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누렁이의 죽음 (3)
영주의 위기는 전장이 요서로 옮겨갔음을 의미하였고, 이는 바로 원정이 실패하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총명한 황제 이세민은 그 누구보다 전장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큰일이다. 군사들이 알게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명분이 필요하다. 사기를 저하시키지 않고 물러날 명분이 필요하다. 패하지 않고 잠시 물러나 재정비한다는 명분만 있다면 고구려 원정은 훗날 다시 재개할 수 있다.’
전령의 보고를 접한 장수들의 표정은 이미 어두웠고, 황제 이세민은 이들의 속내를 이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패했다 여기고 있다. 장수들이 이러할진대, 군사들은 더욱 사기가 저하될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황제 이세민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장수들 한 명 한 명 유심히 살피던 이세민의 시선이 영주총관이 보낸 전령에게서 멈추었다.
그리고 황제 이세민의 눈빛이 순간 빛났다.
“이놈은 고구려 연개소문이 보낸 간자다. 당장 이놈의 목을 베거라.”
“폐… 폐하… 아니옵니다. 소인은 간자가 아니옵니다. 억울하옵니다.”
난데없이 황제가 자신의 목을 베라 명하니, 전령이 영문도 모른 채 벌벌 떨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닥쳐라!”
그러나 영리한 장손무기는 황제의 의중을 간파하여 전령이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못하게 엄히 꾸짖었다.
이에, 황제 이세민이 설인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명하였다.
“밖으로 끌어내어 목을 베지 말고 여기서 베라. 이놈이 요언을 지껄여 군중을 어지럽힐 수 있도다.”
“명을 받사옵나이다.”
설인귀가 즉시 검을 빼어 들고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전령의 목을 베었다.
이에, 장손무기가 군사들을 불러 시신을 치우라 명하였다.
“고구려 연개소문이 보낸 간자다. 이놈의 목을 나무에 걸어 연개소문이 감히 허튼 망동을 못 하도록 볼 수 있게 하라.”
간자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전령의 시신이 치워지니, 황제 이세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곧 가을이 올 것이다. 북방의 가을은 짧고 겨울은 길며, 매우 혹독하다. 아쉽게도 우리의 의복은 겨울을 나기 매우 부족하고 모든 군사의 의복을 탁현에서 수송해 오기도 어려우며, 시일 또한 오래 지체될 것이다.”
황제가 잠시 말을 멈추고 장수들의 표정을 살폈다.
어리석고 눈치 없는 장수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황제 이세민이 내심 안도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여, 탁현으로 잠시 회군하여 재정비할 터이니, 요동성과 백암성, 개모성 등에도 알려 즉시 합류케 하라.”
“명을 받사옵나이다. 밤을 새워서라도 즉시 합류하라 전하겠나이다.”
장손무기가 즉시 황제의 명을 받아 당 군이 점령한 각 성들에 전령을 보내었다.
이에, 황제 이세민이 흡족하여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도를 펼쳐 퇴각로를 정하였다.
“각성의 군사들이 합류하는 즉시 우리는 요하 상류가 아닌 요하 하류를 도하할 것이다.”
영주성 앞에 진을 친 카사르의 올루스를 의식하여 정한 퇴각로였다.
‘우리가 이미 한번 패하여 타격을 크게 입었다고는 하나, 아직 대군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의 사기 또한 바닥을 치지 않았다. 영주 앞에 진을 친 놈들만 피해 회군할 수 있다면, 군사들의 동요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군사들의 동요만 막을 수 있다면 고구려 원정 따위는 언제든 다시 재개할 수 있다.’
회군 소식은 지친 군사들을 기쁘게 하였다.
요동성을 비롯한 각성들을 점령한 당 군이 일제히 빠져나가며 속속들이 합류하기 시작하니, 겉보기에 군세가 저절로 재정비되는 듯하였다.
패주가 아닌 회군이란 명분으로 군사들의 동요를 막았고, 비워진 성을 탈환하기 위해 당분간 고구려군이 뒤를 쫓지 못할 것이 분명하였다.
내심 만족한 황제 이세민이 다시 명을 내렸다.
