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328화 (완결) (328/328)

328화 고려영(高麗營)

사마대를 돌파한 고구려군은 추격을 거듭하여 성이 앞을 막으면 성을 불태우고, 군사들이 앞을 막으면 짓밟아 길을 열었다.

이에, 황제 이세민은 죽기 살기로 도주를 거듭하니, 그 몰골이 매우 처참하였다.

한쪽 눈은 잃었고, 등창이 발생하여 눕지도 못하였으며, 옷은 모두 해지고 신발은 닳아 발바닥이 갈라졌다.

만리장성을 넘으면 희망이 있으리라 여겼던 오십만의 대군은 절망에 빠져 뿔뿔이 흩어졌고, 황제 이세민의 곁은 설인귀와 장손무기, 이세적 등 몇몇 장수만이 지킬 따름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개소문이 이끈 고구려군은 추격을 멈출 줄 모르니, 황제 이세민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고구려 놈들이 어찌 이다지도 집요하단 말인가? 연개소문 이놈과의 악연은 참으로 질기고도 질기니, 어려서 내가 이놈의 목을 베지 못함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그러나 탄식한들 변할 것은 없었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으며 개소문이 추격을 가하니, 황제 이세민은 살길을 찾고자 사방을 헤맸다.

자신의 나라에 들어오면, 만리장성이 고구려군을 막고 각지의 군사들이 일어나 격퇴할 것이라 믿었으나 모두 허사였다.

고구려군은 일대의 모든 관문과 성을 여지없이 격파하였고, 황제 이세민이 그토록 고대하던 화친도 요청하지 않았다.

개소문은 점령한 성과 관문 주위에 황량대를 설치하여 감히 당 군이 함부로 준동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사매대에서부터 임유관까지 황량대가 십여 곳이 넘게 세워졌다.

* * *

간신히 개소문의 추격을 피해 장안성으로 피신한 황제 이세민이 각지에 전령을 보내 군사를 일으키라 명하였다.

“감히 고구려의 개소문이 낙양성을 점령하고 성 내 궁전을 불태웠으니, 천하인이 격분할 일이다. 이에 너희가 군사를 일으켜 개소문의 죄를 물어 천하의 도리를 바로 세워라!”

황제의 명은 지엄하였고, 각지에서 군사들이 탁현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들 군사들은 온달과 카사르가 이끈 군사들에 의해 각개 격파당하였고, 장안성의 황제 이세민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장손무기가 황제 이세민에게 아뢰었다.

“폐하, 개소문은 자신의 왕을 시해할 만큼 잔악한 인물이며, 온달은 천하에 그 상대가 없는 장수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성주 양만춘은 끈기 있는 장수이며, 북방 이민족마저 이들을 돕고 있사옵나이다.”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황제 이세민이 장손무기의 장황한 말을 끊었다.

이에, 장손무기가 머리를 조아리며 더듬더듬 아뢰었다.

“사신을 보내시어… 화친을… 청하시옵소서.”

“뭐라?”

황제 이세민이 격노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이내 곧 마음을 다스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총명한 그로서도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인지하고 있던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장손무기의 말이 옳다. 지금으로선 고구려군을 물리칠 방도가 없다. 개소문은 자신이 섬기던 왕조차 뜻이 맞지 않으면, 사지를 잘라 뿌리는 놈이다. 지금은 개소문을 달래야 할 때다.’

마음을 정한 황제 이세민이 침통히 명하였다.

“그대가 사신으로서 화친을 맺도록 하라.”

이에 장손무기가 황제의 명을 받아 탁현으로 향하였다.

* * *

“왜 온 것이냐?”

황제의 사신을 개소문이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에, 장손무기가 더욱 허리를 숙여 청하였다.

“황제 폐하께옵서 화친을 맺고자 하시옵나이다.”

“황제가 친히 작성한 국서는 없는가?”

개소문이 이처럼 심드렁히 물으니, 장손무기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답하였다.

“폐하께옵선, 소신을 보내어 국서를 대신코자 하시었나이다.”

“그래? 황제가 그리하였단 말이지? 나는 본래 사람을 믿지 않는다. 말로 하는 약조를 어찌 믿는가?”

“천하의 주인이신 폐하의 말씀이옵나이다. 궁에는 허언이 없음을 상기하시옵소서.”

장손무기가 애써 당당히 답하니, 개소문이 이를 비웃었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으나, 말은 번복하면 그만이다. 황제가 나와 농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장안성에 들어가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다.”

