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04화
4화
1418년 8월 중순 모일.
한성부. 양녕대군 사저.
이방원에게 승낙을 받고 며칠이 지났다.
양녕은 그동안 사람을 시켜 광주의 도자기 장인에게 원하는 그릇의 설계도를 보냈고, 한강 모래사장에서 모래도 퍼 오게 시켰고, 동궁전 기물 대신 받은 쌀과 포목으로 숯도 사서 모아두었다.
그리고 주문한 물품이 도착하고 궁에서 나온 소변이 충분히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에는 책을 썼다. 로켓 스토브에 관한 지식을 담은 책으로, 거꾸로 태우는 화로라는 의미로 '역취화로'라 이름까지 붙여 궁에 보내기까지 하고 또 며칠. 드디어 모든 재료가 다 모였다.
"마음에 들게 잘 만들어졌구나."
양녕이 별채 부엌 바닥에 내려놓은 큼직한 증류기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광주의 도자기 장인에게 설계도를 보내 만들게 한 것이 바로 이 증류기다.
정확히는 증류기 종류 중에서도 목이 가늘고 길게 옆으로 누워있는 레토르트였다. 재료가 유리가 아니라 유약을 발라 튼튼하게 구운 자기라는 점만 빼면 모양도 그대로였다.
물론 당시 조선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도구가 갑자기 나타난 상황이었지만, 어차피 레토르트도 아랍 연금술사가 발명한 물건이니 이것도 그 회회인에게 배웠다고 넘길 생각이었다.
애초에 도자기 장인에게 보내는 설계도에도 소주고리에서 따 '회회고리'라고 이름을 써서 보낸 판이었다.
"그럼 설치하게나."
하인들이 양녕의 지시에 맞춰 설치를 시작했다.
먼저 기존에 있던 풍로를 개량해 만든 역취화로(로켓스토브)를 놓고 그 위에 회회고리(레토르트)를 올렸다.
회회고리의 위에 위치한 뚜껑을 열고 숯가루와 모래, 모아온 소변을 섞은 것을 반 정도 찰 정도로 부어 넣고 닫고 흙 반죽으로 틈새를 막았다.
회회고리의 주둥이 부분에는 길게 만든 관을 덧대고 마찬가지로 틈새를 막았다. 마지막으로 찬물이 담긴 큰 그릇에 그 관 끝이 잠기게 하고 찬물에는 석회를 약간 풀었다.
"다 되었다. 이제 불을 피우고 잘 살피거라. 그 회회인이 말하길 독한 공기가 나온다고 하였으니 나오는 김은 절대 들이마시지 말고 부엌문을 열어 바람이 잘 통하게 해라. 또한 불나는 것을 조심하거라."
가상의 회회인을 빌려 당부를 하고 양녕은 의자를 끌어 앉아 가만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굳이 근처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양녕 자신도 '독한 공기'라고 말했지만, 인에 과하게 노출되면 치아와 잇몸이 상하고, 점막에서 고름이 나오고, 뇌손상이 오고 턱뼈가 살 속에서 녹아 버리는 인산괴사 증상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고, 만일의 사태가 터져도 인에 대해 잘 아는 자신이 대비를 하는 것이 나았고, 차후 제조 과정을 개량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가열하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밀봉을 잘 해놨어도 사방으로 소변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실패한다면 폐세자가 미친 나머지 모래와 오줌을 반죽해서 떡을 찌려다 실패했다는 소문이 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잠시 양녕의 머리를 스쳤다.
사실 소변으로만 인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변에 포함된 인의 양은 매우 적고, 소변은 다른 데에도 쓸 일이 있다.
소변 대신 사골을 우리고 아교를 모두 뽑아낸 뼈를 재료로 인을 만들면, 어차피 버려질 뼈기도 하고 뼈의 주성분이 인산칼슘이니 재료 면에서 여러모로 훨씬 적합하지만 그 방법은 선택하기 어려웠다.
바로 온도를 섭씨 1500도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백자를 구워낼 수 있을 정도의 온도다. 온도를 올릴 수는 있겠지만 추출 도구들이 녹아내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무엇보다 성공하더라도 대량생산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든다.