“비록 적이었으나, 양만춘은 매우 훌륭한 장수였다. 고구려는 오만하고 예를 다하지 않았으나, 사해천하 그 어느 곳도 나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곳이 없으니, 이 오만한 고구려 역시 나의 땅이요. 백성이니라.”
“…….”
“하여, 용맹과 지혜를 다해 버틴 양만춘에게 상을 내려 위로할 터이니, 잘 보이는 곳에 단을 쌓도록 하라.”
단이 세워지고, 황제 이세민의 명에 따라 그 위에 비단이 작은 구릉처럼 높이 쌓였다.
이는 바로, 양만춘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내린 상이었으니, 회군하면서도 나름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황제 이세민의 결정이었다.
퇴각하면서도 당 군은 결코 바삐 행군 속도를 높이지 않았고, 대열을 지키며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성주 고돌발이 자리를 비운 건안성을 지나칠 때도 범이 썩은 고기를 탐하지 않듯 함부로 건안성을 공략하지 않았다.
당 군이 이처럼 질서와 군율을 지키고, 대열을 유지한 채 천천히 회군하니, 고구려군도 함부로 추격하여 공격하기 어려울 듯하였다.
이처럼 황제의 판단은 거의 모든 면에서 정확하여 성공적으로 회군이 진행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 황제 이세민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 내린 폭우였다.
* * *
당 군의 회군 소식은 안시성에도 전해졌다.
그리고 이내 곧 전략 회의가 진행되니, 여러 의견들이 나왔다.
“당장 당 군을 추격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일단 당 군이 떠난 각성들을 살피고 민심을 돌봄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신성 성주이자 막리지 고정의가 가장 먼저 의견을 내니,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상당하였다.
이에, 평강이 안시성의 장수들과 군사들을 대신하여 이견을 내었다.
“우리 영토를 침범한 적을 이대로 물러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즉시 추격하여 타격을 가해야 합니다.”
“허나, 우리가 비록 잘 싸워 막아내었다고는 하나, 당 군은 아직 대군을 유지하고 있고, 우리 군사들은 지친 상태입니다. 당 군은 곧 요하를 건너 요서로 진입할 터인데, 계속 추격하는 것은 너무도 크나큰 손실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고정의가 이처럼 우려를 표하니, 동조하는 장수들 또한 상당하였다.
“아닙니다. 이미 영주 앞에 적봉진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 대군이 진을 치고 있으니, 이들과 힘을 합친다면 퇴각하는 당 군에게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평강이 이처럼 재차 추격을 주장하니, 연개소문도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휘하 장수들의 생각은 달랐다.
영주성 앞에 진을 친 북방 이민족 전사들과 적봉진을 지키던 군사들은 모두 온달과 을지문덕을 따르던 이들이었다.
온달과 양만춘이 아직 연개소문에 대한 오해를 풀지 않은 이때, 적봉진의 군사들 창이 누구에게 향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국내성 성주 고즉리가 좋은 말로 평강을 달래듯 말하였다.
“공주님의 의견은 일견 타당하오나, 당 황제는 이미 안시성 성주 양만춘에게 비단을 산처럼 쌓아 상을 내렸습니다. 이는 저들이 화친을 원한다는 뜻이오니, 우리는 이때 추격하여 공격하기보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고 평화를 취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터무니없는 소리요! 그따위 비단 내가 받을 이유도 없을뿐더러, 내 어찌 적국의 왕이 내린 상을 받는 대역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이오? 그대는 함부로 말하여 나를 죄짓게 하지 마시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크게 호통을 치니, 고즉리가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이에, 가만히 듣고 있던 개소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성주의 말이 옳소. 적국인 당 황제가 내린 상을 성주가 받을 이유가 없소. 비단은 백성들이 나눠 갖도록 하고, 우리는 군을 추스르고 추격하도록 합시다.”
“합하!”
고정의가 불안한 마음에 소리높여 불렀으나, 개소문은 손을 내저어 말을 끊고는 온달과 양만춘에게 시선을 옮겨 물었다.
“나는 추격할 것입니다. 장군과 성주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이에, 온달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하였다.
“이미 탁현 행군원수부에서 네 죄를 묻겠다 말하였다. 허니, 너와 난 만리장성을 넘어 탁현까지 당 군을 쫓아야 하느니라.”
