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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1화 (11/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11화

11화

"명의 권세를 빌어 조선이 구주도를 전부 얻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입니다. 이 문서를 명나라에 보내면 명에서는 구주도 전체가 해적의 근원지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때 해적의 뿌리를 아예 뽑으러 조선이 구주도를 정벌하여 다스리겠다고 하면 됩니다."

당황한 이방원과 다르게 양녕은 침착했다.

"우리가 지금 왜구를 잡으러 대마도를 점령하기는 했다. 하지만 구주도가 아무리 해적의 근원지라는 증거가 있다 해도 명백히 일본에 속해있는 섬이고, 그 크기가 결코 작지 않은데, 명이 용인을 해 주겠느냐?"

"아바마마께서 걱정하시는 것도 당연하나, 지금이라면 그 둘 다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기야 네가 되지도 않을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지. 그 이유를 들어보자꾸나."

"첫째로 일본이 명의 심기를 거스른 상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죽은 전대 정이대장군(쇼군) 원의만(아시카가 요시미츠)은 명나라에 조공을 하고자 사신을 보내어, 일본국왕으로 책봉 받았습니다."

"그런 내막이 있었군. 일본이 보낸 국서에 일본국왕이라는 이름이 보이기 시작한 때를 생각해 보면, 영락제가 즉위한 이후겠구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원의만의 아들 원의지(아시카가 요시모치)가 그 자리를 이었는데, 왜황을 두고 명황제의 책봉을 받았다 하여 비판하는 소리가 커 결국 책봉관계를 끊었습니다."

"아니, 실권도 없는 왜황 때문에 조공의 이득을 버렸단말이냐?"

영락제에게 낮추고 들어간 대신 이후 조공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게 만든 당사자인 이방원에게는 당황스러운 소리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 책봉을 끊는 것도 명이 보낸 사신을 쫓아내고, 다음에 온 사신을 또 쫓아내어 끊은 것입니다."

영락제의 성격과 그 정복정책을 아는 이방원은 그 말만 들어도 등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왜구까지 들끓었으니, 진짜로 조선을 앞세워 일본을 치겠다 할 뻔했군. 오히려 명에서 우리가 일본을 친다 하면 좋아할 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렇다 해도 구주도를 얻어 조선의 땅이 넓어지는 것은 명이 원하지 않을 수 있다. 그건 어찌 하겠느냐?"

"구주도가 결코 작은 섬이 아니지만, 그 사실을 명은 잘 모를 것입니다."

"모른다고?"

"예. 일본 남쪽에 작은 섬(오키나와 본섬)이 있고 또 그 열 배 가까이 큰 섬(대만섬)이 있습니다. 작은 섬이 곧 유구국인데, 명 태조가 이름을 붙이기를 작은 섬을 대유구라 하고 큰 섬을 소유구라 하였습니다."

"반대가 아니냐?"

"제가 잘못 말한 것이 아니고, 정말로 코앞에 있는 섬과 조공을 바치는 나라의 크기도 제대로 몰라 반대로 알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과는 더 사이가 머니 아마 작은 섬 세 개로 되어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설령 명나라가 일본이 작은 섬이 아님을 안다고 하더라도 조선이 요동이나 여진족에게 영향을 끼치려 드는 대신 남쪽 섬으로 힘을 쓴다고 하면 명나라에서도 내심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양녕의 설명을 다 들은 이방원이 잠시 생각하고 말한다.

"그리 잘 풀린다면 좋겠지만 안 될 경우에는 어찌 할 것이냐?"

"어찌 되건 이득을 볼지언정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명의 승인을 받고 구주도를 정복하면 가장 좋고, 정복하지 못하더라도 명분이 있으니 언제라도 일본을 압박할 수 있습니다. 설령 승인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저 일본에 알리지 않고 대마도를 정벌한 선에서 끝내면 됩니다."

"그 말이 맞구나. 그러면 내가 한성에 돌아가 주상과 중신들과 논의하여 보겠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몸조심하며 지내고 있거라."

"예, 아바마마."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자세를 잡던 이방원이 다시 앉았다.