가마 축조도, 연료도, 도구 제작도, 인력도 전부 다 비용인 것이다.
사치품도 아니고 무기로 쓰면 사라져 버릴 물건에 너무 많은 비용을 들일 수는 없다.
결국 더 효율적인 공정 대신 할 수 있는 공정을 택해야 했던 것이다.
"저, 대군마님."
양녕은 종이 자신을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코는 이미 익숙해졌는지 소변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물그릇 안에 흰 기름 같은 것이 맺혔습니다."
그 말에 양녕이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화들짝 놀란 종을 뒤로하고 회회고리 끝을 담가둔 물그릇을 들여다보러 간 양녕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괜한 걱정을 했구나."
* * *
1418년 8월 중순 모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앞 마당.
아직 바닥에 돌을 까는 공사가 끝나지 않아 흙만이 깔린 마당에 양녕이 서 있었다. 왼쪽에는 석회수와 인, 오른쪽에는 물이 담긴 항아리가 하나씩 있었고, 앞에는 나무막대와 부지깽이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양녕이 초조한 기색을 감추며 기다리기를 잠시, 조계청 쪽 문에서 이방원과 이도, 병조판서가 수행원 단 몇 명만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래. 일전에 시도한 것이 성공해 시연을 하려 한다 들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꼭 보여드리고자 하여 이리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좋다. 자리를 잡는 대로 시작하여라."
이방원과 이도가 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내관 둘이 하나씩 일산을 잡고 그늘을 만들었다.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양녕이 바닥에 놓여 있던 나무막대와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다. 부지깽이로 왼쪽의 석회수가 들어있는 항아리 안에서 하얀 것을 살짝 찍어 나무막대에 발랐다. 그리고 다른 나무막대로 그 위를 힘껏 문지르자 바로 불이 붙었다.
이어서 오른쪽 항아리에서 물 한 바가지를 퍼서는 타는 불 위에 부었다.
이에 불은 꺼지는 듯했지만, 물이 다 떨어지자마자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이들의 눈빛에 흥미가 떠올랐다.
불이 붙은 나무막대를 물항아리에 넣고 한참 뒤에 꺼내서 겨우 꺼진 것을 보여 주고는 다시 물항아리에 집어넣었다.
"이어서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새 부지깽이를 들고 마찬가지로 석회수 항아리 안에 든 것을 찍어 바르고 나무막대로 문지르자 불이 붙었다.
쇠로 된 부지깽이에도 불이 붙는 모습에 이방원이 무심결에 가볍게 탄성을 냈다.
부지깽이는 나무막대와 마찬가지로 물을 부어도 다시 타올랐고, 물항아리에 넣고 한참을 있어야 그 불이 꺼졌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하나 더 있다는 말에 좌중이 소리 없이 술렁거렸다.
양녕이 물항아리에 들어가 있던, 불이 꺼져 있던 나무막대와 부지깽이를 꺼내어 물기가 떨어지기를 잠시 기다린 뒤 서로 비볐다.
그러자 다시 두 막대 끝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 * *
잠시 뒤.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시연을 마치고 조계청 안에 이방원과 이도, 양녕과 병조판서가 모여앉았다.
편전(집무실)인 조계청이고 모인 이유도 시연한 무기에 대한 회의였지만 명목상으로만 그럴 뿐 지금 이곳의 분위기는 엄숙함은 어디로 보내 버린 모습이었다.
첫째로는 오늘 있을 업무가 거의 다 끝나 바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 구성원이 구성원이었던 탓이었다.
상왕인 이방원을 기준으로 볼 때 국왕인 이도는 셋째 아들이고 양녕은 첫째 아들이다.
병조판서라고 이 가족모임 분위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 당시의 병조판서가 바로 이방원의 사돈, 조말생이었기 때문이다.
전국 각지에 흉년이 들어 금주령까지 내려진 시기가 아니었다면 술상은 아니더라도 다과상쯤은 올라와 있을 만한 구성이었다.
그리고 셋째 이유는, 이방원이 바라던 대로 양녕이 실제로 쓰임이 큰 성과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한 물건이었다. 저것의 이름이 인이라 하였지?"
