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03화
3화
1418년 8월 초순 모일.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전하, 양녕대군 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양녕이 조계청 안으로 들어와 앉아있던 이방원에게 절을 올리고는 가까이 와 앉았다.
둘 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묘한 공기가 흐르는 와중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방원이었다.
"광주에 가 있는 동안 어디 아픈 곳은 없었느냐."
"예, 아바마마께서 살펴주신 덕분에 건강히 잘 있었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폐세자가 되고 양녕대군으로 봉해지기도 전에 이방원은 아들의 건강을 걱정해 의원들에게 교대로 가 병을 살피게 하고 온갖 약재를 보내 주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양녕 전에 낳았던 세 아이를 모두 어린 나이에 떠나보내고 어렵게 얻은 자식이 양녕이었고, 그만큼 그를 향한 애정도 각별했다.
아무리 적장자라지만 양녕이 사고를 치고 다닐 때 금방 폐세자하지 못한 것, 폐세자할 때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울었던 것, 폐세자하고 나서조차 곁에 두고자 한 것도 전부 그런 애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새 집에 대한 것은 들었느냐?"
"여경방에 있다는 것만 들었습니다."
"성녕을 위해 마련했던 집이다."
양녕이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았으나 이방원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성녕대군 이종.
이방원의 4남으로 양녕과 효령, 그리고 지금의 국왕인 이도의 뒤를 이어 태어난 늦둥이 아들이었다.
몸이 약했던 탓에 12세에 결혼하고서도 궁에서 내보내지 않고 이방원이 곁에 두었으나, 결국 홍역에 걸려 14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홍빈이 양녕의 몸에 들어오기 불과 4개월 전의 일이다.
이방원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성녕이 죽은 뒤에는 아예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다.
그리고 막내가 위독하여 죽어 가던 그때, 세자 시절의 양녕은 궁 안에서 활쏘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내가 일찍이 성녕을 위해 지어 준 집이었으나 성녕이 들어가서 산 적은 없었다. 허나 그 집을 볼 때마다 자꾸 생각이 나서 차마 볼 수가 없었지."
이방원은 슬픈 음색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인덕궁(이방과-훗날의 정종-가 상왕으로 물러난 후 살던 별궁)에 갈 때도 도성 안에서 바로 가면 그 집이 보이는 탓에 숭례문으로 나가 빙 돌아서 가곤 했다."
이방원의 얼굴에 그리움이 떠올랐다.
"그래도 네가 들어가서 잘 살면 그 집을 볼 때마다 드는 슬픈 생각이 조금이나마 덜어질까 하여 그리 하는 것이다."
"아바마마……."
"이런, 네가 다시 가까운 곳에 오는 좋은 날인데 너무 어두운 이야기를 했구나."
이방원이 잠시 헛기침을 하고 애써 얼굴에서 그리운 기색을 감추었다.
"네가 쓴 책들은 잘 보았다. 정말 대단한 책이었다. 주상(이도)께서도 극찬을 하셨어."
"황송하옵니다."
"이 책 말미에 홍빈(鴻賓)이라 수결(서명)한 것은 혹시 너희 호를 쓴 것이냐?"
"그렇습니다. 후대에 이름을 남기고자 호를 새로 지어 썼으나 낙관을 만들 겨를이 없어 수결만을 했습니다."
"네가 9월생이니 어울리는 호를 잘 지었구나. 후대에 이름을 남긴다……. 좋은 일이지."
이방원이 약간 마음대로 이해하기는 했으나 양녕은 굳이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홍빈이라는 호는 한자는 다르지만 양녕에 빙의하기 전 김홍빈의 본명에서 따 온 것이었다.
양녕대군으로 살아가더라도 후대에 원래 이름만은 남기고 싶었는데, 마침 양녕대군의 기억에 남은 그의 생일도 9월이었다. 예기에서 9월을 설명한 구절인 홍안래빈(鴻雁來賓, 크고 작은 기러기가 찾아온다)을 가지고 호를 지어 예전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앞으로도 보고 싶은 책이 있거나 종이가 부족하면 말하거라. 그것이 아니라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고. 다만 사고만 치지 말거라. 그리고……."
잠시 말을 흐렸다.
"나는 여전히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다 뜻이 있어서 했을 테니 딱히 묻지는 않으마. 다만 건강에 신경을 쓰고 주변에 책잡힐 일은 하지 말거라."
"예 아바마마."
