 원효대사의 뜻을 따라 중생을 구제하고자 그들이 자진해서 환속한 것이라 하시오. 관에서 굳이 따지려 들지는 않겠소."
"소승들도 그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무리 지어 난봉부리는 자들을 쫓아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쫓아내는 게 쉬운가 어려운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소. 스님들이 해결하지 않으면 스님들 없이 해결하게 될 뿐이오."
강하게 딱 잘라 말하고 말을 잇는다.
"마지막 다섯째요. 말재주가 있거나 염불을 잘하거나 의술을 익히거나 혹은 다른 재주가 있는 영특한 이들은 승려 신분 그대로 군에 보내시오. 다친 병사들을 치료하기도 하고, 전투 전에 격려해주기도 하고, 죽은 병사들이 생기면 장례도 치러주게 될 것이오."
"불한당 같은 이들은 그냥 환속시켜 내보내는데 오히려 재주 있는 이들을 전쟁터로 보내야 한단 말입니까?"
"전조 고려가 몽골 군대와 싸울 때에는 승려가 활을 쏘아 적장을 해치우기도 했는데, 불가의 승려가 몸을 사리느라 다친 이를 보살피고 죽은 이를 장례 지내는 걸 못하겠다는 게요? 오히려 위험한 곳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하다 죽으면 그게 더 좋을 수도 있소!"
항의하는 말투도 아닌 질문이었지만 그 내용에 화가 난 양녕이 소리를 높인다.
분위기가 굳어진 가운데 양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승려가 나라를 위해서 전장에서 병사들을 돌보다 목숨을 잃었다고 하면 선비들이 불교를 보는 시선도 좀 달라질 것이오. 이차돈은 흰 피를 흘려서 계림 땅에 불교를 전파했는데, 젊은 승려들이 붉은 피를 흘려서 조선 땅의 불교를 지키는 것도 순교와 다를 것 없지 않소? 내가 말한 다섯 가지를 스님들께서 하시건 안 하시건 나라는 움직일 것이오. 불교에 무엇을 하러 움직이는 지가 달라질 뿐이지."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위협이 아닌,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말이 이어진다.
"전조 고려가 망해갈 때의 폐단이 아직도 남아있는 불교에게 살아남을 조언을 해주는 건 타락한 승려들을 아껴서가 아니오. 지금 남아있는 고찰들과 그 소장품들은 물론이고, 폐사지에 버려진 범종이며 불상들은 짧게는 고려, 길게는 삼한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물건들이오. 그런 귀한 것들이 몽골과의 전쟁에서 파괴되지 않고 남은 것이 적으니 나라의 보물을 보전하고자 기회를 주는 것뿐이오."
삭막해진 분위기 속에서 침묵이 잠시 흐르고, 자은종판사가 입을 열었다.
"소승들이 해보겠습니다. 아니,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조금만 막아주십시오. 천년을 이어온 해동의 법맥이 끊기지 않게 소승들이 반드시 하겠습니다."
"노승들이 땀 흘려 일하지 않은 업보로 젊은 승려들이 피를 흘리게 되는 것임을 기억해두시오. 그럼 다들 알아들으셨을 테니 난 이만 가보겠소."
통보에 가까운 말을 마친 양녕은 무어라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 * *
잠시 뒤.
한성부, 수강궁.
각 종파 판사들에게 일방적 통보를 마친 양녕은 집에서부터 챙겨왔던 짐을 들고 이방원을 방문했다.
"갑자기 어쩐 일로 왔느냐?"
"이것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또 뭔가 신기한 걸 가져온 모양이구나."
양녕은 흐뭇하게 웃는 이방원의 앞에 짐을 풀어놓았다.
책과 작은 항아리, 종이로 싼 꾸러미 사이로 양녕이 만든 칫솔이 굴러간다.
"이건 무엇이냐?"
이방원이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칫솔을 집어든다.
"돼지 털과 대나무로 만든 이를 닦는 솔입니다. 옷에 묻은 때가 옷을 삭히고, 나무에 묻은 때가 나무를 썩히듯 이에 묻은 때가 이를 썩히는 것이라 여겨 만들었습니다. 처음 만든 것을 제가 먼저 써 보았는데, 그냥 소금만 가지고 닦는 것보다 쉽게 잘 닦였습니다."
"손가락으로 소금을 찍어 닦으면 구석까지 잘 닦이지 않아 세게 닦다가 목젖을 건드려 헛구역질이 나는 일이 많지. 어디."
이방원이 칫솔로 입안 여기저기를 닦아 보더니 꺼내 들고 신기한 눈으로 본다.
