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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7화 (7/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07화

7화

양녕을 대마도주로 봉한다.

양녕대군을 삼도 도통사로 봉하는 것을 거두어달라는 말에 대한 대답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가장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있었다.

양녕에게 큰 병력을 맡기는 것은 정벌 과정에서만 유지되며, 정벌 후에 병력이 철군하게 되면 그 순간 바로 양녕에게서 떨어진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 대마도에 남겨지게 되니 그 이후에 군사에 관여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대마도가 농사짓기 좋은 땅이 아니니 거기서 크게 군사를 모으기도 어렵다.

멀리 떨어진 섬에 있게 되지만 유배와는 다르게 제후로 봉해지는 것이니 양녕의 입지에도 문제가 없고 오히려 명성이 올라간다고 볼 수도 있다.

더군다나 오랑캐들이 있던 땅의 군주가 되는 것이니, 양녕을 오 태백에 대입하는 이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기쁘게 여길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방원 입장에서는, 봉작을 내린 것이니 만일 양녕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면 봉토를 회수한다는, 혹은 옮긴다는 명목으로 양녕을 다시 한양에 불러올 수도 있다.

아니면 그마저도 필요 없이 그냥 봉토를 그대로 두고 한양으로 부른다 한들, 제후가 중앙에서 벼슬을 한 사례가 사서에 없는 것도 아니므로 명분에서 걸릴 것도 없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양녕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일단은 원정군의 중요한 자리인 삼도 도통사를 맡는 만큼 양녕이 원정에서 충분한 성과를 거두어야 대마도주가 되는 것이며, 원정이 실패할 경우에는 이방원도 양녕에게 부정적인 신하들의 공격을 막아 주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이방원은 대답 아닌 대답으로 신하들이 일단은 양녕을 삼도 도통사로 삼는 것을 받아들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결과에 따라 양녕이 대소신료들에게 당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을 포석도 깐 것이다.

"양녕은 어찌 생각하는가?"

"어명을 받들어 오랑캐를 토벌하고 나라를 평안케 하는 일에 어찌 이견이 있겠습니까. 분골쇄신하여 기필코 승전고를 울리겠나이다."

그 과정에서 양녕이 자기 실력을 최대한 내보이게끔 만든 것은 덤이었다.

"좋다. 경들 중에 반대하는 이가 있는가?"

이방원이 대답을 잘했다고 해서 신하들의 이의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 이방원이 인화살, 모초에 봉작 발언까지 온갖 것을 미리 준비한 것을 볼 때 지금 섣불리 나서서 이방원의 수에 걸려들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잠시 물러났다가 준비를 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게 나았다.

"딱히 없나 보군.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파하겠소. 임명된 이들에게 내일 바로 관교를 내릴 것이니 날이 밝는 대로 대마도 원정 준비를 시작하시오."

* * *

1419년 5월 중순 모일 아침.

한성부. 병조.

대마도 원정군. 이름하야 정동군이 결성되고 며칠이 지났다.

저마다 바빴겠지만 갑작스럽게 중책을 맡은 양녕은 잠도 줄여 가며 대책을 마련했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판단해 회의를 소집했다.

시작하기에 앞서 양녕은 회의에 모인 이들을 잠시 살폈다.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던 날, 이방원이 인사를 발표한 이들이다.

양녕의 부관 업무를 맡을 도통사 종사관 두 명은 이방원이 신경 써서 정했을 테니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겠지만, 이들 중에는 분명히 아직도 양녕의 능력이나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반대로 양녕을 오 태백에 과하게 이입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굳이 한쪽으로 다른 한쪽을 견제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양녕의 능력을 정확히 보여 주고 따르게 해야 이번 원정이 성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 시작하겠소. 우선 이게 일본의 지도이외다."

양녕이 탁자 위에 지도 하나를 펼쳤다. 일본의 승려 교키[行基]가 처음 만든 이래로 통상적으로 행기도라고 불리는, 일본 전체를 그린 지도였다.

"일본이 조선의 동남쪽 바다에 있는, 큰 섬 셋과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것은 공들도 잘 아실 것이오. 그리고 여기, 서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두 섬 중에 일본 땅에 가깝고 둥글게 생긴 것이 일기도, 조선 땅에 더 가깝고 길쭉한 것이 대마도지요."