"그래, 이만하면 되었다. 가는 길에 너의 어머니(왕대비 여흥 민씨. 원래 역사에서 훗날의 원경왕후)에게 꼭 가 보거라. 너를 정말로, 정말로 많이 걱정했다."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양녕이 절을 올리고 조계청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이방원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내가 너무 아껴서 내 자식을 망쳐 버린 것이 아니라 다행이야. 너무나도 두렵고 걱정되었는데 아니었구나. 고맙구나, 맏이야……."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는 이방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 * *
조계청을 나온 양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양녕의 몸에 남은 기억이 있다고는 하나 증축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라 창덕궁 내부가 어수선해 왕대비전으로 가는 길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형님!"
그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돌아보자 풍채가 좋은 남자가 푸른 용포를 입고 밝은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상!"
조선의 현 국왕 이도. 원래 역사에서 세종대왕으로 기억되는 조선 최고의 성군.
수행하는 인원들을 대동하고 반갑게 다가온 이도가 양녕의 손을 붙잡았다.
"형님께서 다시 한성으로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으십니까?"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주상께서 어인 일로 창덕궁에 와 계십니까?"
"아직 국정을 돌보는 게 미숙하여 일이 있으면 아바마마께 의견을 여쭙곤 하였는데, 제가 경복궁에 있으면 오가는 일이 번잡하다 하여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요?"
양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재 창덕궁은 정전인 인정전이 너무 작다는 이방원의 뜻으로 인정전과 그 주변을 증축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때문에 쌓아 놓은 자재들과 오가는 일꾼들로 창덕궁 사방이 어수선해 도저히 일국의 왕이 있을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바마마께서 경복궁을 딱히 좋아하지 않으시니 제가 오는 것이 맞지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도가 멋쩍게 웃었다.
본인이 제거한 정도전이 이름을 지은 궁궐이고, 본인이 왕자의 난으로 형제들의 피를 흘린 궁궐이다. 이방원이 경복궁을 꺼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방원은 어지간해서는 경복궁에 가지 않았다.
"그나저나 형님, 살이 좀 빠지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술을 줄여서 술살이 빠졌나 봅니다."
"건강에 신경을 쓰셔야지요. 술을 줄이셔서 건강해진 것은 좋지만 술살이 빠졌다 해도 야위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고기하고 사골을 보낼 테니 푹 고아서 드시고 기력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혹여라도 고기가 모자라다 하시면 언제든 말씀을 하세요."
술살 얘기는 어디론가 흘러가고 갑자기 고기 얘기로 넘어가 버렸다.
불현듯 양녕대군의 몸에 남아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주상은 매우 총명하다. 그리고 고기 얘기가 나오면 절대 막을 수 없다.
"알겠습니다. 주상. 내 꼭 고기를 잘 챙겨 먹고 몸을 보하겠소. 그나저나 어마마마께 문안을 올리러 가야 하는데 길을 찾기가 어려워서 큰일입니다."
얌전히 고기예찬을 긍정하고 다른 주제로 넘겼다.
"지금 공사 중이라 많이 어수선해서 그렇습니다. 여봐라, 너희 중 한 사람이 양녕대군을 왕대비전으로 모시거라."
"감사합니다, 주상."
"별말씀을요. 저도 이만 일을 마저 하러 가봐야겠습니다. 잘 챙겨 드시고 사골이나 고기가 모자라시면 언제든 사람을 보내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주상."
수행원 한 사람을 떼어 주고 떠나가는 이도의 뒷모습을 보던 양녕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사골…… 뼈…… 사골이라……."
* * *
그 시각.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관료 셋이 나란히 앉아 이방원에게 간쟁 중이었다.
"……그런 연유로, 사람이 갑자기 바뀌어 심성이 고르게 되고 학업에 열중을 한다고 하나, 갑자기 변한 것이면 언제 갑자기 되돌아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양녕대군의 변화가 오래 갈 일인지 도성 밖에서 더 검증을 한 뒤에 한양에 들여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세 관료는 사간원과 사헌부 소속. 그들의 진언은 당연히 양녕을 한성에 불러들인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들어진 두 기관이기도 하고, 이방원으로서도 딱히 할 말이 없는 주제인지라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하면서도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이로운 책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책이란 어느 곳에서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광주목으로 내려 보내고 지난번 거두어들였던 책들을 내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여기옵니다."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내 생각해 보겠다. 자네는?"
두 번째 젊은 관료가 말을 시작했다.
"신이 생각하기에 양녕대군이 마음을 고친 것이거나 혹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거나, 영특함을 보이고 행실을 바르게 하였으면 충분히 도성에 다시 들일 수 있다 생각합니다."
이방원은 표정은 바꾸지 않았지만 마음에 드는 말이기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듣기 시작했다.
"허나 지금은 너무 때가 이릅니다. 아직 그 영특함이나 행실의 바뀜이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한성에 들인다면 대소신료는 물론이거니와 백성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올 것입니다. 광주목이 한성에서 그렇게 먼 것도 아니고 섬인 것도 아닙니다. 부디 차분히 시간을 두고 진행하시옵소서, 전하."
