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13화
13화
1419년 9월 초순 모일 저녁.
한성부. 수강궁.
이도는 남은 업무가 바빴던 탓에, 새로 지은 이방원의 거처인 이곳 수강궁에는 이방원과 양녕만이 앉아 있었다.
"중요한 물길에 병력들을 두어 약탈하고 돌아가던 왜구들을 지나가는 족족 붙잡았다. 요즘은 거의 잡히지 않는 걸 보면 명나라에서 잡혀 죽은 놈들도 있어서 거의 남지 않은 모양이야."
"대마도에 돌아왔다 잡힌 놈들도 없었습니다. 우회한 놈들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남은 시간이 많지는 않다. 구주탐제가 보냈던 사신들을 원정이 시작될 때 모두 구류해 뒀는데, 돌아오지도 않고 소식도 없으니 일본에서도 슬슬 이상하게 생각할 때가 되었다. 못 해도 다음 달 중으로는 쳐야 할 것이야."
이방원이 말을 멈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다시 입을 연다.
"많이 놀랐느냐."
"약간 당황했을 뿐입니다."
온화해진 이방원의 목소리에 양녕이 답한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이제 백작으로 봉하기까지 했으니, 적어도 조정에서는 너를 오 태백과 비견되는 이로 인정한다는 것을 널리 알린 셈이야. 원래부터 너를 오 태백처럼 여기던 이들은 당연히 반길 것이고, 너를 좋지 않게 보던 이들도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내가 고공단보이고 주상이 계력인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너를 끌어내리지 못할 테니 말이다."
"아바마마……."
"너를 좋게 보는 사람이 더 많으니 더 걱정할 것도 없다. 네가 모르게 숨겼다가 작위를 내린 것도, 오 태백은 스스로 그 덕을 숨겼으니 너도 그냥 작위를 내리면 받지 않을 거라며 허조가 건의해서 한 것이다."
"대종백이 말입니까?"
"그래. 그 깐깐한 허조가 그랬다. 그러니까."
잠시 멈췄다가 걱정스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네 능력이라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맡긴 일이기도 하니, 원정을 성공시킨다면 당연히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구주도를 다 얻지 못해도 좋으니 무사히만 돌아오거라."
양녕은 그 걱정스러운 눈빛에서 어째서 이방원이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키지 않고 있는지, 큐슈 섬 전체를 가리키는 축자(츠쿠시)라는 이름을 놔두고 일본을 가리키는 부상이라는 모호한 지명으로 작위를 내렸는지 읽어냈다.
설령 이번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경상도에 속하지 않는 별도의 땅이며 일본의 섬에 속했던 대마도만을 가지고 있으면 부상백이라는 이름을 유지할 명분으로는 충분한 것이다.
"그렇지만 저 하나를 위해 너무 무리하신 것 아닙니까? 명나라는 조선의 공신들에게 공후백자남의 작위도 아니고 군호를 내린 것만으로도 무어라 한 적 있는 이들입니다. 원단을 환구단으로 고쳐 크게 짓고, 저에게 백작위를 내린 것을 알게 된다면 분명히 시비를 걸어 올 것입니다."
"중국이 무어라 하는 것에 다 벌벌 떨 것 같았으면 선대왕께 태조라는 묘호와 건원릉이라는 능호도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외교에 관한 것은 나와 주상이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걱정하지 말고 맡은 일을 하거라."
단호하게 말한 이방원이 잠시 심호흡을 한다.
"오늘은 이쯤 하자꾸나. 나는 조금 앉아 있다가 자러 갈 것이니 이만 가보아라."
갑자기 이야기를 멈추고, 앉아 있다가 자러 간다는 이상한 소리였지만 양녕은 굳이 물어보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임금들이 대대로 시달리던 고질병인 종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쯤에 등에 난 종기가 심해져 고생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대마도 원정이 원래 역사보다 더 커졌으니, 증세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소자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조용히 절하고 수강궁을 나와 집으로 가는 내내, 양녕의 머릿속에 바로 눕지 못할 정도로 아프면서도 내색하지 않던 이방원의 모습이 맴돌았다.
* * *
1419년 9월 초순 모일.
한성부. 군기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기감이었던 이곳은 양녕의 무기개발과 이어진 일본 원정으로 그 중요성이 올라간 끝에, 원래 역사보다도 50여 년 일찍 군기시로 승격되었다.
