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01화
1화
절대로 잊혀지지 않고 싶었다.
장년의 사내, 김홍빈은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고 병원 침대로 걸어가며 그렇게 생각했다.
재능도 있었다. 노력도 많이 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학생으로 십수년을 노력해 사학 박사까지 달았다.
그렇지만 박사를 달았어도 문사철에게 취업문턱은 좁고, 사는 내내 불안불안한 일자리를 전전할 뿐이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는커녕 누구 하나 기억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거기에 언제부턴가 영문 모를 심각한 두통에 시달리다 오늘 자로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했다. 그나마 모아 둔 돈도 병원에서 다 써 버리고 나면 퇴원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나이도 있고 아프기까지 했던 몸으로 시간강사 자리를 알아보러 다녀야 하나?
"내가 틀렸나."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옆 침대에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 재능과 노력이면 충분히 역사에 남을 업적을 세울 수 있다
평생 믿고 살아온 그것은 이미 무너져가고 있었지만, 홍빈은 마음 한구석에서 여전히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아니다. 기회가 제대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경과 기회가 충분히 받쳐 줬다면 나는 역사에 남을 위업을 세웠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우려던 홍빈은 격해진 편두통으로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 탓에 발을 잘못 딛었고, 무언가가 걸려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병원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고는 의식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기회만 된다면……."
* * *
서력 1418년 6월 5일.
경기도 광주목. 폐세자 이제의 사저.
"……를 강봉하여 양녕대군으로 삼으며 또한 숙빈 김씨는 삼한국대부인으로 삼을 것이니……."
내관 한 사람이 관교(임명장)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홍빈은 그 앞에서 묵묵히 듣고 있었다.
분위기를 읽어서 조용히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조금 전에 바닥에 넘어져 머리를 부딪히고 기절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큰 한옥집에 앉아 있다니?
머리를 부딪힌 충격으로 이상한 것을 보는 것인지, 이게 말로만 듣던 사후세계인지 별생각이 다 들어서 가만히 상황을 살피느라 가만히 있는 것뿐이다.
손을 내려다보자 아주 어리지는 않지만 절대로 자신의 것은 아닌, 20대의 손이 보였다.
일단 저승사자가 내시라는 말은 들은 적 없으니 죽지는 않은 것 같다. 감각도 또렷하고 몸도 젊어진 것 같으니 헛것을 보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설령 헛것을 보는 거라도 검증할 방법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마침 내관의 읽는 소리가 끝나고 고요가 찾아오자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자신은 마루에 앉아 있고, 옆에는 슬픈 표정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앞에 보이는 마당 가운데에는 조금 전까지 관교를 읽던 내관이 걱정스럽게 이쪽을 보고 있고, 주변에는 여종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둘러서 있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광주목의 사저이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 양녕대군…이시옵니다."
"내가 양녕대군이라고."
홍빈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여종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세자전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신분을 물었다면 조선의 세자 저하라고 답했을 것이다.
이제는 회한에 가득 차 저리 질문하시니 근심하시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물론 홍빈은 종들의 이 해석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그저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었고, 충격적인 답변에 놀라서 얼굴이 굳어진 것뿐이었다.
"알겠네. 그럼 살펴 가시게나."
홍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관에게 말했다.
"오늘은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그 말을 남기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 또한 정말로 그냥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뿐이었지만, 또 상황에 적절한 오해를 한 종들은 더 크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 * *
홍빈이 방 안에 들어가 생각에 잠긴 지 한참이 지났다.
그동안 양녕대군의 몸에 남아 있던 기억들이 흐릿하게나마 떠올랐다.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나 이름도 떠올랐지만 대부분은 양녕대군의 과거였다.
꿈이나 헛것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정말로 양녕대군이 된 것 같았다. 그것도 세자에서 대군으로 떨어진 순간의 양녕대군이.
양녕대군 이제.
흔히들 동생인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의 재능을 보고 세자 자리를 넘겨주고자 고의로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후대에 미화된 것이고, 실상은 심각한 인간말종이었다.
폐세자가 된 이후에도 방탕한 버릇을 버리지 못했으니, 아마 태종과 세종이 매번 감싸주지 않았다면 언제 사사됐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저번 삶에서 못한 만큼 편하게 놀며 살아도 천수를 누린다는 것은 역사로 증명된 것이다.'
오히려 방탕하게 살아서 천수를 누렸을 수도 있다. 어설프게 재능을 보였으면 왕권 위협으로 간주되어 유배되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차라리 원 역사대로 마음대로 사는 것이 신상에는 이로울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폐세자가 되었더라도 조선의 대군이라는 신분이고, 두 달 뒤면 동생 충녕이 즉위하며 조선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충분한 기회와 충분한 환경이다.
'어쩌면 도중에 죽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회다. 내 재능과 노력이면 충분히 역사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다시 눈을 뜬다.
'나는 양녕으로 살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말 것이다.'
양녕의 눈이 결심으로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