"그렇습니다. 실로 도깨비불 같은 물건이라 그리 이름을 붙였습니다."
"나무에 붙어도 타고 쇠에 붙어도 타고, 물로도 쉽게 끌 수 없으니 실로 화공을 가하는 데에 이만한 물건이 없겠구나. 근초(조말생의 자)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이방원은 신기함과 기쁨이 섞인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며 조말생에게 물었다.
"실로 대단한 물건입니다. 그 회회인을 불러 군기감에 자리를 주고 더 많이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조말생의 말에 양녕의 얼굴이 굳었다.
이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필요할 때마다 조선에 갑자기 나타난 기술들의 출처로 주장하려고 급조한 가상의 인물인데 궁으로 데려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이…… 길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고 길에서 헤어진 사이인지라 온 곳도 간 곳도 모릅니다."
"이런. 그런 재능이 있다면 나라를 지키는 일에 중히 쓰일 수 있었을 텐데, 실로 아쉬운 일입니다."
조말생은 정말로 아쉬워 보이는 눈치였다.
"그래도 제가 그 회회인에게 배운 것이 더 기억나는 대로 오늘처럼 정리하여 세상에 내놓을 것이니 대사마(병조판서의 아칭)께서는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더 기억하시는 게 있습니까?"
조말생의 눈이 빛난다.
"바로 떠오르지는 않지만, 있긴 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조말생은 이름으로 수소문해 찾아낼 생각이었다.
양녕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회회인 이름이어야 되고, 찾았더니 그런 사람 없더라 하는 이름이어서도 안 된다.
"핫산이라 하였던 것 같습니다."
필사적으로 굴린 결과물이었다.
"핫산……. 찾기는 어렵겠군요. 한성 일대에 사는 회회인들만 해도 핫산이라는 이가 반은 족히 넘을 테니 말입니다."
다행히도 흔한 이름을 댄다는 전략이 먹혔는지, 조말생이 시무룩해졌다.
"근초께서 어지간히 아쉬우신 모양이구려. 주상, 주상께서도 궁금하신 게 있으면 이참에 물어보세요."
이방원의 말에 묵묵히 생각에 빠져있던 이도가 입을 열었다.
"형님, 저 인이라는 것은 원래 탈 때 연기가 납니까?"
진지한 표정과 진지한 질문이었다. 저마다 들떠 잠시 잊고 있던 주제, 백린으로 돌아온 것이다.
"예, 납니다. 매우 독한 연기가 나는데 그것에 닿으면 눈과 허파를 상하게 합니다."
"그러면 인이 사람의 살에 붙어도 탑니까?"
"물론입니다. 불탈 뿐만 아니라 타오르며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 독이 되어 퍼집니다."
"살에 붙은 불을 끄는 것은 어떻습니까?"
"다급하게 손으로 털면 털던 손에도 인이 묻어 불이 붙겠지요. 물로 어설프게 끄려고 하면 그 열에 물이 끓으니 살이 익어 버릴 것입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내용이었는지 잠시 다들 생각에 잠겼다.
"삼략에 이르기를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도구이니, 하늘의 도가 그것을 미워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무기라면 하늘의 도가 미워할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고려 말 조선 초의 피바다를 직접 헤쳐온 이방원은 전쟁터의 기억이 나는지 표정이 특히 어두운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허나 모든 무기를 하늘의 도가 미워하는데 어찌 인만을 하늘이 미워하겠느냐. 삼략에서도 그 뒤에 이어 이르기를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이것을 써야만 한다면 그것이 곧 하늘의 도'라 하였지."
다시 뜬 이방원의 눈에는 어두움은 어디론가 가고 냉정함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 양녕 너는 어떤 하늘의 도를 이루기 위해 인을 써야 한다 생각하느냐?"
중요한 순간이다.
어쩌면 그저 신기하고 유용한 것을 개발한 왕족으로 남느냐, 역사에 큰 존재로 기억될 것이냐를 결정할 큰 기로일 수도 있다.
"왜를 토벌하고자 합니다."
의외의 답변에 양녕의 말을 듣던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