당시의 고지도에 중국, 일본의 위치나 방향이 이상한 것은 그저 한정된 종이 안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집어넣으려고 한 결과물일 뿐이고, 당시 조선인들의 지리 인식은 상당히 정확했다. 그 사실을 양녕도 알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설명했다.

"대마도까지는 조선 땅에서 출발해서 바닷길로 하루가 걸린다 하오. 그리고 이게 대마도만을 그린 지도요."

양녕이 행기도를 옆으로 치워놓고 새 종이를 올려놓았다. 지도에는 당대 기준으로 볼 때 제법 정확한 형태로 대마도가 그려져 있었다.

"실로 하늘에서 섬을 직접 내려다보는 것 같습니다. 대군께서는 어떻게 이리도 정확한 지도를 구하셨습니까?"

최윤덕이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 붙잡힌 대마도 왜구들을 문초하여 알아낸 것과 예전부터 내려오던 지도를 상고하여 만든 것이오."

사실 양녕이 김홍빈으로 살았던 때 원래 알고 있던 대마도 지리에 대한 지식만으로 충분했고 대마도에 사는 이들보다도 정확하게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대군이 뜬금없이 변방 오랑캐 섬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것은 회회인에게 배웠다는 변명으로도 넘어가기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붙잡힌 왜구들을 지리정보를 얻기 위해 문초하는, 귀찮은 과정을 거쳐 자연스러워 보이게 만든 다음에 그린 지도였다.

"이번 원정에서 중요한 곳들은 다음과 같소."

양녕이 막대를 꺼내 들어 대마도의 북쪽 끝을 짚으며 말했다.

"우선 섬의 북쪽 끝에 위치한 풍기(토요사키), 혹은 도이사지. 여기가 섬 북부의 중요한 항구요. 다음이 여기, 대마도의 중앙에 있는 큰 만이 천모만(아소만). 해안선이 복잡하고 경사가 매우 급하지요."

그다음 양녕은 섬의 가장 잘록한 부분을 쿡 찔렀다.

"대마도 섬 중간에 땅이 가장 좁아지는 길목이 선월(후나코시), 혹은 훈내곶. 여기를 틀어막으면 섬의 육로를 반으로 끊을 수 있소. 그리고 여기 천모만 입구에서 북쪽이 이로(현 토요타마). 그중에서도 깊은 곳에 있는 인위(니이)라는 곳이 중요한 곳이오. 천모만 입구의 남쪽은 토기(츠치요리), 혹은 두지포. 왜구들 말로는 해적 두령 조전(소다)의 본거지가 여기라는 것 같소."

양녕은 잠시 고개를 들어 잘들 따라오고 있는지 보고는 섬의 남쪽을 짚었다.

"마지막으로 섬의 동남쪽, 그나마 평지가 넓은 곳이 여량(요라, 현 이즈하라)이라 하는 곳인데, 대마도주의 근거지가 이곳이오."

거기까지 말하고 막대를 내려놓는다.

"대강 이 정도까지만 알면 공들이 전략을 짜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소. 혹시라도 더 알아내야 할 것이 있으면 말씀하시오. 왜인들 처형을 미뤄 두었으니 언제라도 문초할 수 있소이다."

"대군께서는 전략을 짜는 데에 참여치 않으십니까?"

양녕의 말에 약간 위화감을 느낀 이종무가 물었다.

"나도 필요하다면 의견은 적극적으로 낼 것이오. 하지만 군문은 밟아 본 적도 없는 이가 지위가 높다 하여 과하게 참견하면 반드시 전쟁을 그르치고 마는 법이 아니겠소."

무관들이 감동한 눈빛으로 양녕을 보았다.

사실 양녕의 의도는 전문가인 무관들에게 전략 수립과 그 책임을 어느 정도 떠넘기려는 것이었지만, 말을 그럴싸하게 한 덕분에 무관들 입장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대군이 자신들의 자율권을 유지해준 셈이 된 것이다.

"대신 제장들께서는 이 책을 한 번씩 읽어 주시겠소?"

양녕이 말을 끝내며 책 하나를 꺼내 놓았다. 표지에는 '응적제승론'이라 적혀 있었다.

"요 며칠간 쓴 것이외다."