"내 정신도 참.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구나. 내가 직접 내려온 이유가 이것인데."

옆의 문서함을 열어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정벌이 다 끝나고 삼도 도통사 자리가 없어져 버리기 전에 주어야 한다고 주상이 강하게 밀고 나가 정해진 것이다. 오늘 네가 말한 것을 듣기 전에 정해진 것이라 앞으로 어찌 될진 모르겠지만 일단 진행하겠다."

이방원이 펼치는 종이에 왕지라 적힌 것을 얼핏 본 양녕이 왕명에 절을 하려 일어나려 했지만 이방원은 손을 들어 말렸다.

"되었다. 먼 길 오느라 힘들 텐데 앉아서 듣거라."

"하오나……."

"상왕도 임금이니 내 말도 임금의 명이다. 다만 앉아서 자세를 바로 하고 듣거라."

이방원은 약간의 억지를 부리고는 관교를 읽어 내려갔다.

"대마는 본디 옛 계림의 땅이었으나 신라가 쇠락하여 다스림이 미치지 못하고, 빈 땅에 왜인들이 넘어와 살며 그 풍습이 흐트러진 지 오래되었다."

양녕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들었다.

"……그리하여 이제 조선의 대군이 손수 그 땅을 쳐서 왜구를 깨고 바다를 평안하게 하였으니, 대마도의 왜인들을 비우고 대마진(鎭, 군사행정구역)을 설치하여 영구히 조선의 땅으로 삼을 것이며, 양녕대군 이제를 대마지진사로 임명하니, 그 다스림에 흐트러짐이 없게 하라."

'이제 첫 시작이다.'

생각보다 조금 이르게, 양녕은 대마진의 지사 자리를 얻게 되었다.

* * *

1419년 7월 중순 모일 오전.

대마진. 여량면 관아 겸 정동군 지휘소.

그로부터 며칠 뒤, 양녕은 밀린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이방원이 한성으로 올라가면서, 오랜만에 육지에 왔으니 잘 먹고 푹 자고 가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결국 며칠 머무르다가 어제 돌아온 참이었다.

"……그리고 군량도 아낄 겸 병사들 일부는 육지에 보내 쉬게 하였습니다."

"어째 좀 한산해졌다 했는데 그런 이유였군. 나 없는 동안 도체찰사께서 수고가 많았소."

"맡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제 화전민들을 데리고 오실 때 같이 싣고 오신 저 돼지들은 무엇입니까? 대마도는 사람 먹을 것도 적은 섬이라 돼지를 키우기에는 맞지 않을 것입니다."

이종무가 양녕에게 물어보는 그 순간에도 바깥에서 돼지 소리가 작게 들렸다.

"아, 저 돼지들은 키우려고 데려온 건 아니오. 주상께서 보내신 것이지. 내가 섬으로 원정 나가 있느라 한 달가량 고기를 못 먹어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 되어 보내신 것이라 하오."

"주상께서 그러신 것이라면 납득은 갑니다만, 저렇게 많이 보내실 필요가 있습니까?"

"내가 병사들 먼저 먹이느라 고기를 적게 먹을까 우려하셔서 그러셨을 게요. 마침 육지로 쉬러 못 가고 남은 병사들 기운도 돋워 줄 겸, 며칠 내로 잡아서 잔치를 열어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그 며칠간은 병사들이 볼일 본 것으로 돼지들을 먹이겠습니다."

"좋소. 그럼 이제 섬을 개발할 계획으로 넘어가지."

옆에 서 있던 종사관이 탁자 위에 대마도 지도를 펼친다.

양녕은 막대를 들고 천모만 입구를 짚었다.

"우선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두지포 요새의 병사들을 시켜 천모만 입구 적당한 곳에 봉수대를 설치하시오. 봉화를 보내는 목적 말고 본토에서 오는 배가 천모만을 찾는 표식도 겸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럼 두지포를 맡은 좌군 절제사 박실에게 시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양녕이 이번에는 섬 남부를 짚었다.

