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08화
8화
1419년 6월 18일 오후.
경상도 거제현.
거제도 서쪽, 한산도를 마주한 오아포 해안.
병사들이 친 작은 천막이 사방에 가득 있는 가운데에 지휘관들을 위한 큰 천막이 있었다.
"상한 배도 없고, 병사들 중에 아픈 자도 없습니다. 바람도 잠잠해졌으니 내일 해 뜰 때부터 준비하면 사시에는 출발할 수 있습니다."
"다행이군. 고맙소 도체찰사."
이종무의 보고를 들은 양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질적 총사령관이 이종무이긴 하지만 명목상으로도 품계 상으로도 도통사인 양녕이 높아 보고를 받는 입장이었다.
"궁금해진 것이 있는데, 굳이 남쪽으로 거제까지 올 것 없이 동래의 부산포에서도 대마도에 갈 수 있지 않습니까?"
도절제사 최윤덕이 멀미로 수척해진 얼굴로 물었다.
"부산포에서 대마도를 가려면 동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동해의 파도가 거센 탓에 자칫 방향을 잘못 잡으면 섬을 지나쳐 버릴 수 있소. 하지만 거제도 남단에서 기준을 잡고 출발하면 동쪽으로만 쭉 가면 무조건 대마도에 닿을 수 있지. 그래서 그렇소."
양녕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그래도 거제까지 와서 가는 만큼 부산포에서 가는 것보다는 가까울 테니 다행입니다."
"더 멀어."
"예?"
옆에서 듣던 이종무가 툭 답하자 최윤덕이 굳었다.
"부산포에서 가는 것보다 한 30리 정도 더 멀다는군."
최윤덕이 멀미 걱정에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이종무가 껄껄 웃는다.
여유가 있어서 웃는 것이 아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의 긴장감을 풀려는 것임은 양녕도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전장을 헤쳐 온 이종무와 최윤덕이 긴장할 정도인, 총 병력 17,300여 명이 투입되는 대규모 원정.
그 원정의 총사령관인 양녕도 긴장을 풀고자 이종무를 따라 웃었다.
* * *
1419년 6월 20일 정오.
츠시마노쿠니(대마도). 츠치요리(토기)
"배 돌아온다!"
사내 하나가 산길에서 뛰어내려오며 신나는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배가 벌써 돌아와?"
그늘에 앉아 바닷바람을 쐬던 다른 사내가 퉁명스럽게 묻는다.
"내가 봤다니까! 열 몇 척 되는데 뭘 바리바리 실은 채 오고 있어. 고생들 했을 테니 술이랑 먹을 거 꺼내다가 잔치 준비라도 하자고!"
잠시 뒤 잔치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왜인들의 시야에 마을 앞으로 들어오는 배가 보였다.
"봐, 내 말이 맞잖아."
"그런데…… 우리 배가 아니지 않아?"
사내 하나가 멀리 있는 배를 자세히 보려고 눈을 찡그린 순간.
날아온 화살이 그 눈에 박혔다.
뒤이어 수십 척의 배가 마을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누군가 외쳤다.
"고려 배다!"
뒤늦게 눈치채고 다들 피하려 해보지만, 이윽고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하나둘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 * *
"이놈들, 우리를 자기네 배인 줄 알고 잔치라도 준비했나 봅니다."
"그런가 보오."
상륙이 끝난 마을을 둘러보며 이종무와 양녕이 말했다. 죽거나 사로잡힌 이가 20명, 달아난 자가 30여 명이었다.
"조전(소다)의 행방은?"
"모르겠습니다. 잡힌 놈이나 죽은 놈들 중에 그럴싸하게 차려입은 놈은 없습니다."
"흠……."
양녕이 포박된 포로 하나에게 다가갔다. 조선군은 모르겠지만 맨 처음 잔치를 준비하게 시켰던 그 사내였다.
"대군, 무엇을 하……."
우두둑.
이종무가 뭐라 묻기도 전에 양녕은 포로의 손가락을 잡아 꺾어 버렸다.
"소다 사에몬타로가 섬에 있나?"
갑자기 포로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더니 일본어로 질문하는 양녕에 이종무는 당황하고, 포로는 영문도 모른 채 고통스러워 하며 신음만 냈다.
우두둑.
"다시 묻는다. 소다 사에몬타로가 섬에 있나?"
"있다! 섬에 있어! 정확히 어딘지는 나도 몰라!"
비명을 지르듯 대답한 포로를 두고 일어나 태연하게 양녕이 말한다.
"조전이 섬에 있긴 한가 보군. 아마 달아난 놈들 중에 있는 모양이오."
"어떻게 할까요?"
"놈들이 우리보다 지리를 잘 알 테니 쫓아가는 건 위험하오. 병력 일부는 여기 두지포에 요새를 쌓아 거점을 만들고 마을을 샅샅이 수색하게 할 것. 다른 일부는 천모만 안을 배를 타고 다니며 천모만을 건너 남북을 오가는 놈이 없게 지킬 것.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동남쪽 여량으로 가서 대마도주를 치는 것. 어떻소?"
