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5화 (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05화

5화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양녕을 향한 가운데, 대표해서 말하듯 이도가 말했다.

"허나 지금은 왜구가 줄어든 지 한참 되었습니다. 어떤 연유로 왜를 토벌하시려는 겁니까?"

"대마도주 종정무(소 사다시게)가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양녕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 말을 쭉 이었다.

"대마도는 본디 산이 많고 농사지을 땅이 없는 연유로, 그 섬에 사는 족속들이 배를 타고 약탈을 하러 다닌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왜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종정무가 조선과 교역하여 먹고살고자 약탈을 단속한 탓이라 생각합니다. 한데 이제 종정무가 죽었으니 그 밑에 있던 이들이 단속을 벗어나 다시 도적질을 하려 할 것입니다."

책을 쓰고 인을 개발한 정도로 다른 나라의 역사가 바뀔 거라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니 실제로 원래 역사에서 있었던 내용을 말하기만 해도 당연히 정확한 예측이 될 것이었다.

문제는 말한 내용 자체에는 자신이 있어도, 이방원과 이도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였다.

왕족이, 그것도 폐세자 된 자가 군대에 관한 일에, 더 크게는 국정에 관여하려 들었다 하여 견제를 받을 것인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군대를 일으킬 수는 없는 일이다."

아니면 드디어 재능과 노력을 발휘해 역사에 남을 기회를 잡게 될 것인가?

"그러나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고 이치에 맞는 말이다. 평화로울 때에도 위기를 대비해야 근심이 없는 법인데, 이처럼 걱정이 될 때에 어찌 대비를 안 할 수 있겠는가."

말을 하고 있는 이방원뿐만 아니라 이도와 조말생도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인 말고도 다른 대비책이 있느냐?"

"화약을 쉽게, 많이 만드는 법에 대해 궁리해 본 것이 있습니다."

화약.

고려말 최무선이 개발한 이래로 지리적, 인구적인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이 화포를 주력 무기로 삼은 시점에서 화약의 중요성은 더할 나위 없이 높은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아직 화약의 재료 중 염초와 유황을 구하는 방법이 제대로 자리 잡히지 않아 생산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화약을 쉽고 많이 만드는 법이 있다면 국가적으로 천금을 들여서라도 손에 넣어야만 했다.

잠시 고민하던 이방원이 입을 열었다.

"좋다. 마침 군기감에서 춘절 불꽃놀이에 쓸 화약이 부족하니, 염초를 더 제작하겠노라고 청하여 내가 그리하라 허락한 참이다.

너도 이유는 알겠지만 너에게 당장 이름 있는 자리를 줄 수는 없다. 대신 군기감에서 너의 지시를 따르게 명해놓을 것이니 한번 해보거라."

기회잡기는 대성공이었다. 이제 이 기회를 더 큰 성과로 키워낼 차례였다.

* * *

며칠 뒤.

한성부 성저십리. 왕십리 일대.

흥인지문 근처 공터인 이곳에는 크게 구덩이가 세 개 파였다.

양녕이 말한 화약 제조법인 염초밭 조성을 위한 것이었다.

바닥과 벽면은 흙을 다져 튼튼하게 만들고 석회로 마감을 했고, 구덩이 테두리에는 밖에서 물이 흘러들어오지 않게 턱을 만들고 역시 석회로 마감을 했다. 아직 일꾼 몇이 들어가 마무리를 하고 있었지만 사실 다 끝난 공사였다.

양녕도 사실 이렇게 빨리 될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창덕궁 공사에 사용할 일꾼들과 소석회를 먼저 쓰도록 한 이방원 덕분이었다.

게다가 규모를 키우자는 말은 아예 이도가 먼저 꺼냈다.

양녕이 이학방법론에 쓴 가설과 실험, 변인에 대한 것을 실제로 해보아야 하지 않겠냐는 이유였다.

그리하여 구덩이를 세 개 만들고, 각 구덩이마다 조건을 조금씩 다르게 해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로 하였다.

이렇게 잔뜩 지원과 기대를 받았으니 성과를 내지 않을 수가 없어, 어디 문제라도 생기면 바로 고칠 수 있게 완성이 될 때까지 매일 나와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대군께서는 어떻게 이런 것을 생각하셨습니까?"

