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누렁이의 죽음 (4)
황제 이세민은 회군이란 명분을 내세웠고, 결코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여, 다음 원정을 위해 단 한 명의 군사라도 더 보전하여 요하를 넘고자 했으니, 퇴각 중에도 대열을 갖추라고 엄히 명하였다.
“행군이 늦어지더라도 진형을 갖추고 대열을 유지하라. 그리하여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
고구려군의 추격이 두려운 장수들이 행군 속도를 높이자 청하였으나, 황제 이세민은 단호하였다.
“그렇다. 고구려놈들은 반드시 요하에서 우리의 배후를 급습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진형을 갖추고 대열을 유지해야 한다. 두렵다고 서둘러선 아니되느니라.”
그리고 마침내 요하에 다다르니, 황제 이세민은 도하를 명하지 않고 오히려 넓게 진을 펼치라 명하였다.
“도하하지 않는다. 고구려군의 추격을 이곳에서 격퇴한 후 도하할 것이니라.”
황제 이세민의 명에 따라 요하를 등지고, 당 군이 넓게 진형을 갖추었는데, 배수진이 아닌 육화진이었다.
황제 이세민의 중군이 육화진을 펼치고, 그 좌우에 이세적과 이도종이 각기 부대를 이끌고 육화진을 따로 펼쳤다.
또한, 중군의 앞에 설인귀와 장검이 따로 부대를 이끌고 육화진을 펼쳤다.
그리고 황제의 중군 뒤에도 장손무기가 도하를 준비하며 육화진을 펼쳤으니, 이들 진형이 모여 거대한 육화진이 형성된 채 고구려군을 기다렸다.
“오너라 연개소문. 오너라 온달! 내 너희를 이곳에서 격퇴하여 감히 추격할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황제 이세민의 바람과 달리, 맹렬히 뒤를 쫓던 고구려군은 날이 저물자 추격을 멈추고 작은 구릉을 사이에 둔 채 당 군과 대치하였다.
이에, 황제 이세민은 서두르지 않는 고구려군의 전술에 내심 속이 타들어갔다.
* * *
출전을 앞둔 양만춘과 온달은 밤이 깊어 진영 순시를 함께하였다.
“저 구릉 너머 적들이 진을 펼치고 있는데도 무척이나 고요하군요.”
양만춘이 어둠에 가린 구릉을 응시하며 말하니, 온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 불시에 야습을 강행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겠습니다.”
이처럼 말하며 발을 옮기던 온달의 시야에 자신의 늙은 말 누렁이 곁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허리가 구부정하였고, 손에 무엇인가를 쥐었는데 어두워 자세히 살필 수 없었다.
이에, 온달은 불길한 마음에 급히 내달리며 소리쳤다.
“누구냐?”
갑작스럽게 온달이 나타나니, 누렁이 곁에 서 있던 사내가 두려워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답하였다.
“송구하옵니다.”
온달이 사내를 자세히 살피니, 머리는 온통 백발이었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노인에게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은 온달이 목소리를 누그러뜨려 다시 물었다.
“여기서 무엇 하느냐 물었소이다.”
이에, 노인이 손에 든 것을 뒤로 감추며 답하지 못하니 온달이 의심스러워 다시 물었다.
“뒤에 감춘 것이 무엇이오?”
“소, 송구하옵니다.”
노인이 재차 머리를 조아리며 답하지 못하니, 온달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어찌 답하지 못하는 게요?”
온달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가니, 노인이 두려워 몸을 떨었다.
이때, 온달의 뒤를 급히 쫓아온 양만춘이 노인을 알아보고는 반겼다.
“한들 어른 아니시오? 어찌 이곳에 계신 것이오?”
양만춘과 아는 사이인 듯하여 온달이 경계를 풀고 노인을 다시 살폈다.
마른 몸에 갑주를 걸쳤으나, 말을 달리며 당 군을 추격하기엔 너무 늙어 보였다.
노인이 온달의 시선을 의식하여 뒤에 감춘 손을 내보이니, 양손 가득 콩이 쥐여 있었다.
“콩 아닌가?”
온달이 의아해 물으니,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였다.
“송구하옵니다.”
“그 콩을 누렁이에게 먹인 것이오?”
온달이 목소리를 누그러뜨려 다시 물으니 노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데 내 말에 콩을 먹인 게요?”
“훔친 것은 아닙니다. 믿어 주십시오. 다른 마음은 없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노인이 용서를 구하니, 온달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말에게 콩을 먹인 것이 뭐 그리 잘못이라고 용서를 구하오? 헌데, 노인장은 전장을 누비기에 너무 나이가 많지 않소?”
