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10화
10화
1419년 6월 하순 모일.
대마도. 여량. 정동군 지휘부.
양녕은 뜨거운 재에 묻어 두었던 큼직한 깃털을 꺼냈다.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칼을 들고 뿌리 쪽 끄트머리를 잘라내고 대각선으로 깎아 냈다. 그렇게 깎아낸 면을 곡선으로 다시 깎아 내고, 깃대 방향으로 칼집을 살짝 넣었다.
"무엇을 만드십니까? 화살을 만드시나 했는데 아닌 것 같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최윤덕이 물었다.
"이거 말이오? 붓이오. 천축이나 서역에서는 대나무로 이런 걸 만들어 글씨를 쓴다는군."
양녕이 만든 것은 정확히는 서양식 깃털 펜이었고, 예시로 든 아랍권 필기구인 칼람과 큰 연관은 없었지만 회회인 핫산을 써먹기 위해 적당히 갖다 붙였다.
"이걸로 글씨가 써진다니 신기하군요."
"나도 처음 만들어 봐서 장담은 못 하오. 그럼 어디."
양녕이 조심스럽게 끄트머리에 먹물을 찍어 종이에 글씨를 써 보았다.
끼릭거리는 소리를 내며 써지는 '天地玄黃' 네 글자. 일반적인 붓 중에서 가장 작은 걸 숙련자가 잡더라도 쓰기 어려울 만큼 가느다란 선이었다.
"되는군. 공께서도 한번 써 보시겠소?"
양녕이 미소 지으며 깃털 붓을 내밀었다. 최윤덕이 받아서 글씨를 써 보더니 눈이 커졌다.
"실로 대단합니다. 이리도 쉽고 가늘게 글씨가 써진다니, 이 깃털 붓이라는 것을 쓰면 종이와 먹을 아끼는 데에 큰 쓰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 평해 주니 고맙소. 그럼 내 조만간에 만드는 법을 써서 견본과 같이 줄 테니 조정에 장계를 올릴 때 같이 보내주시오."
"알겠습니다."
"어디 그럼."
최윤덕과 대화를 마친 양녕은 의자를 바닥에 끌며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갔다. 어느새 미소는 사라지고 차가운 표정만 남았다.
"눈이 풀렸구만."
양녕의 말에 옆에 있던 병사가 바가지로 찬물을 떠, 나무에 벌거벗은 채 묶인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의 머리에 부었다.
"한숨도 못 잔 게 사흘? 나흘째인가? 어때, 좀 생각이 바뀌었나?"
물에 푹 젖은 채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사다모리가 입을 열었다.
"알겠소, 시키시는 대로 할 테니 제발……."
"진작 그랬어야지."
양녕의 손짓에 병사가 밧줄을 풀고, 쓰러지듯 주저앉은 사다모리의 어깨에 벗겨 두었던 옷을 덮어 주었다.
다른 병사가 종이와 붓, 먹이 담긴 벼루를 가져와 사다모리의 앞에 놓았다.
"내가 말하는 대로 받아 적어라"
양녕의 말에 사다모르가 순순히 붓을 들었다.
"미천한 해적인 소 사다모리가 삼가 고합니다. 대마도주이면서 수하를 단속하는 일을 소홀히 하여 해적이 상국에 들끓게 하다 토벌당하게 되었으니 죽어 마땅한 죄임을 압니다. 죄가 이미 천근과도 같으나 해적들에 대해 아는 것을 다 사실대로 고하여 그 죄를 조금이나마 씻고자 합니다."
"제가 아는 해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츠시마(대마도)와 이키(일기도) 두 섬의 해적무리들은 주로 조선을 약탈하였으며, 큐슈 서쪽의 치카노시마(고토열도)의 해적무리들은 주로 명나라를 약탈하였습니다. 큐슈 남부의 사츠마와 오오스미 지방 또한 그들과 동조하였습니다."
갑자기 받아 적던 사다모리가 피식 웃고는, 손은 그대로 움직이며 말했다.
"왕자께서 모든 것을 아시는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는 모르시는 것이 있구려. 앞의 것은 다 맞는 사실이지만 사츠마와 오오스미는 붙어 있는 땅이고, 시마즈 가문이 합쳐서 다스리고 있소. 해적과 동조한다 해도 장물을 거래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소."
"알아. 그 시마즈 가문이 지금 슈고 자리를 두고 내전 중이라 정신없는 것도 알고 있지."
양녕의 대답에 사다모리가 굳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저 받아 적어라. 큐슈 서북부 지역인 히젠의 마츠라 가문이 또한 해적질을 업으로 삼으며, 히젠의 슈고이자 큐슈 탄다이를 겸하는 시부카와 요시토시는 이를 묵인 및 방조하였습니다."