"안 계시던 동안 개발된 화포들은 이렇습니다. 생각보다 많아져서 분류하고 이름 짓는 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군기시의 실질적 장관인 군기시 정으로 또 승진한 최해산이 양녕에게 종이를 펴 보이며 물었다. 이미 배치된 산탄총 말고도 개인화기에서 소나 말로 끌어야 하는 대구경 포까지 다양하게 개발 중이었다.
"큰 것은 포, 작은 것은 총이라고 하면 어떻겠는가? 딱 봐서 알기 좋게 크기까지 앞에 붙여서 대포, 소총이라고 하는 걸세."
"기준은 어떻게 할까요?"
"혼자서 다룰 수 있으면 총. 아닌 걸 포라고 하지."
"알겠습니다."
종이를 받아가 여백에 깃털 붓으로 양녕의 말을 적고서, 다른 종이를 내민다.
"이게 마지막 종이입니다."
구형, 원통형, 원추형 등 여러 가지 모양의 탄알과, 직선으로 강선을 판 총열, 나선형으로 강선을 판 총열, 강선이 없는 총열 등 여러 조건을 바꾸어가며 명중률을 실험한 결과였다.
"총알을 하나만 쏠 때는 뒤가 우묵하고 옆에 골을 판 도토리 모양 총알을 나선형 강선을 판 총에서 쏠 때가 가장 잘 맞았고, 산탄을 쏠 때에는 강선이 아예 없는 것이 총알이 가장 적당하게 퍼졌습니다."
미니에탄과 나선형 강선이라는 두 기술이 당연히 가장 좋은 결과를 낸다는 것은 대마도로 떠나기 전에 실험을 제안했던 양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설과 실험, 통계라는 개념들을 조선에 좀 더 퍼지게 하기 위해서 모르는 척 실험해 볼 총알의 모양과 강선의 종류만 전해 주고 갔었다.
"총알은 납을 녹여 부을 거푸집만 바꾸면 바로 신형으로 바꿀 수 있겠고, 문제는 역시 강선소총인가?"
"그렇지요. 그중에서도 총열이 문제입니다. 총몸이야 나무를 깎으면 그만이니까요."
양녕이 알고 있는 강선소총 지식은 전부 철로 된 총열 기준이다. 구리로 된 소총 총열 자체가 원래 역사에서도 없다시피 했으니,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다.
"철로 총열을 만드는 기술은 완성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아직 멀었습니다. 무쇠를 부어 만들면 쉽게 깨지고 터질 테니 철판을 두들겨 말아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면 앞뒤가 뚫린 대롱 모양이라 또 뒤를 안 터지게 막는 게 문제입니다. 그 문제까지 해결하려면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당장 소총이 필요하니 그때까지는 구리로 만들어야 됩니다."
"구리로는 주물로도 문제가 없지?"
"구리는 원래 질긴 금속이라 주물로 만들어도 터질 걱정은 없습니다. 문제는 강선을 파는 거지요."
"강선이 왜? 재료가 단단해서 잘 안 파지는 겐가?"
최해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나중에 총열을 철로 만들면 모르겠지만 청동은 팔 만합니다. 그보다도 재료 상관없이 총열 안에다 파야 된다는 게 문제에요. 지름 한 치도 안 되는 구멍 속에다 파야 하지 않습니까."
"그럼 시험용 소총의 강선들은 어찌 판 겐가?"
"제일 솜씨 좋은 장인이 가느다란 끌을 총구에 넣어서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깎았습니다."
그 말에 양녕은 차마 얼마나 걸렸는지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양산은 절대로 못 하겠군."
"차라리 주물을 뜰 때 강선을 같이 떠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최해산의 제안에 양녕이 잠시 생각한다. 두들겨서 만드는 철제 총열에 강선을 팔 때는 깎아내는 방법만 가능하겠지만, 녹은 구리를 거푸집에 부어서 만든다면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다.
"좋아. 주물로 떠서 만드는 게 성공만 한다면 생산성이 더 좋을 테니, 깎는 것보다 먼저 시도해 보세."
"그럼 지금 만드는 거푸집에서 총열 안쪽 거푸집에 강선 모양 요철을 만들어서 주조해 보겠습니다."
"좋아. 대신 어떻게 될지 모르니 다른 것도 하나 더 시도해 보는 게 어떻겠나. 총열 안쪽 거푸집을 쇠로 만드는 걸세."
"쇠로요?"