"알겠다. 자네의 말이 지극히 온당하니 내 심사숙고하여보겠다."
이방원이 듣기에도 틀리지 않은, 그리고 제법 마음에 드는 얘기였기에 이전의 내키지 않아 하던 분위기가 누그러진 가운데, 마지막 세 번째 신료의 차례가 되었다.
"전하! 양녕대군은 종묘사직에 큰 죄를 지은 자이옵니다! 그런 이를 어찌 다시 도성에 들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방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덩달아서 옆에 있던 두 신료들의 표정도 굳어졌다.
세 번째 신료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설령 제정신을 차린 것이라 해도 이미 종묘사직에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한강을 건넜을 뿐인 광주목에 두는 것 또한 온당하지 않습니다. 뭍에 두시려면 먼 삼남으로 보내시고, 가까이에 두시려면 차라리 섬인 강화도에 유배하시옵소서. 그뿐만이 아니라……."
작정을 하고 왔는지 술술 쏟아지는 대화와, 어두워져 가는 이방원의 표정 사이에서, 바로 옆에 앉은 두 번째 신료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다가 이방원의 손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이방원은 옆에 놓은 벼루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두 번째 신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벼루를 지금 한참 말하고 있는 신료의 머리에 집어던지는 상상이 떠오른 것은 지난날 이방원이 대낮에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철퇴로 죽인 것이 기억난 탓이었다.
그러나 두려움의 이유가 그것은 아니었다. 이방원은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인물이다.
설령 양녕대군에 대해 어떤 말을 듣더라도 맞는 말이라면 받아들이지, 불이익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경우다.
양녕이 패악을 멈추고서도 신하들이 자꾸 그 처우에 언급을 하더라도 이방원이나 새 임금인 이도는 다른 변화를 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양녕이 계속 거론되다 보면 그 존재감도 커지고, 양위할 때 이방원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양녕을 이용해 무언가 해보려는 세력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배다른 형제들에게, 처남들에게 했던 것처럼 망설임 없이 피를 흘릴 것이다.
너무 나간 생각일까?
그래도 상왕의 표정이 어두운 걸 보면 진짜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도 계속 떠드는 옆 신료의 팔목이라도 붙잡아 멈추게 할까?
무례하다는 트집이 잡히면 어쩌지?
그렇다고 다른 뾰족한 수가…….
"전하, 양녕대군 입시이옵니다."
갑자기 들려온 내관의 말에 신료의 말이 멈추고 적막이 찾아왔다.
한참 말하고 있던 세 번째 신료는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간쟁 중인데 다른 이가 왔다고 내관이 끊다니?
내심 불쾌한 감정이 들 때.
"들라 하라. 자네들은 이만 가 보게나."
이방원이 변함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 * *
조계청 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세 명의 신료가 나오는 것을 보고 양녕도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한 신료가 내관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다른 신료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내관이 다소 무례를 범하더라도 위험한 상황으로 흘러가는것을 끊어준 것 같았기에 딱히 질문을 하지 않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어쩐 일로 다시 왔느냐?"
이방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왕대비전에 문안을 갔다 오는 길에 필요한 것이 생겨서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말해 보거라."
양녕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입을 열었다.
"우선 첫째로, 제게 내려 주셨던 동궁전 기물들을 다시 동궁전으로 반환하고자 합니다."
폐세자가 될 때 이방원이 양녕을 위해 동궁전에서 쓰던 것을 그대로 내려보내 줬던 기물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궁궐에서 쓰일 물건이지 대군의 사저에 있을 물건들이 아닙니다. 대신 쌀과 포목으로 받고자 합니다."
'돈으로 받고자 한다는 것이로군.'
그 속뜻을 읽은 이방원이 답했다.
"좋다. 그리 하마. 급하게 양위를 하여 임금만 둘이 된 탓에 동궁전에 기물들이 비어 있으니 다시 받아서 채우고 쌀과 포목으로 내려 주마. 둘째는 무엇이냐?"
"광주목의 도자기 장인들에게 그릇을 몇 개 만들게 하고자 합니다. 물론 삯은 제대로 쳐줄 것이며 왕실에 올라오는 물건에 지장이 생기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방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계속 듣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두 궁궐에서 나오는 소변들을 모아서 쓰고자 합니다."
이방원의 끄덕거리던 고개가 딱 멈추었다.
"셋 다 각각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한데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이냐?"
"일전에 어느 회회인에게 들은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이 정말인지 실제로 해보고자 합니다."
미래의 화학지식을 써먹기 위해 양녕은 가상의 회회인을 팔아먹기로 했다.
"그것으로 나라를 지킬 무기를 만들 것입니다."
양녕은 백린을 만들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