사다모리가 받아 적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키와 치카노시마 또한 마츠라 가문의 것인데 어찌 나누어서 적는 것이며, 시부카와는 말만 큐슈탄다이지 큐슈 전체의 지방관 노릇은커녕 겸직한 히젠 슈고로서 히젠도 제대로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이오."
"그것도 안다."
웃으며 말하는 양녕의 모습에, 사다모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감조차 오지 않아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사이 병사 하나가 대마도주의 인장과 인주를 가져다 옆에 내려다 놓고, 사다모리는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인장을 들어 방금 쓴 내용 옆에 찍었다.
"애썼다. 네가 쓰던 방에 이부자리를 깔아 두었다. 가서 잠이나 푹 자라."
다리가 풀린 사다모리를 병사들이 일으키는 모습을 채 다 보지도 않고 양녕은 발걸음을 돌렸다.
양녕이 밖으로 나오자 마당에 포박당한 왜인 몇이 꿇어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은 천으로 감싼 잘린 머리통을 들고 있었다.
"이 머리통은 무언가?"
양녕이 나온 것을 보고 다가온 이종무가 설명한다.
"때마침 잘 나오셨습니다. 조전(소다)의 부하들이 그 목을 가지고 투항했습니다. 미리 잡아 두었던 포로들에게 확인시켰더니 조전의 목이 맞다고 합니다."
"도체찰사의 계책이 먹혔구만. 잘했소."
양녕이 아직 불안한 표정을 한 포로들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너희가 소다 사에몬타로의 부하로 해적질을 한 것은 사실이나 내가 약조한 것이 있으니 특별히 봐주겠다. 대신 앞으로 우리 병사들이 섬을 수색할 때 따라다니면서, '우리는 소다의 목을 바치고 용서받았다. 지금이라도 투항하면 용서까진 아니라도 목숨은 살려주신다고 하셨으니 너희도 어서 투항하라!'하고 외쳐라. 할 수 있겠느냐?"
포로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너희는 다른 포로들보다는 나은 곳에서 지내게 해 주마."
양녕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포로를 끌고 나갔다.
"몇 놈 봐주는 대신 두령 목도 얻고, 지리 도움도 받으니 괜찮은 거래인 것 같습니다."
"봐줬다라……. 그래, 나는 봐줬지."
양녕의 말에 이종무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나중에 조선으로 보낼 때 저놈들은 제 목숨을 건지려고 두목을 배신하고 그 목을 바쳤다는 내용을 같이 적어서 보내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대군께 하나 더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다음번에 조선으로 배를 보낼 때, 대군께서 직접 대마도주를 끌고 오라는 상왕 전하의 명입니다."
"다음 배는 언제 뜨오?"
"바람과 파도가 거센 탓에 이틀은 지나야 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소. 아직 정벌이 다 끝난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 * *
1419년 7월 초순 모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관아.
대마도주와 그동안 모은 전리품을 가지고 김해도호부 관아에 도착한 양녕을 맞이한 것은 마당에 내려와 있던 이방원이었다.
"아바마마?"
예상치 못한 만남에 양녕이 당황한다. 상왕이라고 해도 왕이다. 도성을 멀리 벗어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뭘 그리 놀라느냐. 중요한 일이니 내 직접 내려왔을 뿐이다. 바다를 건너오느라 지쳤을 테니 어서 올라가 앉거라."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는 이방원의 뒤를 따라간 양녕은 객사 건물에 올라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의자에 마주 앉았다.
"명하신 대로 대마도주를 끌고 왔습니다. 조정에서 필요로 할 것 같은 서류들도 챙겨왔습니다."
양녕이 서류상자들을 꺼내며 말했지만, 이방원은 잠시 말없이 그의 얼굴을 보기만 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이방원이 조용히 말했다. 잠시의 정적 뒤에 양녕이 대답했다.
"예. 심려하여 주신 덕분입니다."
"먹고 자는 데에 불편함은 없었고?"
"예. 가져간 식량에 부족한 것도 없고 대마도주의 근거지를 지휘부로 삼아 건물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대군으로 살던 양녕에게 묵은쌀과 나무 바닥이 편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 물었고, 양녕도 알면서 말했겠지만, 그 대답을 들은 이방원이 슬쩍 웃는다.
"좋다. 그럼 보고를 듣겠다."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이방원에게 양녕이 보고를 시작했다.