옆에 나란히 서서 지켜보고 있던 군기감 관원이 말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양녕이 잠시 생각했다.

질산염이니 칼륨이니 하는 얘기를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아예 설명을 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 적당히 이 시대 사람도 납득할 정도 수준에서 말하기로 했다.

"염초라는 것이 길가의 묵은 흙을 써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길가의 묵은 흙이 다른 흙과 다른 점은 지나다니는 사람과 짐승의 대소변이 쌓였다는 것이지. 그러면 애초부터 대소변을 모아다 묵히면 되는 것이네. 그리고 염초는 물에 녹는 물건이지 않은가. 노천에서 눈이나 비가 올 때마다 녹아 흘러갔을 텐데도 길가의 흙에서도 얻을 수 있다면, 바닥을 석회로 막아 물에 녹아 흘러가지 않게 한다면 그만큼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네."

가만히 듣던 군기감 관원이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이치에 맞는 말씀이십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남기신 내용과도 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토록 마땅한 이치로 만드시니 이 염초밭이라는 것도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허허허, 과찬이네. 내가 아무리 묘수를 떠올렸다 한들 대를 이어 화약을 만들어온 최 부정만큼이나 하겠는가?"

"별다를 것 없는 재주일 뿐인데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최 부정이라 불린 관원은 칭찬이 싫지만은 않은 듯했다.

최해산.

군기감 부정이라는 직책이나 화차의 개발자라는 이력보다도 최무선의 아들이라는 사실로 더 통할 사람이다.

그리고 최무선의 아들이라는 사실 덕분에 누구의 이의도 없이 바로 이번 염초밭 조성 담당으로 지정되었다.

난데없이 업무가 생긴 것도 모자라 주관하는 사람이 왕의 형이고, 그 왕의 형이 매일 얼굴도장을 찍으니 싫어할 법도 하건만, 최해산은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싫어하기는커녕 좋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써야 할 지경이었다.

'대군께서 성공하시어 화약을 더 많이 만들 수 있게 되면, 화약을 더 많이 쓸 수도 있고 화포를 더 많이 개발할 수도 있고 화약을 더 많이 쓰는 화포를 개발할 수도 있다!'

아버지인 최무선이 저승에서 봐도 기겁할 정도로 화약과 화포, 폭발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옆에 양녕이 서 있지만 않았다면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이었고, 그 좋은 기분은 노래 대신 좋은 소식으로 표현되었다.

"실로 상왕 전하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나란히 서서 구덩이 작업을 바라보며 먼저 최해산이 입을 열었다.

"그러네. 사실 인을 만드는 것이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내가 한성에 돌아온 것만으로도 반대가 컸을 텐데 이리도 도움을 주시다니……."

"인을 만드는 것이 성공했기 때문에, 한성에 돌아온 것만으로도 반대가 컸기 때문에 도움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반대가 가라앉기도 했고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최해산이 살짝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한다.

"대군께서 변하신 뒤로 조정이며 항간에 여러 의견이 돌고 있었습니다. 충격으로 사람이 달라진 것이다, 달라졌으나 언제 원래대로 돌아올지 모른다,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다른 문제에 휘말릴 수 있으니 도성에서 멀리 두어야 한다, 개심하였다면 한양에 돌아와도 문제없다…….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뭐, 예상은 했네만 역시 그렇군."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 다른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또? 뭔가?"

"태백의 이야기입니다."

"태백?"

무슨 소리인지 가만히 생각하던 양녕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 태백을 말하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태백은 주나라 고공단보의 세 아들, 태백, 중옹, 계력 중의 맏이였다. 태백과 중옹은 막내인 계력이 현명한 것을 보고 그가 나라를 이을 수 있도록 스스로 이민족의 땅으로 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문신을 했다. 결국 계력이 주나라의 군주가 되었고, 태백은 이민족의 땅에 오나라를 세워 오의 시조가 되었으며 동시에 모든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

논어에도 공자가 태백을 가리켜 '덕이 지극하다'고 한 내용이 있고, 사마천도 사기에서 세가의 첫 시작을 오 태백의 이야기로 시작할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 조정이며 항간에서 오 태백의 이야기가 돈다면, 그 의미는 뻔한 것이었다.

