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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9화 (9/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09화

9화

이어진 해상전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대장선을 비롯한 대형선들이 먼저 요라 앞의 만으로 진입해 주변의 왜선을 해치우며 진격했다.

근접전에 불리한 중형선들은 뒤따라가며 멀쩡한 배는 나포하고, 물에 빠진 왜구들을 살았건 죽었건 건져 목을 베었다.

마침내 함대가 만의 중앙부를 장악하고 왜선 함대를 남북으로 나눠 버리자, 왜구들은 배를 버리고 각각 남북 해안으로 내려 달아났다.

* * *

상륙전조차 없이 상륙이 시작됐지만, 양녕이 탄 대장선은 안전을 위해 해안을 완전히 확보하고서야 정박했다.

"대군!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먼저 내려있던 삼군 도절제사 최윤덕이 달려오며 물었다.

"덕분에 무사하오. 상황은 어떻소?"

"아까 두지포와 마찬가지로 달아난 놈들은 쫓지 않고 요새를 만들도록 지시했습니다. 미처 못 달아난 놈들은 포박해 두었고, 사로잡혀 있던 조선인과 중국인들도 백여 명 넘게 구출했습니다. 다만……."

"무슨 문제라도 생겼소?"

"대마도주 종정성을 놓쳤습니다. 붙잡힌 왜구를 매질해서 알아낸 바로는 패색이 짙어지자 남은 병력들을 모아서 육로로 달아났다 합니다. 발이 빠른 병사들을 시켜 쫓게는 시켰지만 조전과 종정성의 두 우두머리를 모두 놓쳐서 걱정입니다."

양녕은 잠시 생각을 하고는 말했다.

"크게 걱정할 거 없을 게요."

"쫓아갈 묘안이라도 있으십니까?"

옆에 서있던 이종무가 물었다.

"기병도 없는데 쫓을 수가 있겠소. 다만 내가 대마도주라면 제대로 짐도 못 챙기고 달아났으니 식량이 있을 법한 곳으로 갈 게요. 마침 여기 여량(요라)으로 옮겨오기 전 대마도주의 거점인 삼근(미네)이라는 곳이 있소. 거기로 도망가고 있을 것이오."

"과연, 그런 곳이 있었군요. 거기로 병력을 보내겠습니다."

"그럴 것 없소. 삼근은 섬 북쪽에 있는 곳이거든."

무슨 소리인지 잠시 생각하던 이종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같은 시각.

츠시마노쿠니(대마도). 후나코시(선월) 근처

"도주님, 조선군이 이 정도로 준비하고 왔으면 후나코시에도 이미 병력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어떻게든 뚫어야지. 근접전에는 우리가 유리하니 돌파를 시도해도 되고, 정 안되면 아소만으로 가서 배를 구하자고."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와 같이 달아난 부하들은 숨을 몰아쉬며 후나코시로 가고 있었다.

"하긴 그렇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제대로 요새를 쌓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지리도 저희가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애써 희망을 붙잡으려던 그들의 대화는 산길을 벗어나 후나코시가 보이는 순간 끊겨 버렸다.

후나코시 서쪽, 아소만 가장 깊은 곳에는 이미 조선군의 군선이 들어와 있었고, 한때 왜선이었을 그을린 나무판자들이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후나코시 동쪽 대한해협에도 조선배가 보였다.

그리고 후나코시의 좁은 길목에는 요새가 지어져 있었다.

후나코시는 배를 넘긴다는 뜻. 섬이 가장 잘록한 지점이면서 배를 땅 위로 넘길 수 있을 만큼 낮은 지형이다.

정동군의 배 중에서 전투에는 불리하지만 속도가 빠른 소형선들을 전투 시작 전에 미리 후나코시로 보내두었고, 소형선 몇 척을 땅 위로 끌어올려 쌓아 요새로 만든 것이었다.

소 사다모리 일행이 자신들을 보고서도 굳이 공격을 하지 않으려는 조선군을 보며 그 자리에 굳어 있는 동안, 등 뒤에 조선군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 * *

1419년 6월 20일 늦은 오후.

대마도. 여량.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는 단단히 포박된 채 무릎 꿇려 있었다.

어떻게 달아날 궁리를 해보기도 전에 조선군에 붙잡혔고, 그대로 한때 자신의 집이었고 지금은 조선군이 지휘부로 삼은 건물에 끌려온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잡았군."

입구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사다모리는 고개를 들었다. 조선식 갑옷을 입고 허리에 환도를 찬 남자가 건물에 들어와 투구를 벗었다.

"나는 조선의 왕자이자 이번 정벌의 책임자, 양녕이다. 네가 츠시마 슈고(태수) 소 사다모리가 맞는가?"

"그렇소."