"응적제승이라 하시면, 손자병법을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최윤덕이 제목을 보고 말했다. 물은 지형에 따라 흐름을 만들고, 용병술은 적에 응해 승리를 만든다. 손자병법 허실편의 내용이었다.

"맞소이다. 그 구절을 보고 고안해낸 것인데 공들께서 보시고 괜찮다면 이번 원정에 써 주실 수 있겠소?"

"어떤 내용이길래 그러십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각 부대에 뚜렷한 목표를 정하여 주고, 그 달성법은 맡기고, 필요한 것은 도와주고, 전체를 살피며 통솔하는 것이오."

500여 년도 일찍 임무형 지휘체계를 꺼내 들며 양녕이 미소 지었다.

* * *

같은 시각.

한성부. 군기감.

여러 장인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저마다 작업을 하고 있었다. 소속된 모든 장인이 무언가 하나씩은 바쁘게 하고 있었고, 괜히 방해했다가는 들고 있는 연장으로 한 대 맞을 수도 있을 분위기였다.

요 며칠 사이 가장 바빠진 곳이 바로 이곳 군기감이다.

다른 관청도 대마도 원정으로 바빠진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군기감은 정동군이 쓸 화약과 인화살, 화포를 만드는 것은 물론, 그 효율이 검증된 염초밭도 더 만들어야 했다.

거기에 더해 늘어난 화약 생산량 덕분에 온갖 신무기의 개발과 시험도 가능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염초밭에 시범 도입되었던 가설, 시험, 변인 등 이학방법론의 내용들이 유용한 것으로 판단된 덕분에 시험도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조건을 달리해 가며 여러 번 하게 되었다.

다른 관청들이 대마도 원정이라는 특수 상황이라 바쁘다면, 군기감은 거기에 더해서 앞으로 평소에도 바쁠 예정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바삐 돌아가는 모든 것을 감독해야 하는 최해산은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그 공로를 인정받아 종4품 부정에서 정4품 부정으로 승진한 덕분에 기운이라도 낼 수 있었다. 기운을 내서 일하게 만들려 승진시킨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나으리, 힘들면 조금 쉬시지요. 여기는 제가 보고 있겠습니다."

피곤한 표정의 최해산에게 군기감 관원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괜찮네. 힘들지 않다면야 거짓말이겠지만 화포와 화약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고, 조금 있다가 점심(간식) 먹을 때 쉬면 되네. 무엇보다 장인들이 이 분업이라는 것에 이제 슬슬 익숙해진 모양이라 감독하느라 힘든 것도 얼마 없어."

실제로 양녕이 쓴 국부론의 내용에 따라 군기감의 무기 제조를 분업화하자 생산 속도와 품질이 모두 개선되는 중이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양녕대군께서 귀띔을 해 주신 것이 많아 금방금방 진행은 되고 있지만 나으리께서 쓰러지시면 저희까지 쓰러집니다."

"알겠네. 신경 써 줘서 고맙네."

관원의 말대로 양녕대군이 여러 가지 귀띔해 준 것이 있었고, 그 대부분이 정말로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화약을 만들 때 아교를 넣었더니 완성된 화약이 쉽게 부서지지 않게 되었다.

만들어진 화약을 채로 쳐 같은 크기의 알갱이들을 모았더니 알갱이 크기에 따라 터지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만들어야 할 크고 작은 화포들의 도면도 간략하게나마 그려 주었다.

화차를 개량하는 데 유용한 조언들도 해 주었다.

삼끈에 염초를 흡수시켜 화승을 만드는 것도 알려 주었다.

감사한 마음도 들었지만, 조선 최고의 화약기술자로서 위기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네 말마따나 양녕대군께서 도와주지 않으셨으면 지금보다 배는 더 힘들었겠지."

"힘들다마다요. 그나저나 양녕대군께서 화약을 많이 다루신 것도 아닐 텐데 어찌 그리 잘 아시는지 그게 참 의문입니다."

관원이 별 생각 없이 한 말에 최해산은 얼마 전 들은 소문이 생각났다. 그게 진짜라면 최해산도 잘하면 놀라운 기술을 여럿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조선 최고 화약기술자의 자리를 확고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자네 혹시 아는 회회인 있는가? 핫 뭐라고 하는 이름이라던데."

"정말로 괜찮으신 것 맞으시지요?"

관원이 진짜 걱정되는 눈으로 최해산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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