"이거 좋구나. 내 오늘 자기 전 이를 닦을 때 제대로 써 보고 소감을 말해 주마. 이 항아리는 또 무엇이냐?"
이방원의 물음에 양녕이 항아리 뚜껑을 열자, 안에는 걸쭉한 액체가 가득했다.
"기름으로 만든 비누입니다."
"녹두나 팥이 아니라 기름으로도 비누를 만들 수 있단 말이냐?"
조선시대에 비누, 즉 세제라 하면 녹두나 팥을 가루 낸 것이었던 탓에 이방원이 의아하게 되묻는다.
"예. 아주까리기름과 잿물을 섞고 계속 저어서 만들었습니다. 몸에 물을 묻히고 이것을 찍어 발라 거품을 내어 문지르신 다음, 다시 물로 깨끗이 씻어 내십시오."
탄산칼륨이 주성분인 일반적인 잿물로 만든 비누는 탄산나트륨이 주성분인 해초를 태운 재로 만든 비누처럼 덩어리지지 않고 걸쭉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귀한 기름을 써서 만든 것이라 어차피 흘러 없어지지 않게 항아리에 담아 사용할 것이라 상관없었다.
"별 신기한 비누도 다 있구나. 이것도 내가 씻을 때 써 보마. 그럼 이 책하고 꾸러미는 또 무엇이냐?"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신나서 물어보는 이방원에게, 양녕이 침착한 목소리로 답한다.
"종기를 치료하는 방법을 제가 궁리해 쓴 책과, 종기 난 데에 붙이는 고약을 만들어 본 것입니다."
이방원이 눈을 살짝 크게 뜨고 양녕을 본다. 그 눈빛이 호기심에서 놀라움으로, 다시 흐뭇함과 멋쩍음이 섞인 복잡한 것으로 바뀐다.
"알고 있었구나."
"저번에 뵈었을 때 알았습니다."
이방원이 작게 허허 웃었다.
"네가 남들보다 안목이 날카로우니 내가 너의 아비라 해도 속일 수가 없구나. 그래. 그 종기의 치료법이 어떤 것이냐?"
"가장 중요한 것은 비누로 온몸을 자주 닦으시는 것입니다. 종기라는 것이 털구멍 속에 생기는 것이니 살갗의 기름이 털구멍을 막지 않게 잘 씻어내면 이미 생긴 것은 완화하고 새로 생기는 것은 줄일 것입니다. 이것은 종기가 생기기 전에 막는 것이니 가장 상책입니다."
"그래서 이 기름으로 만든 비누를 가져온 게로구나. 알겠다. 내 자주 씻겠다."
이방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누가 담긴 항아리를 만지작거린다.
"이 고약은 가래나무 껍질과 쇠비름을 달여 만든 것입니다. 둘 다 종기에 좋은 약재를 쓴 것이나 제 처방이 미흡할 수 있으니 내약방 의원들에게 먼저 주어 검토하게 하시고, 작고 심하지 않은 종기에 우선 쓰시기를 바랍니다."
"알겠다."
"마지막으로 종기가 터졌을 때에는 고름을 다 짜내고, 환부를 독한 소주로 깨끗하게 닦고 한동안 꿀을 드시옵소서. 지금 말씀드린 것과 더 자세한 것은 책에 써 두었으니 내약방 의원들에게 내려 읽게 하시면 될 것입니다."
양녕이 말을 끝내고도 한동안 이방원은 말없이 양녕이 준 책과 항아리를 가만히 쓰다듬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 이방원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구나."
"자식이 되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양녕의 대답에 이방원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퍼졌다.
"그래, 뭐 필요한 게 생기면 언제든 말하거라."
"사실 지금 바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이방원의 눈에 다시 호기심이 감돈다.
"지금 무관의 품계와 법도, 군사의 편제가 전조의 것을 조금씩 바꾸어 쓰기만 한 탓에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어지러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해 본 편제와 계급의 개선안을 이번 원정에서 정동군에 적용하여 보고 싶습니다."
"시험 삼아 해보고 좋으면 실제로도 써 달라는 얘기로구나. 네 말대로 고려의 것을 바꾸어 쓰는 통에 비슷한 말이 어떤 것은 품계를 가리키고 어떤 것은 관직을 가리키는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짧게 고민하고 흔쾌히 대답한다.
"알겠다. 이미 네가 정동군의 수장인데 어려울 것도 없지. 병법과 군사는 다른 것과 다르게 전쟁이 아니면 시험해볼 수 없는 것이니 이번이 마침 좋은 기회다. 네가 쓴 응적제승론이 실제로 효과를 보았다 하여 무관들의 평이 좋으니 반대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뭘. 내가 더 고맙지."
이방원의 손이 다시 양녕이 준 책을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