실질적 총사령관은 이종무이므로 양녕은 명령이 아닌 제안을 했다.
"좋은 방안입니다. 그럼 좌군 절제사인 박실을 시켜 두지포를 맡기고, 천모만을 지키되 깊은 곳으로는 들어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대군께서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나는 여량으로 따라가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달아난 놈들이 대마도주에게 소식을 전하기 전에 서두르시지요."
고개를 끄덕이고 걷기 시작한 양녕을 따라가며, 이종무는 그제야 양녕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 * *
1419년 6월 20일 오후.
츠시마노쿠니(대마도). 요라(여량) 앞바다
병력 일부를 남겨놓고 온 조선군 함대가 요라 앞바다에 도착했을 때 본 것은, 만 입구에 몇 척씩 무리 지어 흩어져 떠 있는 수많은 배들이었다.
"놈들이 우리보다 빨랐나 보구만. 몇 척쯤 되는 거 같소?"
"대충 열 척씩 열 무더기라 치면 백 척은 될 것 같습니다."
대장선 망루에서 이종무와 대화하던 양녕이 잠시 생각에 잠긴다.
고려말 진포해전에서 배와 배를 연결했다가 최무선의 화포에 참패를 당한 적 있으니 배를 흩어서 배치했을 것이고, 아직은 조선의 배가 커지기 전이니 포위해서 백병전 상황을 만들기 위해 작은 무리를 지었을 것이다.
"놈들도 바보는 아니군. 명나라 해안을 털고도 살아 돌아올 만한 머리는 돌아가는 것 같아."
"어찌할까요, 대군?"
"본격적인 전투 아니오. 도체찰사께 맡기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신무기가 나설 차례로군요."
이종무가 망루 밖에 외친다.
"붉은 기를 걸어라!"
병사 하나가 깃대 높이 붉은 기를 올리고, 다른 병사가 태평소를 크고 길게 불었다.
조선군의 배가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 * *
"놈들이 옵니다."
조선군 기준으로 만 입구 왼쪽에 떠 있던 배에서 왜구 하나가 나직이 말했다.
"겁먹지 마라. 아까 말해 준 대로 하면 된다."
대장급인 왜구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도 불안한지 뽑아든 일본도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고려인들의 대포가 세다고 해도 이 거리에서는 안 닿아. 서로 화살이 닿는 거리만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면서 뒤로 빠지면 돼. 포를 쏘려고 가까이 붙다가 만 안에 들어오면 서로 맞을까봐 포를 못 쏠 테니 그때 사방에서 포위하고 올라타서 다 죽이면 된다."
마침 바람 찢는 소리를 내며 화살 하나가 날아와 배 근처에 떨어졌다.
"시작이다. 천천히 배를 뒤로 물려라."
대장 왜구의 말을 따라 일곱여 척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저 멀리에서 나팔소리 같은 것이 또 들리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온 화살 하나가 갑판에 박혔다.
"뭔 꾸러미가 달려 있는데?"
"편지인가?"
"기껏해야 항복하라는 거겠지."
꾸러미를 풀어 보려 왜구 하나가 쪼그려 앉아 화살에 손을 뻗은 순간, 폭음을 내며 꾸러미가 터졌다.
"아아아악!"
"내 눈!"
인화살 근처에 있던 왜구들이 몸에 불이 붙은 채로 비명을 질러댄다. 얼굴에도 튄 자들은 나뒹굴고, 몸에만 튄 자들은 불을 끄려 이리저리 애썼다.
그러나 손으로 털어내려 하면 손에도 불이 붙고, 옷을 벗어 털면 불길이 더 커지고, 물을 퍼다 뿌리면 잠시 꺼지는 듯했다가 더 넓게 타오르는 진퇴양난의 상황.
"차라리 그 배를 버려! 살 가망 있는 놈들은 다른 배로 옮겨 타라!"
백린의 독한 연기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소리치던 대장 왜구가 연기를 피해 고개를 돌렸을 때 마침 저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이 보였다. 궤도를 보니 머리 위로 지나가겠다 싶어 무시하고 다시 부하들에게 소리를 치려던 그 순간, 인화살이 머리 위에서 터졌다.
* * *
"역시 대단하군."
배 예닐곱 척이 한순간에 백린의 연기와 불꽃에 뒤덮이는 순간을 대장선에서 보던 양녕이 감탄했다.
조선사람들이 활을 잘 쏜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첫 번째로 그냥 화살을 쏘아 사거리를 보고, 두 번째로 인화살을 쏘아 터지는 시간을 확인하고, 세 번째로 쏠 때는 머리 위에서 터지게 만든다.
