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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2화 (12/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12화

12화

1419년 8월 초순 모일 오전.

대마진. 여량면 관아 겸 정동군 지휘소

"꼬리표에 왜저라 적은 것은 일본 닥나무의 씨앗과 묘목이니 키워서 조선 닥나무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고 좋은 것을 쓰면 될 것이다."

지휘소 마루에는 자루에 담긴 씨앗과 다듬은 목재, 멍석으로 뿌리를 감싼 묘목이 종류별로 쌓여 있었다. 양녕은 거기 달린 꼬리표가 맞는지 하나씩 확인하며 바쁘게 깃털 붓을 놀렸다.

"왜삼과 왜회라 적은 것은 각각 삼나무와 편백나무의 씨앗과 목재, 묘목이다. 두 나무 다 조선 땅에서는 살지 않고 일본에서만 자라던 나무인지라 추위를 얼마나 견딜지 알 수 없다. 일본과 날씨가 비슷한 삼남의 따뜻한 지방을 골라 먼저 심어 보아야 얼어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다 적어 내려간 양녕은 깃털 붓을 내려놓고 종이를 쭉 살펴보았다. 아직까지 조선에 없던 유용한 식물자원들을 대마도에서 최대한 긁어모아 만든 목록이었다.

"이상 없군. 이 목록도 같이 보내면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대군."

옆에서 보조하던 이종무가 종이를 받아 문서함에 넣었다.

"그나저나 세상에 이런 나무도 있는지 몰랐습니다. 어디에 쓰이는 목재입니까?"

이종무가 바닥에 놓인 삼나무와 편백나무 목재를 만져보며 물었다.

"그 두 나무는 빠르고 곧게 자라오. 물에도 강하고, 향이 있어 잘 썩지도 않소. 가볍고 연하면서도 질겨서, 조각하기도 좋고 종이처럼 얇게 켤 수도 있지. 이 집도 편백으로 지었을 것이오."

그 말에 이종무가 기둥과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좋은 나무입니다. 대군께서 조선으로 보내시는 이유가 있군요."

"그렇소. 대신 꽃가루에 독성이 있어서 들이마시면 눈과 코를 괴롭게 하고, 나무가 무른 탓에 군선을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소."

"왜구들이 타는 배는 다 이 나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다 박살 났지 않소. 왜인들이 배를 이런 나무로밖에 못 만들면 우리야 기쁜 일이지."

양녕이 씨익 웃었다.

"대군. 다 마치셨습니까? 준비가 끝났습니다."

때마침 뒤뜰 쪽에서 최윤덕이 나오며 물었다.

"마침 다 끝낸 참이오. 가도록 하지."

마루에서 내려와 뒤뜰로 가는 양녕의 뒤로 이종무가 따라붙었다.

"도절제사가 도와줄 것이니 공께서는 그냥 건물에서 쉬셔도 좋소."

"제가 60년을 살면서 보고 들은 신기한 것보다 대군께서 지난 1년간 하신 신기한 것이 더 많습니다. 잘 봐두었다가 나중에 손주들한테 얘기해 줄 겁니다."

이종무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뒤뜰에는 대장간에서 볼 법한 화로와 풀무가 설치되어 있고, 그 옆에는 도가니와 집게 같은 기물들도 놓여 있었다.

"그 덩어리는 납입니까?"

양녕이 그 기물들 중에서 거친 금속 덩어리 하나를 집어 들어 살피자 이종무가 묻는다.

"섬 남부 은광에서 캔 은광석을 부수고 물로 일어서 추려낸 다음, 납과 같이 녹인 것이오. 은의 성질이 납이랑 잘 섞이는 탓에 이렇게 한 덩어리가 되지. 이런 금속 덩어리가 되면 두들겨서 모래 같은 불순물을 빼내기 좋소."

말을 하며 거친 금속 덩어리를 내려놓고 옆에 있는 반질반질한 금속 덩어리를 집어 든다.

"그러면 이렇게 되오."

"하지만 그러면 불순물은 빠져도 납이 섞여 버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들을 차려놓은 것이오."

양녕이 도가니 안에 재를 잔뜩 담고 꾹꾹 눌러 다지더니, 그 위에 반질거리는 금속 덩어리를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도가니를 집게로 집어 안에 불길이 가득한 화로에 집어넣었다.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새 우는 소리, 숯 타는 소리 사이로 가끔 양녕이 화로를 살피며 풀무질을 하는 소리만이 주변을 채웠다. 이종무도 최윤덕도 말없이 화로를 볼 뿐이다.

양녕이 시도 중인 것은 연은분리법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연산군 대에 개발된 것이었지만 지금 양녕이 쓰는 방식은 그보다도 더 계량된 방식이다.