이에, 노인이 강하게 머리를 저으며 답하였다.
“아닙니다. 소인 선대 성주님 때부터 군마를 타고 전장을 내달린 군졸로 비록 백발이 되었으나, 아직도 말에 오를 기력은 있습니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터이니, 믿어 주십시오.”
“허허, 그래 믿겠소. 헌데, 전장이 두렵지 않으시오?”
“어찌 전장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소인 숱한 전장을 겪었고 그 모든 전장이 두려웠습니다. 하오나, 당금 최고의 영웅이라 불리는 당 황제를 쫓는 이 기쁜 전장을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기쁜 전장?”
“그렇습니다. 소인, 두 아들을 수와의 전장에서 잃고 큰 손주마저 이번 전장에서 잃었습니다. 이제 작은 손주 하나 남아 안시성에 있사온데, 장군과 성주께서 안시성을 당 군에게서 지켜내 주시고, 이렇듯 당 황제를 추격하시니, 이 늙은 몸 기뻐 전장에 나왔습니다.”
“허허, 그 마음은 알겠으나, 무척 고된 싸움이 될 터인데…….”
“늙었다 내치지 마시옵고, 감히 장군의 곁을 지킬 자격이 없다면, 장군의 말이라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노인이 이처럼 간청하니, 온달이 양만춘에게 시선을 옮겨 의견을 구하였다.
이에, 양만춘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한들 어른은 평민이나, 말에 대해 지식이 해박하여 선친께서 매우 아끼고 존중하시던 군졸입니다.”
일개 평민 출신 군졸을 양만춘이 이처럼 낮춰 대하지 않으니, 온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어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소. 내 누렁이를 잘 돌봐 주시구려.”
이에, 노인이 감격하여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 * *
날이 밝자, 출전을 앞둔 고구려 진영에서 회의가 열렸다.
“내가 선두에 서서 적의 중앙 본진을 치겠소.”
개소문이 지도에 그려진 당 군의 진형을 가리키며 말하니, 온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개소문 너는 뒤에 남아야 한다.”
“어찌 그렇습니까?”
개소문이 의아해 물으니, 온달이 담담히 답하였다.
“나는 네가 적인지 동지인지 아직 구분이 가지 않으나, 하나만은 확실히 판단할 수 있다.”
“무엇입니까?”
“너는 작금의 고구려에 필요한 존재다. 네가 선대 태왕을 시해하고 대장군을 시해한 대역죄인이고, 나의 원수라 할지라도… 그 사실만큼은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여, 네가 선두에 서서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는 없다. 너는 후미를 지켜라.”
온달의 단호한 말투에 개소문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아직 고집을 굽힐 생각이 없는지 다시 입을 열려고 하니, 이번엔 양만춘이 개소문의 말을 끊었다.
“개소문 너는 온달 장군의 말을 따르라. 우리 고구려군을 지휘하는 네가 굳이 선두에 설 필요는 없다. 너를 아껴서 하는 말이 아닌, 우리 고구려를 위해 하는 말이니, 두말없이 따르라.”
하여, 개소문도 더는 이견을 내지 못하였다.
가만히 이를 지켜보던 팽무일은 온달과 양만춘이 자신들을 적으로 의심하면서도 고구려를 위해 개소문의 안위를 염려하는 모습에 무척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온달과 양만춘은 과연 사부와 나의 적인가? 저들은 과연 우리의 안위를 위협할 것인가?’
그리고, 이 모습을 공손향과 야수가 말없이 지켜보았다.
* * *
회의를 마친 온달이 군막에서 나오니, 늙은 군졸 한들이 누렁이를 끌고 와 대령하였다.
누렁이는 온달과 처음 만나던 당시, 이미 군에서 퇴역한 군마였으니, 그 수명을 다하고 남을 정도로 늙고 쇠약해 있었다.
더구나, 근래 근골에 무리가 갈 정도로 심하게 전장을 내달려 매우 지친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전날 군마에 대해 지식이 풍부한 군졸 한들이 정성스럽게 보살핀 덕분에 조금이나마 기력을 찾아 눈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오랜만에 누렁이의 털에 윤기가 돌고 눈에 힘이 들어가 있으니, 온달이 기뻐 한들을 칭찬하였다.
“밤새 누렁이를 돌본 것이오? 애썼소.”
이에, 한들이 감격하여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좋은 말입니다. 힘차게 전장을 누빌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온달이 늙은 말 누렁이와 늙은 군졸 한들을 번갈아 살피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노인장과 나의 누렁이가 좀 더 전장을 누빌 수 있으면 좋겠구려.”