이에, 장손무기가 넙죽 엎드려 사정하였다.

“합하께옵서 부디 이번만큼은 사정을 봐주시옵소서. 하오면, 황제께서 이를 기억하여 반드시 보은하실 것이옵나이다.”

“보은은 됐구나. 원한을 산 이들끼리 무슨 보은이란 말이냐? 정녕 너희가 화친을 맺고자 한다면, 내 비를 세워 비문으로 남기 터! 받아들이겠느냐?”

이에, 장손무기가 기뻐 급히 답하였다.

“여부가 있겠나이까? 화친 맺음을 기리기 위하여 비를 세우고 비문을 남김은 폐하께서도 반기실 것이옵니다.”

“반긴다라… 좋다. 화친 조건을 말하겠노라.”

“말씀하소서.”

“이 탁현 육십 리 밖에 우리 군사들이 머물 진(陣)을 세울 것이다. 너희가 과연 화친을 맺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음을 확인할 때까지 이 진에 우리 고구려군을 주둔시킬 것이다.”

“…….”

“그리고 진에 영을 세워 고려영(高麗營)이라 부르고, 영 앞에 비를 세워 비문으로 조약을 새길 것이다.”

“하오면… 고려영은 언제까지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옵나이까?”

장손무기가 목소리를 떨며 물으니, 개소문이 피식 웃었다.

“언제까지라니… 영과 진은 모두 우리 고구려의 영토로 유구할 것이다. 혹여 너희가 영과 진을 허물고 비를 무너뜨린다면, 나는 반드시 그 죄를 물어 너희의 강산과 모든 가옥을 불태울 것이니라. 너는 가서 황제에게 내 말을 똑똑히 전하거라.”

이에, 장손무기가 기겁하여 머리를 조아리고는 장안성으로 돌아갔다.

장손무기의 보고를 접한 황제 이세민은 잠시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라나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고려영만 유지한다면, 더 이상 전쟁은 없는 것인가? 장안성은 안전할 수 있는가?”

황제 이세민이 비통한 심정으로 물으니, 장손무기가 힘겹게 답하였다.

“그러하옵니다.”

이에, 황제 이세민이 허망한 심정으로 웃으며 명하였다.

“개소문의 뜻을 따르겠다. 그리 전하라.”

이리하여 고려영이 세워지고, 천년이 지나도록 영 앞에 세워진 비를 중원인들은 결코 허물지 못하였다.

* * *

개소문이 당 황제의 항복과 다름없는 화친을 받아내니, 온달을 비롯한 장수들이 기뻐하였고, 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고려영은 독자적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있었느니, 탁현에서부터 임유관 일대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다.

고려영이 완성되고, 차츰 안정되어 가니 개소문이 온달을 방문하였다.

“장군, 일전에 장군과 온동이 말한… 행군원수부에서의 대결을 이제 준비하겠습니다.”

이에, 온달이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빠를수록 좋다.”

온달의 이 짧은 대답에 개소문은 즉시 행군원수부 연무장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날이 밝기 무섭게 온달과 온동이 행군원수부로 향하니, 양만춘도 막바우와 경우, 강혁수, 귀니수, 황우, 공별 등을 이끌고 뒤따랐다.

이에, 소식을 접한 개소문이 홀로 행군원수부로 향하니, 급히 팽무일이 뒤를 쫓았고, 공손향과 야수도 그 뒤를 따랐다.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과 고구려 제일의 무장 온달의 대결이 벌어진다는 소식은 이내 곧 탁현 일대에 퍼졌다.

이에, 막리지 고정의가 고돌발, 고즉리 등을 대동한 채 싸움을 말리기 위해 연무장으로 향하였다.

고정의가 행군원수부 앞에 당도해 보니, 이미 일대의 백성들과 군사들로 가득하였다.

이에, 고정의가 군사들에게 엄히 명하였다.

“소란스럽지 않도록 질서를 유지케 하라!”

고구려 군사들이 경계를 서기 시작하니, 고정의가 안심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연무장에 들어서니, 이미 당도한 온달 일행과 개소문 일행이 서로 마주하고 대치 중이었다.

살기가 감도는 광경에, 고정의가 놀라 소리쳐 말하였다.

“대막리지! 멈추시오! 온달 장군! 멈추시오! 지금 우리가 서로 피를 흘려서는 아니 되오! 화친을 맺었다고는 하나, 이곳은 아직 당의 영토고, 우리의 전력이 손실되어선 아니 되오!”

