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06화
6화
1419년 5월 중순 모일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5월 초에 충청도 결성에서 왜선 목격."
팔락 하고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그다음 날 전라도 영광 일대 섬에 왜선 39척이 명나라 쪽에서 약탈하고 돌아오며 정박했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같은 날 새벽에 다른 왜선 50여 척이 충청도 비인에 상륙해서 전투 후 도주."
다시 종이 넘어가는 소리.
"그리고 그제, 황해도 해주에서 왜선 38척에 나눠 탄 왜구들이 약탈하다 기습에 걸려 모두 죽거나 사로잡혔다고."
올라온 보고를 소리 내 읽은 이방원이 고개를 들었다.
해는 이미 기울었지만 조계청 안에는 임금과 중신들이 쭉 앉아 있었다.
"신 우의정 이원 아뢰옵니다. 비록 왜구들이 약탈한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고 더러는 병사들이 다치기도 하였으나, 미리 살피시고 바다를 면한 고을에 방비하라 명하신 덕에 왜구에 맞서지 못하거나 병선을 잃는 피해는 없었습니다."
"다행한 일이지. 그리고 경들도 알다시피 이건 내가 미리 살핀 일이 아니오. 양녕이 미리 살핀 일이지."
말을 꺼냈던 우의정 이원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은 양녕의 의견을 받아들여 해안 방어를 늘리는 일에 반대했었는지, 이방원의 말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붙잡힌 왜구들을 문초한 결과는 나왔는가?"
"신 병조판서 조말생 아뢰옵니다. 대마도주 종정무(소 사다시게)가 죽고 그 아들인 종정성(소 사다모리)이 도주의 자리를 이었으나, 그 실권은 조전(소다 사에몬타로)이라는 자가 빼앗아 가졌다 합니다. 마침 대마도에 기근이 들었는데 조전이라는 자가 본디 해적들의 두령이었던 탓에 다들 배를 타고 식량을 약탈하러 명나라로 향했다 합니다."
"우리나라에 내린 것은 물을 얻거나 바람을 피하기 위함이고?"
"그러하옵니다. 문초하여 알아낸 것들 역시 일전에 양녕대군이 예측한 바와 일치합니다."
조말생이 알아서 양녕의 공로를 언급해 준 게 마음에 들었는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인 이방원이 다시 말을 시작한다.
"좋소. 그럼 실제로 왜구들이 날뛰기 시작했소. 섬 전체에 기근이 들어 식량을 약탈하려는 것이니, 식량도 없는 섬에 남아 있는 이들은 얼마 없을 것이고 지금은 섬의 방비가 허술하겠지. 그러니 이 틈을 타 대마도를 정벌하고자 하는데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신 좌의정 박은 아뢰옵니다. 적들이 흩어져서 명으로 향했으니 흩어져서 돌아올 것입니다. 왜구를 문초한 바에 따르면 돌아오는 길에 물과 바람 때문에 조선 땅에 들려야만 하는 것 같으니, 병사를 일으켜 섬을 치는 수고와 위험을 부담할 것 없이, 해안에는 방비를 갖추고 중요한 수로마다 군선을 띄워 오는 족족 각개격파하는 것이 좋다 생각합니다."
"일리가 있군. 다른 생각이 있는가?"
"신 병조판서 조말생 아뢰옵니다. 전조 고려 때에도, 조선이 세워지고 태조께서 명하셨을 때에도 대마도의 왜적들을 응징할 때에는 반드시 그 섬에 병사를 보내어 그 근원부터 제거하였습니다. 적들이 식량도 부족하고 섬을 비우기까지 하였다면 이는 다시 잡기 어려운 기회이니 지금 치는 것이 좋다 생각합니다."
"그 또한 타당한 말이다. 허면…… 양녕의 생각은 어떠한가?"
일순간에 양녕에게 시선이 쏠린다. 왕도 아니고 관리도 아닌 양녕이었지만, 저번의 예측이 정확했던 탓에 이방원의 지시로 조계청에 들어와 영의정 유정현의 옆에 앉아 있었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대마도를 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따질 상황이 아니라 쳐야만 하는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쳐야만 하는 상황이라……. 이유는?"
"지금 왜구들이 주로 약탈하는 대상이 명나라기 때문입니다. 명과 일본의 사이에 조선이 있는 탓에 지금도 왜구들이 조선을 거쳐 명으로 갑니다. 필시 명나라는 나중에라도 우리에게 왜구들이 지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 책임과 미리 왜구들을 단속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올 것입니다."
조선 초, 요동정벌을 주장하던 정도전이 죽은 지 20년이 갓 지난 상황이다. 정복군주인 영락제도 여전히 살아서 대외원정 중이니, 요동 땅을 두고 다투었던 조선은 아직까지는 명에게 있어서 견제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책임을 묻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조선을 선봉으로 세워 일본을 직접 치겠다 나올 수도 있습니다."