온달이 이처럼 말하고 누렁이에 오르니, 한들도 자신의 말에 올랐다.
* * *
요하를 등지고 진을 펼친 당 군의 수가 오십만에 달하였으나, 기병 일색의 고구려군 또한 그 군세가 밀리지 않았다.
고구려군은 신성과 국내성, 건안성의 개마무사와 안시성의 개마무사, 궁기병, 말갈 기병 등이 더해져 모두 십팔만에 달하였다.
온달이 선두에 서서 구릉에 오르니, 십팔만 기의 기병이 구릉 위게 넓게 대형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육화진이로군.”
당 군이 펼친 진형을 살피며 온달이 이처럼 중얼거리고는 운철대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에, 사위에서 돌격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돌격하라!”
온달이 크게 소리치니, 주인의 마음을 읽은 누렁이가 힘차게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양만춘과 막바우, 강혁수가 따르고, 경우와 귀니수가 거리를 두고 궁기병과 말갈 기병을 이끌었다.
이어서 고구려군의 좌우 진형에서 고정의와 고돌발이 개마무사를 이끌고 질주를 시작하니, 개소문과 고즉리가 구릉 위에 남아 전장을 살폈다.
온동은 공손향, 팽무일, 야수 등과 함께 후미에 남아 개소문의 지휘를 받았다.
이는 온달이 온동을 염려하여 개소문에게 맡긴 것이나, 개소문도 내심 반기고 있었다.
* * *
뿌우우우!
연신 뿔나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니, 당 군도 이에 맞서 북을 울려기 시작하였다.
둥둥둥둥!
요란히 울리는 북소리가 설인귀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였다.
“돌격에 대비하라! 극을 땅에 대어 버텨라!”
맹렬히 돌진해 오는 고구려의 개마무사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소리쳐 명하던 설인귀의 시야에 누런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내달려오는 온달의 모습이 들어왔다.
“온다… 온달이 온다…….”
나지막이 중얼거린 설인귀가 부장들에게 명하였다.
“저 누런 말을 집중적으로 노려 화살을 날려라. 이번 전투에서 다른 그 무엇보다 우린 저 누런 말을 쓰러뜨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
감히 온달을 상대로 맞서기 두려운 설인귀가 이처럼 명하니, 부장들이 바삐 움직여 명을 전하였다.
* * *
“돌격하라! 선두의 적진을 돌파하고, 적의 본진까지 뚫어 난전을 벌이겠다!”
온달의 우렁찬 명에 막바우가 화답하였다.
“모두 뚫어 버려라! 짓밟아라!”
이에, 개마무사들이 더욱 힘차게 말을 몰아 내달리며 삭을 일자로 길게 뻗어 돌격 진형을 갖추었다.
“와아아아!”
설인귀가 이끈 당 군 진형에서도 함성이 울리고, 극을 앞세운 창병과 방패를 든 중장보병이 개마무사의 돌격에 대비하였다.
“화살을 날려라!”
그리고 설인귀의 명령이 떨어지니, 기다리고 있던 궁병들이 일제히 온달을 향해 살을 날렸다.
* * *
“파산귀검!”
자신을 향해 빗발치듯 날아드는 화살에도 온달은 결코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운철대검을 휘둘러 검기를 일자로 뻗으니, 앞에서 날아들던 화살들이 모두 검기에 휘말려 날아갔다.
그러나 좌우 양측과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비까지 검기로 날려버릴 수 없었으니, 영리한 누렁이가 질주하며 이를 모두 회피하였다.
이에, 온달은 쏟아지는 화살비 속에서도 오직 누렁이를 믿고 돌진할 수 있었다.
“돌격하라!”
온달의 외침과 함께 성난 파도처럼 개마무사들이 당 군의 극과 방패를 무시한 채 돌격하였다.
개마무사들의 너무도 거센 돌진에 극이 부러지고 방패가 날아갔다.
그리고 당 군의 처참한 비명이 전장에 메아리치고, 거침없는 개마무사들의 질주가 계속해 이어졌다.
순식간에 진형이 무너지고 군사들이 짓밟히니, 설인귀의 분노가 극에 달하였다.
“이 빌어먹을 고구려 놈들!”
이를 으드득 갈며 설인귀가 온달을 향해 말을 달리려던 그 순간, 설인귀의 등 뒤에서 한 대의 화살이 길게 뻗어 날아가더니, 누렁이의 눈에 박혔다.
개마무사의 기세에 놀라 도망치던 궁병이 제대로 겨누지도 못한 채 마구잡이로 날린 화살이 누렁이를 맞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