양녕이 감탄하는 지금도 병사 하나가 시위에 걸린 인화살의 심지가 타는 것을 잠시 기다렸다가 발사하는 중이었다.
"이쯤 하면 적들의 대열도 흐트러지고 정신도 많이 빠졌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인화살을 더 쓰면 바다에 불덩어리가 가득 떠다니고 연기가 시야를 막아 아군도 불리해질 것 같으니,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알겠소."
양녕에게 확인을 구하고 이종무가 외쳤다.
"노란 기를 걸어라!"
깃대에 노란 기가 올라가고, 이번에는 태평소 소리와 북소리가 함께 울린다.
그와 동시에 조선군의 배가 일제히 요라 앞의 만으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한다.
"포수 위치로!"
그 호령에 병사 여럿이 저마다 화포 하나씩을 들고 갑판 난간으로 다가갔다. 한 명 건너 한 명씩 번갈아 가며 새끼줄과 삼베 끈을 대각선으로 메고 있었다.
양녕이 최무선에게 준 설계도로 만든 무기들 중에서 이번에 유일하게 실전에 투입된 소형 화포, 구리로 총열을 만든 산탄총이었다.
탄을 직선으로 멀리 날릴 필요가 없으니 매우 정밀하게 만들 필요가 없어 양산에 적합하고, 크기를 크게 만드니 총열이 두꺼워져 터질 걱정이 적다. 무엇보다도 해상에서도 근접전을 선호하는 왜구들에게 매우 적합한 무기다.
"장전!"
포수들이 일제히 허리춤에서 작은 종이 쌈지를 꺼낸다. 원래 역사에서라면 100여 년 뒤에 등장할, 1회 사격 분량의 화약과 탄약을 종이로 포장해 둔 탄약포다.
탄약포의 화약 쪽 끄트머리를 물어뜯어 구멍을 내고 총구에 화약을 부어넣는다. 남은 탄약포의 종이부분을 구긴 다음 뭉쳐진 종이가 아래로 가게 총구에 넣는다. 뭉쳐진 종이는 화약의 폭발이 산탄을 제대로 밀어주는 역할과 총구를 아래로 했을 때 탄이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는 역할을 동시에 할 것이다.
"삭장!"
다음 호령에 긴 막대를 꺼내어 총구에 깊숙이 넣어 탄알을 총열 안쪽까지 밀어 넣는다.
"점화약!"
막대를 빼내고 총을 제대로 든다. 허리에 달려있던 대나무 화약통을 꺼내 점화 접시에 화약을 약간 붓는다. 화승에 불이 잘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면 발사준비는 완료된다.
그렇게 장전하는 동안 조선군의 배가 하나둘 만 입구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조선군을 향해 인화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왜구들의 배가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 정체는 모르겠지만 조선군이 쏜 터지는 불화살이 쉽게 꺼지지 않고 잘 타오른다면, 가까이 붙어 버리면 조선군도 자신들도 위험해질 수 있는 무기를 쉽게 쓸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조선군이 수는 더 많지만 근접전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산탄총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제법 현명한 판단이었다.
어느새 조선군 병사들의 눈에 다가오는 왜선에 탄 왜구들의 얼굴 표정까지 보일 거리가 되었다.
"조준! 조준만 하고 기다려라!"
이종무가 긴장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외친다. 그 호령에 개머리판을 견착하는 병사들도 모두 긴장했는지 다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양녕도 긴장에 침을 삼켰다.
지금 조선군 중에서 산탄총 실전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곧 잔뜩 생길 예정인 것이다.
조선군 군선에 접근하는 배마다 왜구들이 저마다 하나둘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었다.
긴장과 두려움, 흥분으로 가득한 눈빛을 한 왜구가 크게 고함을 지른 것이 신호였다.
"흐랴아아앗!"
동시에 조선군에서도 명령이 떨어졌다.
"새끼줄 방포!"
새끼줄을 맨 포수들이 방아쇠를 당긴다. 불붙은 화승이 점화 접시에 처박힌 다음 순간.
펑! 퍼펑!
요란한 폭음과 연기가 사방을 뒤덮는다. 그 사이사이로 비명소리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바닷바람이 연기를 날려 보내고 드러난 것은 대단하면서도 참혹한 광경이었다.
산탄을 맞은 배들 위에 멀쩡한 왜구는 없었다. 저마다 몸 어딘가에는 피칠갑을 하고 뒹굴고 있거나,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뒤에서 오던 왜구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이를 악물고 다가온다.
"지금 빨리 붙어라! 고려의 대포는 쏘고 나면 또 쏠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지금 붙어야 돼!"
그 다급한 외침을 비웃듯 다음 호령을 외친다.
"삼베 끈 방포!"
다시 납탄의 비가 피보라를 만들고, 그사이 장전을 마친 새끼줄을 맨 포수들이 삼베 끈 포수들과 교대한다.
신무기는 대성공이다.
양녕은 흥분감에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