조선의 왕자라 자칭한 이가 일본어로 자신의 정확한 관직을 부르자 사다모리는 엉겁결에 대답해 버렸다. 바로 정신을 차리고 먼저 입을 연다.

"이번 일은 내 불찰이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실권을 소다에게 빼앗긴 탓에 해적이 들끓은 책임을 내 스스로 지고 싶……."

"아, 되도 않는 머리 굴려서 협상 시도하려 할 것 없다. 이번 정벌은 이전처럼 네놈들을 굴복시키는 목적이 아니야. 이 섬은 비워지고 조선의 영토가 될 것이다."

말문이 막힌 사다모리를 앞에 두고 양녕이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넌 뭘 하나 해 줘야 할 게 있다. 시키는 대로 잘하면 조선으로 끌려갈 때 선처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아니, 대놓고 다 털어갈 거라고 해 놓고 시키는 걸 하라고 하는 건 또 무슨 경우요? 다 털어 갈 거라도 일단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는 속내를 감추고 협상하는 척 속이는 게 맞지 않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사다모리가 되물었지만 양녕은 표정조차 바뀌지 않았다.

"상대가 이상하게 고압적으로 나올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그래서 할 테냐 말 테냐?"

아무래도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사다모리는 일단 주제를 돌리려 다른 수를 꺼냈다.

"어차피 잡힌 몸으로 왕자께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이 시기에 섬에 오래 머무르시는 것은 좋지 않소이다. 곧……."

사다모리가 입을 열자마자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양녕이 성큼성큼 사다모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환도 칼집을 허리띠에 걸린 그대로 붙잡고 앞으로 들이밀었다. 환도 손잡이 끝이 사다모리에 턱에 닿고, 이에서 딱 소리가 나고, 말이 멈추고, 고개가 강제로 들렸다.

"곧 태풍이 온다고?"

사다모리를 내려다보는 양녕의 시선만큼이나 싸늘한 공기가 감돈다.

"네놈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이미 알고 있다. 실제로는 태풍이 안 올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고."

사다모리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섬에 처박혀서 허구한 날 노략질이라 하러 돌아다니는 너희 같은 것들만 바닷바람을 읽을 줄 안다고 생각하나 보지? 틀렸어, 버러지 같은 놈아."

경멸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양녕이 환도 자루에서 손을 놓았다.

"한 번만 더 허튼수작을 부리면 그 혓바닥을 산 채로 저며 주마."

사다모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실제로는 양녕이 원래 역사의 대마도 원정 당시 대마도주의 행동과 그 이후 전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인 반응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사다모리와 조선군 지휘관들이 보기에는 양녕이 사다모리의 속내를 전부 꿰뚫어 본 것으로만 보이는 상황이었다.

"말로 했을 때 듣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지. 이놈의 옷을 다 벗기고 기둥에 선 채로 묶어 두어라."

"입을 열게 매질을 할까요?"

옆에서 분위기를 살피던 종사관 곽존중이 물었다.

"아니, 그럴 거 없다. 대신 뺨을 치건 물을 뿌리건 해도 좋으니 절대로 단 한순간도 잠들지 못하게 해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양녕은 마지막으로 사다모리를 싸늘한 시선으로 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시키실 게 있으시면 대마도주 말대로 협상을 하시거나, 아니면 뭘 시키실 건지라도 알려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문초도 없이 묶어두시는 건 조금……."

양녕을 따라 나온 이종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차피 완전히 굴복시키지 않으면 시킬 수 없는 일이오. 조금 전 것도 굴복시키는 과정의 일부고."

양녕의 대답에 이종무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대군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필시 그리하시는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요. 따르겠습니다."

출정 전에는 어느 쪽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자신을 믿어주는 모습을 보이는 이종무를 보며 양녕이 주제를 돌린다.

"일단 대마도주가 금방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으니 급한 일부터 합시다. 해가 지기 전에 빠른 배들을 보내 섬 주위를 돌며 모든 정박된 배를 불태워야 할 게요. 밖으로 달아나는 놈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

"그건 이미 명령해 두었습니다."

"좋소. 나포한 왜선들은 뜯어다 상한 군선을 수리하는 데 쓰고, 남으면 요새를 만드는 데에 보태도록 하시오. 그리고 당장 내일이라도 바다 상황을 봐서 파도가 잔잔한 날 포로로 잡혀 있던 중국인들부터 조선으로 보내는 게 어떻겠소."

"중국인들부터요? 다친 병사들부터 보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다친 병사들부터 보내면 다들 일부러 다쳐서 조선으로 가려고 하겠지. 중국인들부터 귀환시켜야 명나라가 간섭하는 걸 미리미리 막을 수도 있고, 저들이 우리의 신무기나 병법을 많이 보고 돌아가서 좋을 일이 없잖소."