중신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양녕이 말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전례가 있는 일이었다.
전조 고려 때 이미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겠다 하고 고려를 앞세워 일본을 침공한 적이 있었다.
결국 원정은 성공하지 못하고, 강제로 끌려들어 갔던 고려는 물자와 인력을 무의미하게 낭비한 탓에 더 피폐해지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그때 일본 정복을 위한 임시 기관으로 설치되었던 정동행성이 그대로 남아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었다.
"명나라가 그저 우리에게 앞으로 왜구를 더 엄중히 단속하라 책임만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명나라가 직접 일본을 치러 나선다면 그때 생길 피해는 지금 대마도를 정벌하는 동안 생길 손해보다 더 클 것입니다."
양녕이 말을 마치고서도, 다들 양녕이 말한 내용을 생각해 보는지 조계청 안은 잠시 동안 조용했다.
"신 예조판서 허조 아뢰옵니다. 양녕대군이 방금 말한 바가 실로 타당합니다. 조선이 먼저 나서서 왜구를 토벌하여, 명에 가는 왜구들을 막았음과 앞으로도 왜구를 단속할 능력과 의사가 있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명나라에게 빌미를 주게 됩니다. 또한 지금 일본은 그 조정이 남북으로 나뉘어 수십 년 전쟁을 치르고 합쳐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변방의 섬까지 다스릴 능력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아예 대마도를 정벌하고 그 땅을 조선에 편입시켜 후환을 없앰이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전쟁에 인력과 물자가 너무 많이 들까 그것이 걱정일 따름입니다."
"예조판서의 말이 실로 옳다. 이는 왜구를 잡는 것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간섭도 막는 원정이다. 그리고 예조판서는 그리 걱정할 것 없다. 가져와라!"
이방원의 지시에 조계청 문이 열리며 내관 몇이 무언가를 작은 상에 담아 들고 들어와 조계청 복판에 내려놓았다.
상위에 올라간 것은 화살촉 뒤에 작은 꾸러미가 달린 화살과, 됫박에 잔뜩 담긴 희고 반짝이는 결정들이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허조의 의문에 조말생이 답했다.
"화살은 저번에 양녕대군께서 만드신 인과 화약을 넣은 꾸러미를 단 인화살입니다. 둘 다 위험한 물건이라 함부로 궁에 들일 수 없어 지금 저것은 속을 비워 가져온 것입니다. 왜구들과 싸울 때 바다는 물이고 배는 나무이니, 물을 부어도 쉽게 꺼지지 않으면서 나무를 태우는 인으로 멀리서 화공을 가한다면 아군의 피해를 줄이며 적에게는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군의 피해는 줄일 수 있으나 화약은 많이 들지 않습니까? 화약을 만드는 관리가 집집마다 염초를 캔다고 들어가 땅을 헤집는 폐해가 문제가 된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소이다. 그 옆 됫박에 담긴 것이 바로 화약의 재료인 염초, 정확히는 모초입니다."
염초, 즉 질산칼륨의 결정이 가늘고 길게 만들어진 것을 털과 같다 하여 모초라 한다. 그것이 됫박에 잔뜩 담겨 반짝이는 것이었다.
"그 모초는 민가나 관아의 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양녕대군께서 고안하신 염초밭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 말입니까?"
"예. 전부 염초밭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찌나 염초가 잘 만들어지는지, 염초밭 군데군데 모초가 알아서 맺힌 곳도 있었습니다."
허조가 할 말을 잃고, 대신 이방원이 입을 연다.
"멀리서 화약과 인으로 화공을 가할 것이니 우리 병사가 상하는 일은 적어질 것이오. 염초는 보다시피 이미 제법 많은 양을 얻었고, 염초밭도 더 늘릴 것이니 앞으로도 염초를 얻는 수고가 줄어들 것이고. 혹시 다른 의견 있소?"
이미 다 준비를 한 것 같은 말이었다.
명분도 있고, 필요도 있고, 인력과 자원의 소모도 줄일 수 있다. 무엇보다 상왕 이방원이 이 정도 준비를 했다면 굳이 없는 이유를 짜내서 심기를 거스르면서 반대할 필요는 없다. 아니, 반대할 수가 없다.
* * *
"좋소. 그러면 이번 대마도 원정을 지휘할 이들을 발표하겠소."
그 뒤로 밤이 한참 깊어지고 나서야 원정군의 인선이 정해졌다. 각 정승과 판서들이 건의하고 추천한 이들의 이름과 그 사유가 가득 적힌 종이를 앞에 두고, 이방원이 붓을 들었다.