도가니에 재를 깔고 은과 납의 합금인 귀연을 올리고 가열한다. 귀연이 녹아 재 위에 표면장력으로 둥글게 맺힌 다음에도 공기를 더 불어 넣으며 가열하면 납은 산화납이 되어 표면장력을 잃고 순식간에 재에 스며들고, 재 위에는 표면장력으로 둥글게 뭉쳐진 은만이 남는다.

"되었군."

납이 다 스며든 것을 확인한 양녕은 조심스럽게 집게로 도가니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깥바람에 어느 정도 식은 은을 젓가락으로 집어 찬물에 넣었다 꺼내자, 젓가락 끝에서 작은 은 조각이 새하얀 금속광택을 내며 빛났다.

"이렇게 하면 은만 남소. 납은 밀타승(일산화납)이 되어 재에 스며들어있으니 나중에 재를 물로 녹여내면 분리할 수 있소. 금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정제할 수 있고."

"……이건 손주들한테는 말 못 하겠군요."

"일꾼을 들이지 말고 저에게 시키신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진지한 표정이 된 이종무와 최윤덕이 은 조각들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

귀금속의 정련법은 중요한 국가 기밀이다. 특히나 거대한 경제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은을 필요로 하는 명나라와, 광산은 풍부하지만 정련기술이 없는 일본 사이에 끼인 조선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 * *

며칠 뒤 오후.

대마진 여량면 관아 겸 정동군 지휘소.

"명나라가 승인했다고 하면 바로 구주도를 치실 생각이십니까?"

조정에 보낼 영귤을 버들고리에 담던 이종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양녕을 한성으로 부르는 이방원의 명이 오늘 아침 배로 도착했지만, 군사적 외교적으로 중요한 내용인 탓인지 명나라의 반응은 적혀 있지 않았다.

"조선이 아직 국력이 크게 갖춰지지 않은 상태긴 하오. 하지만 빨리 칠수록 좋은 것도 사실이오."

돼지 털과 가느다란 대나무로 칫솔을 개발 중이던 양녕이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지금 일본국왕(쇼군)인 원의지(아시카가 요시모치)는 아들이 원의량(아시카가 요시노리)이라는 자 하나뿐이오. 그런데 그 원의량이라는 자는 자식은 없고 몸이 허약한데도 과음을 즐긴다고 하오."

"일본국왕의 외동아들이 후사도 없고 건강을 돌보지 않는다니, 그러다 요절이라도 하면 계승을 둘러싸고 싸움이 나는 것 아닙니까?"

원래 역사에서 오닌의 난이 일어났던 흐름을 비슷하게 짚은 이종무의 말에 양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뿐만이 아니고 각 지방 영주들도 지난 남북조 내전으로 갈라져 싸운 앙금이 남아서, 아니면 종법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계승을 둘러싸고 가문 안팎으로 다투느라 어지러운 판국이오. 아무리 일본국왕이 봉합하려 해도 백 년도 되지 않아 일본 땅이 혼란에 빠지겠지."

"그렇다면 혼란에 빠지기를 기다리며 그동안 힘을 모았다가 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영주들이 서로 경쟁하는 난세를 거치면 그 힘이 강성해지기 마련이오. 군사를 훈련시키고, 논밭을 넓히고, 새 기술을 받아들여야만 다른 영주를 이길 수 있으니 말이오."

"중국이 춘추전국을 거치며 사상과 문물이 발전한 것처럼 된다는 말씀이군요."

"맞소. 거기다 춘추전국의 끝에 이민족들마저 스스로를 중국이라고 여기고 하나로 합쳐지려 한 것처럼, 아직은 어느 지역 사람이라는 정체성만이 있는 왜인들도 전란의 시대를 거치면 스스로를 일본이라는 큰 나라의 일부로 여기게 될게요. 군사력과 재력을 모두 키운 왜인들이 한 덩어리로 뭉친다. 조선 입장에서는 정말로 무서운 일 아니겠소."

"그렇다면 대군께서 계획하시는 것은……."

"단순히 왜구를 쳐 제압하고 땅을 넓히는 게 아니오. 일본이 강성해지고 구주도가 완전히 일본이 되기 전에 잘라내어, 일본은 약하게 만들고 구주도는 온전히 조선이 되게 만들 것이외다."

저녁밥으로 무엇을 먹을지 얘기하듯 느긋한 말투로 어마어마한 얘기를 한 양녕은 다시 만들던 칫솔을 집어 들었다.

* * *

1419년 9월 초순 모일.

경기도, 광나루.

광나루 선착장에 내린 양녕을 반겨준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오시는 데 힘드신 것은 없으셨습니까."

깡마른 몸에 구부정한 자세, 날카로운 눈매의 예조판서 허조가 수행원들 사이에 서 있었다.