"녹는점이 구리보다 높으니 녹은 구리를 붓는다고 녹지도 않고, 일반 진흙 거푸집처럼 꺼낼 때 깨지지도 않으니 다시 쓸 수도 있을 것 같네. 쇠막대 겉에 강선 모양 요철을 만들어서 거푸집으로 쓰고, 주조가 끝난 다음 돌리면서 빼면 되지 않겠나?"
양녕의 제안에 잠시 생각해 보던 최해산이 답한다.
"성공만 한다면 거푸집 만드는 수고가 훨씬 줄어들 거 같습니다. 그럼 강선 모양 요철이 있는 총열 속 거푸집을 진흙과 철제 두 개로 실험해 보겠습니다."
"좋네. 뭐 다른 문제는 없나?"
"화포를 만들 때 쓸 구리가 부족합니다."
양녕은 지나가듯 다른 문제가 없는지 물어봤지만 진짜로 문제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금은 무기가 급한 상황이라 구리를 화포에 우선 써야 해서 어쩔 수 없을걸세. 그래도 추후에 총열을 다 철제로 바꾸고 기존 구리 총열을 녹여서 쓰면 좀 괜찮지 않겠나?"
"총열을 쇠로 만드는 기술이 완성된다고 해도 화약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어가는 소총이나 철로 만들지, 화약이 많이 들어가는 대포는 구리로 안 만들면 발사하다 터질 겁니다. 결국 녹여 쓸 수 있는 건 구리 소총 총열뿐인데, 그거로도 감당이 안 될 만큼 부족합니다."
"그 정도란 말인가?"
지금의 소총 생산량이 결코 적지 않은 것은 군기시 수장인 최해산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런 최해산이 소총을 다 녹여도 부족하다고 할 정도면 진짜 부족한 것이다.
"말도 못 할 지경입니다. 호조에서도 국부론의 내용대로 동전을 주조해 유통해 보고 싶어 하는 모양인데, 화포를 만들 것도 부족해서 기약 없이 뒤로 밀렸습니다."
"이런. 동전이 있었지."
양녕이 짧게 탄식했다. 동전이라는 이름 그대로 화폐의 주재료는 구리다. 전국에 유통시킬 수 있을 만큼 동전을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양이 필요할 것이다.
"오죽하면 폐사지에 굴러다니는 범종이나 불상을 가져다 녹여 쓰자는 얘기까지 나왔을까요. 그나마 대군께서 마침 대마도에서 전리품으로 구리를 모아 보내셔서 그 소리가 들어갔습니다."
"그런 소리가 들어가고말고, 상왕 전하께서 절대로 윤허해 주지 않으실 걸세."
대표적 억불군주인 이방원이었지만 어머니 신의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궁 내에 불당을 짓기도 했고, 아들 효령이 불교에 빠진 것을 신하들이 지적할 때에도 감싸 준 적이 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도 고을 수령들이 폐사지에서 불상을 녹여 쓸 요량으로 거두어 올려서 군기감까지 온 것을, 또 이러면 처벌한다고까지 하시면서 승록사(불교 업무 관청)로 보내신 적이 있었지요. 이번에 대군께서 보내신 전리품 중에서도 전조 고려 시절에 왜구들이 약탈해간 것으로 밝혀진 물건들은 전부 원래 있던 절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역시 그렇지. 앞으로 더 그러시면 그러셨지 덜하시진 않을 게야."
양녕이 씁쓸하게 말한다. 이방원이 막내아들 성녕대군을 14세의 나이로 잃고, 그 무덤 근처에 암자를 지은 지 1년 반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다. 혈육을 잃은 상실감에 종교에 의지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지만 화약 생산이 늘어나면 자연히 화포 생산도 늘리자는 소리가 나올 것이고 동전도 새로 만들어야 하니, 멀쩡한 절이면 몰라도 폐사지의 범종과 불상은 얼마나 갈지 모르는 일입니다. 지방관이 작정하고 녹여서 종인지 불상인지 모르게 만든 다음 조정에 올려 보내면 모르는 것 아닙니까."
최해산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양녕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원정이 잘 풀려서 큐슈를 영토로 만든다면 구리광산은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양녕이 지금 생각하는 것은 폐사지라는 단어에서 떠올린 다른 것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나저나 내가 자네하고 얘기하다 떠오른 게 있어서 먼저 좀 가 보겠네."
"예, 살펴 가십시오. 시험 주조가 완료되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참, 군기시에서 쓰는 잿물이나 기름을 좀 얻을 수 있겠나?"
"잿물이랑 기름을요?"
최해산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