양녕대군이 태백이고, 효령대군이 중옹, 두 대군은 계력처럼 덕이 있는 지금의 주상이 왕위를 물려받도록 자진해서 세자의 자리를 피한 것이다.

"재밌는 이야기로군. 양사(사헌부와 사간원)는 물론이고 온 조정에 나를 다시 성 밖으로 내치려 드는 이들이 가득한데도 그런 이야기가 퍼진단 말이지?"

"백성들의 노래에 민심이 담기듯이, 이야기도 다 이유가 있으니 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금 전에 최해산은 굳이 최근 며칠 사이에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는 부분을 강조했다.

며칠 전 있던 중요한 일이라면 린의 시연뿐. 누가 이야기의 확산을 주도했는지는 뻔했다.

"과연 그렇군. 내가 태백이고 아우님께서 계력이라면 내가 부덕하다 내쳐질 일도 없고, 누가 나를 이용하려 들 명분도 없고, 주상의 권위는 더욱 높아지게 되는군.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구나."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이렇게 양녕과 최해산이 주어도 서술어도 제대로 없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와중, 일꾼 한 사람이 구덩이에서 나왔다.

"다 되었습니다. 금이 가거나 무른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세 구덩이를 모두 점검한 일꾼이 이상 없다는 보고를 했다.

"좋아. 수고했네. 이제 그럼 부어야겠군."

"예, 대군. 자 이제 부어라! 구덩이가 바뀌지 않게 주의들 하여라!"

최해산의 호령에 다른 일꾼들이 장군이며 포대를 짊어지고 따라왔다.

장군에는 한성 안에서 모아온 인분이, 포대에는 마찬가지로 한성 안에서 모아온 재가 들어있었다.

"하나, 둘, 셋!"

일꾼들이 구령에 맞춰 장군을 기울이자, 꿀럭거리며 쏟아지는 걸쭉한 오물이 철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구덩이 바닥에 떨어졌다.

형체가 남은 것, 형체도 안 남은 것, 밝은 색인 것, 진한 색인 것…… 각양각색의 오물이 바닥에 점차 차오른다.

다른 일꾼들은 그 위에 포대에 든 재를 쏟아부었고, 곧이어 긴 나무막대로 바닥에 차오르는 오물을 휘휘 젓기 시작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 광경이 너무나도 굉장했던 탓에, 최해산은 오늘 아침밥으로 된장국에 현미밥을 말아서 먹고 온 것을 살짝 후회했다.

아마 이 광경을 며칠은 볼 테니 내일 아침으로는 떡이나 먹고 와야겠다 생각하는데 양녕이 질문을 해왔다.

"그러고 보니 대소변과 재를 거두는데 한성부 주민들이 반발하지는 않던가?"

"반발은커녕 오히려 환영했습니다. 측간과 부엌을 알아서 치워 준다고 하는데 마다할 리가 있겠습니까."

조선 후기쯤 되면 한양에서 나온 대소변과 재를 인근 농가에 거름으로 판매하기도 하였지만, 아직은 돈이 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럼 한 치 정도 구덩이가 찰 때까지만 대소변과 재를 넣고 그 뒤로는 수시로 잘 저어만 주면 되네. 비가 많이 올 때 덮어주면 더 좋고. 염초 알갱이가 맺히는 데 몇 개월은 걸리겠지만 그동안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예, 대군께서 믿고 맡겨주신 만큼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저 오물 떨어지는 소리 말이야. 꼭 떡 찧는 소리 같지 않나?"

최해산은 다시 내일 아침에 뭘 먹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양녕이 염초밭을 만든 지 7개월 뒤.

1419년 2월 모일.

명 산동성 내주부. 오산위 인근 마을.

때 아닌 겨울 바닷가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바다 위에 무엇인가 이상한 것이 떠 있다는 아이들의 말에 온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구경하러 온 것이다.

"정말로 뭐가 떠 있는데?"

"배인가? 고려에서 장사꾼들이라도 오는 거 아냐?"

저마다 이러저런 의견을 내는 사이에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렸다.

"빨리! 빨리 다들 마을로 가야 한다!"

"어르신, 무슨 일이십니까?"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바닷가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마을로 가야 된다 외친 노인에게 궁금증이 생겼는지 마을 사람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노인의 한 마디에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왜구들…… 왜구들의 배다. 빨리 마을로 가야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