"어쩐 일로 대종백(예조판서)께서 직접 나오셨소?"

"조선의 대군이자 정동군 삼도 도통사를 맞이하는 일입니다. 판서가 직접 나온다고 뭐 이상할 거 있겠습니까. 타시지요."

양녕은 허조가 가리킨 말에 올라탔다.

보통은 관원을 보내는 자리에 병조판서가 직접 나온 이유로는 조금 미심쩍긴 했지만, 직설적이고 깐깐한 원칙주의자인 허조에게 괜히 원칙이나 의전 얘기를 꺼냈다가 잔소리 듣기는 싫어서 더 묻지는 않았다.

"새로 건물이라도 짓는 모양입니다?"

대신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흥인문 앞에 공사 자재를 든 일꾼들이 분주하게 다니는 것을 보고 말을 걸었다.

"원단의 이름을 환구단으로 되돌리고 도성 남쪽으로 위치를 옮겨 증축하는 공사입니다."

"환구단을요?"

덤덤한 허조의 대답에 오히려 양녕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원래 역사에서 조선 초 만들어졌던 환구단은 제후국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지적을 계속 받아 원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결국에는 폐지되고, 고종 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세워졌다.

"대군 덕분입니다."

허조의 말에 양녕은 잠시 눈치를 보았지만 반어법으로 뭐라 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아 가만히 들어 보았다.

"대군께서 오 태백과 같다면 상왕 전하께서는 나라의 기틀을 잡으신 것이 고공단보와 같고, 주상 전하께서는 현명하심이 계력과 같습니다. 이처럼 조선에 성인이 나타나심이 주나라와 같으니 마땅히 그에 맞는 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의견이 조정에서도 지방에서도 계속 올라왔습니다."

"그래도 대종백께서 용케도 허락하셨구려."

허조는 주공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주례를 비롯한 예법에 깐깐한 인물이다. 예조참의 시절에 제후국이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이 예법에 맞지 않으니 동방의 신에게만 제사 지내자는 청을 올렸던 적도 있었다.

"허락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건의한 것인데."

뜻밖의 대답에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다시 또 이상한 걸 눈치챘다.

"창덕궁으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맞게 왔습니다."

위엄 있게 서 있는 광화문 앞에서 자연스럽게 허조가 내리고, 양녕도 일단 따라 내렸다. 경복궁을 꺼리는 이방원이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있는 것 같았다.

"공적인 의식이 거행 중인 것 같은데 차라리 창덕궁에 가서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소?"

"괜찮습니다."

무슨 일인지 슬쩍 떠봤지만 허조는 딱 잘라 대답하고 광화문으로 들어갔다.

양녕도 반쯤 포기하고 따라 들어가고, 다음 순간 사각에서 튀어나온 젊고 건장한 관원 셋에게 붙잡혔다.

"으음?"

"저희가 뫼시겠습니다."

양녕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옆으로 데려가 좌우에서 붙잡고 옷을 벗기고, 한 명은 조복과 금관을 들고 와 입히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 이게 무슨, 이보시오 대종백?"

"그럼 저는 외람되오나 먼저 들어가 있겠으니, 다 입으시고 안내를 받아 들어오시옵소서."

허조가 태연하게 꾸벅 인사하더니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조복으로 갈아입은 양녕이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근정전 앞의 조정이었다. 좌우에는 이미 금관조복을 차려입은 신하들이 도열해 있었고, 그 끝에는 면류관을 쓰고 장복을 입은 이방원과 이도가 앉아 있었다.

"양녕대군 이제는 가까이 오라."

이도의 근엄한 목소리를 신호로 양녕은 천천히 걸어가, 월대 앞에 깔린 화문석 위에 꿇어앉았다. 양녕이 자세를 잡자 이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든 종이를 읽기 시작했다.

"양녕대군 이제가 왕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를 쳐 해적을 부수고 계림의 옛 땅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바다 건너 섬에는 해적들의 근거지가 남아 있다."

명 황제가 결정한 내용을 양녕에게 전달하는 자리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격식이 잡혀 있다는 점 말고도 양녕이 위화감을 느낀 점은, 분명 정동군의 일은 군사 분야일 텐데 이방원이 아닌 이도가 읽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명나라의 황제가 섬 오랑캐를 쳐 복속시키는 일을 윤허하였으니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이에 일본 땅을 가리키던 옛 이름에서 따오고 또 주나라가 오나라를 봉한 옛 사례를 따라 양녕대군 이제를 부상백으로 봉하니, 군사를 이끌고 구주도를 쳐 그 땅을 영토로 삼아 다스리도록 하라."

그 모든 궁금증은 양녕이 백작으로 봉해지며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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