"다음으로는 섬 지리를 잘 아는 포로들을 끌고, 만일 병사들 가운데 광맥을 볼 줄 아는 이가 있으면 우선적으로 추려서 섬 남부 사수천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사방을 수색하시오. 아마 버려진 은광이 있을 것이오."

양녕의 말에 이종무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지금 명나라에서 금과 은을 조공품목으로 요구하여 조정에서 구하는 데 어려움이 큽니다. 그런 상황에 은광을 확보했으면 그 공적이 큰데 어째서 지금까지 말씀하지 않으신 겝니까?"

"내가 말했다시피 버려진 은광이오. 거기서 은이 얼마나 나올지도 모르는데 그걸 공적으로 올릴 수는 없지. 다만 일본은 은이 풍부한 땅이고 조선은 은이 부족한 땅이니, 일본인들 보기에 돈이 되지 않아 버린 은광이 우리에게는 쓸 만한 은광일 수 있어서 일단 한번 조사해 보는 것일 뿐이오. 은이 쓸 만하게 나오면 그때 공적으로 올리면 되지 않겠소?"

'은광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대신들이 나한테 이 섬을 맡겼을까.'

변방의 척박하지만 은광이 있는 섬인 것보다, 변방의 척박하기만 한 섬으로 알려져 있을 때 자신이 대마도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럼 나는 농지 확보하는 일을 하러 갈 테니 나머지는 맡기겠소."

잠시 뒤.

대마진, 훈내곶.

후나코시라는 일본어의 음차였지만, 공교롭게도 실제로도 지형이 곶이었던 탓에 선월이라는 독음 대신 훈내곶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져 버린 이곳에 조선에서 건너온 화전민들이 모여 있었다.

삼군 도절제사 최윤덕을 대동하고 훈내곶에 도착한 양녕은 화전민들을 둘러보았다.

숫자도 제법 많고 행색도 다양한 것이, 정말로 전국 각지에서 잡아서 보낸 모양이었다.

"자, 내가 여기의 수령인 양녕대군이다. 다들 너무 겁먹지 말거라."

여전히 다들 불안해하는 눈치다.

다들 살던 곳을 떠나 바다 건너 이곳까지 온 것이니 이해는 하지만 계속 이렇게 놔둘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양녕은 한 청년에게 질문했다.

"다들 어찌하다 여기에 오게 되었느냐? 맨 앞에 선 네가 말해 보아라."

지목된 청년이 화들짝 놀라더니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라에서 법으로 금하는 화전을 하다가 원님한테 잡혀서 왔습니다요."

"그래, 내가 여기 대마도를 다스리는 데 특별히 화전에 능한 이들이 필요하여 너희에게 벌주는 것을 면하는 대신 여기 보내라 한 것이다."

약간의 과장을 섞어 먼저 채찍을 쓴다.

"대신 이곳은 변방의 섬이라 한동안은 군역이 면제되고 세금도 적게 물릴 것이다. 무엇보다 육지와 다르게 범이 없으니 호환을 당할 걱정도 없을 것이야."

이어서 내민 당근.

양녕의 말에 산에서 화전민으로 사느라 호환이 가장 무서운 일이었던 탓인지, 불안하면서도 기대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럼 너희도 어제 도착해서 지리를 잘 모를 테니, 걸어가면서 설명해 주겠다. 천천히들 따라오며 듣거라."

양녕이 천모만 해안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최윤덕과 화전민들이 그 뒤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우선 기존에 왜인들 마을이 있던 곳에 자리 잡고 살 이들은 육지에서 하던 대로 하면 된다. 왜인들이 쓰던 밭을 써도 되고, 화전을 해도 좋다. 그자들은 나라에서 정한 세금의 반만 거둘 것이다."

등 뒤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들린다.

"그리고 새로 마을을 만들고 화전을 하는 이들은 오십 년간 세금을 면제할 것이다."

등 뒤의 술렁임이 커진다.

"단, 조건이 있다."

화전민들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려 조건을 말한다.