"그건 그렇습니다."

"그리고 일기도 쪽에서 오는 배가 있다면 놓치지 말고 오는 족족 다 붙잡으시오. 거긴 농사지을 땅이 제법 있으니 해적질하러 오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나머지는 맡기겠소."

원래 역사에서는 일본 본토에서 조선의 대마도 침공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조선군이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였지만 양녕은 최대한 조심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섬 깊은 곳으로 달아난 조전을 잡는 것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양녕이 끄덕이자 이종무는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양녕의 지금 목표는 원정을 이론의 여지없는 대성공으로 이끌어 다음 단계로 가는 발판으로 삼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 계획을 망칠 수 없도록 항상 만전을 기해야 했다.

* * *

다음 날 오후.

대마도 해안 모처.

큰 배 세 척이 해안에 정박하고 안에서 조선군 병사들이 우르르 내렸다. 저마다 무기를 하나씩 들고 망설임 없이 마을로 다가가서는 몇 명씩 조를 이뤄 민가를 하나씩 둘러싼다.

"시작해라!"

지휘관의 외침과 함께 문을 발로 걷어차 열고 들어간다. 마을에서 가장 큰 집에서는 포로로 잡혀 왔던 중국인이 보호받으며 나오고, 어느 작은 집 앞에서는 저항하다 끌려 나온 사내가 두들겨 맞고 있었다.

"그만 패고 묶어서 끌고 가."

지휘관의 말에 병사가 몽둥이를 내려놓고 밧줄을 꺼냈다. 전날 양녕이 병사들에게 가르친 포박술로 매듭을 지어 금방 사내를 묶어서는 배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한편 다른 좀 큰 집에서는 병사들이 저마다 짐을 한 무더기씩 들고 나왔다. 곡식이 담긴 통, 아무래도 정상적으로 사서 온 건 아닌 것 같은 거울이며 도자기, 비단 등 종류도 다양했다.

"다 털었으면 하나씩 받아가라!"

지휘관이 축축하게 젖은 천 뭉치에 나뭇가지들이 꽂혀 있는 물건을 들고 왔다. 각 집을 맡은 병사들 중에서 한 명씩 와서 조심스럽게 나뭇가지를 뽑아서 가져갔다. 그 나뭇가지를 집 벽에 문지르자 가지 끝에 불이 피어났다. 나뭇가지 끝에 백린을 바른, 원시적인 성냥이었다.

병사들은 그 불붙은 나뭇가지를 집 마루에 던져 놓고 밖으로 나와서 가만히 바라본다.

* * *

그 모습을 근처 산비탈에 숨어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전날 달아난 해적 두목 소다 사에몬타로와 부하 몇이었다.

"저놈들은 왜 불 지른 다음 보고만 있는 겁니까."

부하 하나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가면 누가 와서 끌 수 있으니까.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불이 커질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소다는 자신도 왜구 짓을 할 때 직접 해봐서 아는 사실이었지만 말하면서도 답답했다.

원래 산속으로 다니면서 해안마을에서 보급을 받아 계속 조선군을 괴롭히며 버틸 생각이었는데, 조선군이 마을을 다 없애고 있었다.

"두목. 어떻게 하죠? 급하게 달아나느라 식량도 다 떨어지고, 저놈들이 배도 다 태워서 도망치지도 못합니다."

"어차피 여기 지리는 우리가 더 익숙하니 버티다 보면 뭐라도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다. 뭣보다 우리가 항복한다고 살 수나 있냐? 조선에 끌려가 목이 잘리는 것 말고 뭐 다른 수가 있느냔 말이야."

소다가 짜증과 답답함이 섞인 목소리로 답한다.

"둘 다 진정하십쇼. 조선 병사들이 곧 갈 거 같습니다."

그 말에 다들 마을을 다시 본다. 불길에 휩싸인 집들이 하나둘 주저앉고 있었고, 병사들도 배를 타러 가고 있었다.

그때 배를 타러 가던 병사들 중 하나가 뒤를 돌아, 배운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어눌한 일본어로 외쳤다.

"해적들아! 만일 거기 있다면 잘 들어라! 너희 대장의 목을 가져오면 가져온 놈들은 살려준다! 이는 우리 대장이신 대군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다시 말한다! 너희 대장의 목을 가져오면 가져온 놈들은 살려 준다!"

그렇게 외친 병사는 다시 뒤로 돌아 배를 타러 갔다.

조선군의 배가 보이지 않게 되고서도 소다와 부하들은 가만히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소다였다.

"뭣들 하냐. 빨리들 움직이자. 나무 열매라도 따야 배를 채울 거 아냐."

그 말에 부하들도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따랐지만, 어색해진 공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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