신하들은 물론이고, 양녕도 원래 역사와 너무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귀를 기울인다.
"우선 통원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삼는다. 이번 원정의 총책임을 맡으며 동시에 중군을 통솔하라."
이방원이 이종무의 이름 위에 점을 찍으며 말했다.
"우박, 이숙묘, 황상은 중군 절제사. 유습은 좌군 도절제사. 박초, 박실은 좌군 절제사. 이지실은 우군 도절제사. 김을화, 이순몽은 우군 절제사로 삼는다. 이종무와 그 휘하의 절제사들은 병선과 병사들을 맡으라."
군령에 해당하는 인사가 모두 발표되자 양녕은 침을 삼켰다. 모든 인명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원래 역사에서 중요했던 인물들은 다 포함된 것 같았다.
옆에서 바쁘게 받아 적는 이조 관원을 잠시 보고 이방원이 다시 붓을 들고 이름 위에 점을 찍어 간다.
"의정부 참찬 최윤덕은 삼군 도절제사. 오선경과 곽존중은 도통사 종사관, 정간과 김윤수를 도절제사 진무로 삼는다. 체찰사와 각 절제사와 서로 도와 힘쓰도록 하여라."
잠깐의 적막.
"신 병조판서 조말생 아뢰옵니다. 황공하오나 도통사 종사관은 있으나 도통사가 없는 것 같으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알고 있네."
조말생과 이방원의 말에 신하들이 다들 눈치를 살폈다.
이방원은 미동도 없이 붓을 들고 있다가 영의정 유정현 쪽을 힐끗 보더니, 점을 찍는 대신 이름 하나를 써 내려갔다.
"양녕대군 이제를 삼도 도통사로 삼는다."
이방원을 제외한 조계청 안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의정 유정현 옆에 앉아 있던 양녕도 예외는 아니었다.
* * *
다 같이 눈만 휘둥그레진 상태로 한동안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맨 처음에는 놀라서 아무 말을 꺼내지 못했고, 그 뒤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던 탓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였다.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한 것은 양녕도 마찬가지였다.
종친이 벼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생기기 전이고, 원래 역사에서는 영의정 유정현이 겸직할 정도였던 명목상의 직위라 해도 삼도 도통사는 원정군 고위직이다.
그것을 폐세자인 자신에게 내린 이방원의 의도를 추측하는 것만으로도 양녕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단순한 인사문제가 아니다. 신하들이 봤을 때도 양녕 본인과 이도까지 당황한 것을 보면 사전에 얘기가 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방원이 즉흥적으로 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 다들 머뭇거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이방원의 사돈이자 병조판서인 조말생이 나섰다.
"신 병조판서 조말생 아뢰옵니다. 양녕대군이 이번 왜구의 사태를 내다보고 대비책을 마련하였으며, 나라를 지키는 무기를 만드는 데에 기여한 것은 맞습니다. 허나 종친에게 큰 병력을 맡긴다면 반드시 우려하는 이가 나올 것입니다."
최대한 돌려 말했지만 그 숨은 의미는 다들 알아들을 수 있었다. 폐세자 된 왕의 형에게 대병력을 맡긴다면 무슨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지휘권이 없어서 반란 걱정은 없다고 해도 군사에 관여할 빌미를 주는 것이니 나중에라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가만히 듣고 있는 이방원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심기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조말생이 진언을 이어갔다.
"또한 양녕대군은 먼 종친도 아니고 상왕 전하의 아드님이시며 주상 전하의 형이십니다. 이런 가까운 종친을 오랑캐들이 있는 변방, 그것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에 보내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부디 말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거두어 주시옵소서."
조말생이 깔끔하게 정리하자 다른 신하들이 이에 동조하며 다 같이 고개를 조아렸다.
조말생이 정리한 두 이유를 단순히 각각 반양녕파, 친양녕파의 걱정으로 볼 수는 없었다.
종친의 존재는 왕권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약화시키기도 한다. 결국 두 이유 다 신하들이 왕권을 걱정하기에 나온 것이다.
이방원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조말생은 이방원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 조말생이 든 두 가지 이유 다 옳은 말이고 명분도 충분하니 이방원이 논리로 이기거나 신하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말생은 이방원이 양녕을 감쌀 때가 아니면 이기지 못할 토론이나 설득은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과연 이방원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만일 이번의 대마도 정벌이 성공을 거둔다면 그 땅을 조선에 편입하고, 양녕을 대마도주로 봉할 것이다."
신하들은 그 속뜻을 알아듣고 놀라서이건, 못 알아들어 어리둥절해서이건 저마다 고개를 들어 이방원의 용안을 살폈다.
이방원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