"여기 천모만에 면한 지역에 마을을 만들고 화전을 해야한다. 우선순위는 지금 지나온 훈내곶과, 천모만 입구 북쪽에 있는 인위라는 곳이다. 두 지역에서 천모만을 면한 땅이라면 마음대로 나무를 베어도 좋다. 마음대로 화전을 만들어도 좋다."

거기까지 말한 양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한 뒤 다시 말했다.

"아니, 화전은 마음대로가 아니라 힘닿는 한에서 가장 넓게 만들어라. 내가 종자는 최대한 구해줄 테니 뿌릴 씨앗이 모자랄 걱정은 하지 마라. 그리고 그 화전에는 조를 심어서 키워라."

"저, 대군 마님."

노인 하나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말을 걸었다.

"화전에 불을 놓고 조를 먼저 심으면 지력이 빨리 쇠해 버립니다."

"알고 있다. 이 지역에서 화전을 하려면 늦여름부터 농사를 시작해서 봄에 거두어야 하는데, 여기는 남쪽 섬인 탓에 여름에 태풍이 자주 온다. 폭우가 오면 산사태가 나기 쉬운데, 다음 해를 기대하고 지력을 남겨 두었다가 산사태로 밭이 없어지면 아깝지 않느냐."

"그러면 조를 먼저 심고 거둔 다음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잘 관리를 하겠습니다."

"굳이 그럴 것 없다. 천모만에 널린 것이 화전 만들 땅인데 무엇 하러 그런 수고를 하느냐. 산사태가 나건 말건 냅두고 다음 해에 새로 화전을 만들어라. 아니, 오히려 산사태가 많이 나면 좋으니 천모만에 면한 곳 중에 경사가 너무 급해서 밭을 못 만드는 곳이라도 일단 불을 놓아라."

"쇤네가 배운 것이 없어 대군 마님의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양녕은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로 돌았다. 노인은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양녕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산을 무너뜨려 천모만을 메워 다 땅으로 만들 것이야."

너무 자연스럽게 어마어마한 소리에 듣고 있던 화전민들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최윤덕까지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놀란 최윤덕이 물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산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만이 메워지면 좋고, 만을 메우지 못하더라도 산이 깎여 구릉이나 평지가 되면 좋은 농지가 되지 않겠소?"

양녕은 태연하게 대답하고 다시 화전민들에게 말했다.

"물론 산사태만 기대하지 말고 남는 시간에 산 흙을 깎아다가 바다에 버리면 더 빠르고 좋겠지. 일을 하는 만큼 무조건 땅이 생기는 것이고, 그렇게 생긴 땅은 개간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어떤가?"

땅을 준다는, 농민이 가장 기뻐할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화전민들 사이에 걱정스러운 수군거림이 오갔다.

"왜들 그러느냐?"

"산과 바다를 거칠게 다뤄서 동티가 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노인의 말에 양녕은 피식 웃었다. 거친 환경에서 재난을 마주하며 살던 이들이다. 그런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다들 잘 들어라!"

양녕은 당당한 표정으로 외쳐 화전민들을 주목시켰다.

"여기는 이제 조선의 땅이고, 주상전하의 명을 받아 대군인 내가 다스리는 땅이다. 감히 산신과 해신이 나라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하고 백성들을 괴롭힌다면."

허리춤에서 날이 시퍼렇게 선 환도를 뽑아 치켜들었다.

"내가 직접 베어 버릴 것이니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라!"

화전민들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많이 안심한 분위기였다.

서낭당이나 뒷간을 철거할 때에도 서낭신이나 측신이 해코지를 하지 못하게 어명이라고 외친 다음 헐었던 것이 조선이다. 하물며 대군이 직접 말했으니 화전민들이 안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산신이건 해신이건, 배 타고 오는 왜적이건 너희를 괴롭히는 것은 내가 책임지고 모조리 베어버릴 것이다. 너희는 안심하고 마을을 만들고 농사를 짓고 아이를 낳아 키워라. 그리하여 이 섬을 영원히 조선의 땅이 되게 만들어라."

화전민들의 존경이 담긴 시선을 받으며 양녕이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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