"……또한 포로들은 앞으로도 나눠서 보낼 예정이고, 해적 두령 조전의 목은 소금에 절여 가져왔습니다. 그제 천모만 북쪽 이로에 있는 인위(니이)라는 마을을 태운 것을 끝으로 해안마을도 다 없어졌습니다."
"여량이라는 곳 빼고는 아예 잿더미만 남겼구나. 잘했다. 헌데, 섬을 비웠으니 이제 조선사람을 보내 조선 땅으로 만들어야 할 것인데, 사람은 어찌 구할 계획이냐?"
일본이 코앞인 변방의 척박한 섬이니 자발적으로 오겠다는 이는 없을 것이다. 강제로 보낸다고 해도 살던 곳에서 벗어난 백성들이 적응을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
"평지가 얼마 없고 그나마도 척박한 땅이긴 하나 산지는 많으니, 화전민들을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화전민이라. 지금 국법으로 금하는데도 떠돌아다니며 화전을 일구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그들을 잡아 벌하는 대신 대마도로 보내겠다 하면 신하들의 반발도 적을 것이다. 주상께 말해 보마."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대마도의 지도와 전리품의 목록입니다."
새 서류함을 열고 종이들을 꺼내서 올려놓았다.
"역시 직접 다니고 깃털 붓으로 그린 것이라 그런지 지도가 정확하고 세밀하구나. 전리품은 어디 보자꾸나."
이방원이 객사 앞마당에 쌓인 전리품 더미를 흘끗 보고 전리품 목록을 확인했다.
조선과 명나라에서 약탈했을 비단과 도자기, 일본 본토에서 들여왔을 칠기, 남방 무역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침향목 등 다양한 전리품 목록을 읽어 가다 마지막 부분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하고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다.
"절터에 있던 범종과 불상, 사당에 모셔져 있던 구리로 된 거울과 방울, 거기다 사당의 기둥과 처마에 달려 있던 구리 장식까지 뜯어 온 게냐? 꼼꼼히도 털었구나."
"구리는 조선에서는 적게 나며 이번에 화포를 만드는 데에 많이 쓰였으니 특별히 목록 마지막에 구리로 된 것만 모아 정리한 것입니다."
양녕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또 가장 큰 사당은 나라 꼴도 갖추기 전 왜국의 신공이라는 여왕이 애 밴 몸으로 바다를 건너 삼한을 항복시켰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떠받들고 있어서, 쇠붙이는 거두고 건물은 불사르며 주춧돌을 뽑아 바다에 버렸습니다."
"정벌에 소극적이던 이들은 전리품의 이득에 만족하고, 적극적이던 이들은 왜구를 철저히 짓밟았음에 만족할 수 있게 요점을 잘 잡았구나. 일본 본토 쪽에서 별다른 반응은 없었고?"
"예. 아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이 대마도주에게 적도록 시킨 문서입니다."
아예 별도의 서류함에 담아온 문서를 단숨에 읽은 이방원은 잠시 내용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해적질의 자백을 받은 내용이구나. 여기 있는 내용대로라면 구주도(큐슈)는 실로 왜구들의 소굴이고, 이것을 막아야 할 구주의 지방관은 뒤를 봐주었다는 것처럼 읽히는데, 사실이냐?"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 있는 내용 자체는 하나도 거짓이 없습니다."
"그 정도가 아닌데 거짓이 아니라니?"
"일기도(이키)와 치하도(치카노시마), 비전(히젠) 서북부는 사실 전부 송포(마츠라)씨 가문의 본가와 분가들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성씨를 적지 않아서 각기 다른 무리들이 준동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또 태수들이 땅을 두고 싸우느라 바쁘다는 것과, 구주탐제는 없는 힘으로 그 싸움을 정리하느라 해적질을 막을 겨를이 없다는 것은 굳이 적지 않았습니다."
양녕은 말없이 듣고 있는 이방원을 앞에 두고 설명을 계속했다.
"구주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아홉 고을과 그 태수들을 다 적지 않고, 대신 구주에 속하지 않는 대마도와 일기도를 처음부터 거론했으니 잘 모르는 이가 이 글을 읽으면 마치 아홉 고을 중에서 반이 넘는 대마, 일기, 치하, 비전, 살마(사츠마), 대우(오오스미)의 여섯 고을이 해적질을 하는 데도 구주탐제는 손을 놓은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정말로 거짓은 하나도 없으면서도 보는 사람이 그리 느끼게 만드는구나. 그런데 이런 교묘한 것을 만들어 무엇에 쓰려는 것이냐?"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이방원에게 양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명나라의 권세를 빌어, 구주도를 전부 얻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