이에, 개소문과 온달이 동시에 시선을 고정의에게 돌렸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온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늙은 충신이로다. 아마도 개소문 네게 충성을 다할 터이지?”

이에, 개소문이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막리지는 내게 충심을 다하고 있지요. 물론, 우리 고구려와 태왕 폐하께도 충심을 다하고 있고요.”

“그러한가?”

개소문의 말에 온달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온동과 강혁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다시 개소문에게 시선을 옮겨 당당히 말하였다.

“강이식 대장군께선 검귀란 칭호를 적장을 베어 취하셨다. 그리고 나는 계찰산 전투의 활약으로 태왕 폐하께 검신이란 칭호를 받았느니라. 이에, 너희에게 말한다.”

온달이 잠시 말을 멈추니,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며 바라보았다.

“연개소문은 대장군 강이식의 뒤를 이어 스스로 검귀라 칭하고 있고, 나 역시 아직도 살아 검신 칭호를 유지하고 있으니, 너희 중 그 누구라도 나와 개소문을 이기는 자는 우리의 칭호를 취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개소문을 이길 경우 검귀 칭호를 취할 것이다.”

온달이 뜻밖의 말을 하니, 모두가 놀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에, 온달이 개소문을 응시하더니 운철대검을 땅에 박아 세우고는 백두검법의 보법을 밟으며 달려들었다.

“내 너의 검귀 칭호를 빼앗겠노라!”

“장군의 칭호나 잘 보전하소서!”

개소문도 적수공권으로 온달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이에, 경우가 온동을 바라보니, 기척을 느낀 온동이 나지막이 말하였다.

“장군께선 아직 고구려에 개소문 형님이 필요하다 여기시는 듯합니다.”

“그러신가? 명줄을 끊기 아깝다 여긴 모양이시로군.”

온달이 아직 개소문에 대한 의심을 털지 않았고, 개소문 또한 자신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달은 이미 내심 개소문을 신뢰하기 시작하였기에, 죄를 묻기보다 무술 경연을 택한 듯하였다.

이에, 가만히 지켜보던 강혁수가 낭아봉을 땅에 박아 세우고는 개소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귀 칭호는 선친 것이니, 이제 내가 물려받아야겠소이다!”

개소문은 온달과 강혁수를 동시에 상대하게 되었으나,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었고 오히려 반기는 듯하였다.

“좋다! 어디 한번 찾아가 보거라!”

개소문의 외침과 강혁수의 기합이 연무장에 메아리쳤고, 온달이 내지른 주먹이 힘차게 개소문의 안면에 꽂혔다.

개소문이 비틀거리고, 강혁수가 이를 노려 달려드니, 온달이 강혁수를 걷어차 날려버리고는 개소문을 향해 다시 주먹을 내질렀다.

거구의 사내 셋이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험악하였으나, 이 광경을 지켜보는 연무장 내 모든 이들은 내심 안심하였다.

그리고 이때, 소리에 집중하던 온동이 피가 끓어올라 금강대도를 내려놓고는 몸을 날렸다.

“검신 칭호는 내가 취하고 싶습니다!”

온동이 내지른 주먹에 턱을 맞은 온달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껄껄 웃었다.

“하하하, 어디 한번 뺏어 보거라!”

이에, 온달과 온동이 겨루고, 개소문과 강혁수가 무예를 겨루니 이를 지켜보던 경우와 막바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마주 보았다.

“경우, 우린 안분지족하여 취하고픈 칭호가 없으니 밥이나 먹으러 가세. 저 바보들은 싸우라 냅두고 말일세.”

막바우가 소매를 끄니 경우도 따라나서며 힐끔 뒤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네 사람의 주먹과 발이 오고 갔으나, 살의를 지니지 않아 마음 편히 조반을 들 수 있을 듯하였다.

“그래, 우린 밥이나 먹자고. 어서 가세, 막바우.”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한가로움이었다.

‘살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막바우에게 소매를 잡혀 끌려가면서도 경우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하였다.

“이보게 경우, 나는 고향에 돌아가면 장가부터 들 것이네. 자네도 더 늦기 전에 장가가게나. 하하하.”

연무장을 벗어나는 막바우기 크게 웃었고, 연무장 안에선 기합 소리가 여전하였다.

<검신검귀(劍神劍鬼)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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