온달이 이처럼 너무도 단호히 답하니, 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여전히 온달과 양만춘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고즉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고구려는 아직도 남쪽 신라의 위협이 남아 있습니다. 당 군은 여전히 대군이라 적은 수로 쫓을 수 없고, 우리가 대군을 유지해 좇는다면 신라가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로선 화친만이 평화를 취할 수 있는 상책입니다.”
“평화라… 화친을 통한 평화라…….”
개소문이 고즉리의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리더니, 눈을 빛내며 단호히 말하였다.
“항상 화친으로 평화를 취하자 부르짖던 이들은 우리 고구려를 적에게 넘기려던 자들이었소.”
“합… 합하!”
고즉리가 놀라 항변하려 입을 여니, 이번에도 개소문이 손을 내저어 말을 끊었다.
“그대가 우리 고구려를 당에게 넘기려 한다는 말이 아니오. 그대는 이미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평화를 얻고자 노력하였음을 나도 잘 알고 있소. 성주, 화친은 종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오. 나는 평화란 싸움을 끝내야 얻을 수 있다 생각하오.”
잠시 말을 멈춘 개소문이 고정의와 고즉리의 눈을 천천히 들여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오랜 세월, 중원의 왕조가 세워지면, 하나같이 우리 고구려를 침공하였소. 우리 고구려가 이들을 막아내면, 다음 왕조가 다시 우리 고구려를 침공하였소. 이렇듯 침공이 거듭된 연유는 바로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저들의 궁전이 불타지 않았기 때문이오.”
이에 고정의와 고즉리가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고, 연개소문은 이들의 표정을 읽으며 말을 이었다.
“자기 집이 불타지 않으니, 마음 놓고 우리 땅을 침범하는 것이오. 나는 종전을 위해! 반드시 만리장성을 넘어서까지 황제의 뒤를 쫓을 것이고! 가는 길에 있는 당의 성과 집을 모두 불태울 것이오!”
“옳은 소리!”
개소문의 기세에 막바우가 기뻐 손뼉까지 치며 부르짖었다.
온달과 양만춘도 개소문과 뜻을 같이하였기에, 이견을 달지 않았고 고정의와 고즉리도 더는 이견을 내지 못하였다.
이에, 조용히 듣고 있던 공손향이 지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요하 하류로 당 군을 쫓고, 영주성 앞 원군은 당 군이 요택을 벗어나지 못하게 압박하며 쫓는다면, 요택에 갇혀 패주하는 당 군의 피해가 상당할 것입니다.”
공손향의 이 의견은 개소문을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적봉진의 군사들과 안시성의 군사들이 합치지 못하게 막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개소문과 온달, 양만춘은 퇴각하는 당 군을 요택에 밀어 넣고 공격할 수 있는 계책이라 여겨 매우 만족하였다.
“좋소! 당장 군을 몰아 추격합시다!”
양만춘이 동의하며 추격 의사를 밝히니, 개소문도 고정의와 고돌발, 고즉리에게 명하였다.
“각성에 연통을 넣어 탈환한 성을 지킬 군사를 남기라 전하고, 평양성에도 연통을 넣어 신라를 주시하라 전하시오. 여기 있는 우리는 황제를 쫓아 만리장성을 넘을 것이오.”
명에 따라 전령들이 요동 각성은 평양성으로 내달렸고, 안시성 앞에 진을 펼친 개마무사 십삼만 기가 출전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안시성에서도 성주 양만춘이 직접 군을 이끌고 출전을 준비하니, 온달을 비롯한 모든 장수들이 뜻을 모아 함께하였다.
“가는 길에 비단을 나눠줍시다.”
출전을 마친 온달이 웃으며 말하니, 양만춘도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황제가 쌓아두고 간 비단으로 조금이나마 우리 백성들의 힘겨웠던 삶이 나아졌으면 합니다. 하하하.”
이렇듯 모두가 출전 준비를 마치던 그때, 공손향은 팽무일과 야수를 따로 불러 논의하였다.
“당 황제는 고구려의 적이지만, 온달은 합하의 적이오. 온달을 그대로 두어 적봉진의 군사들과 힘을 합치게 된다면, 필경 합하를 위협하게 될 것이오.”
“허면, 우리가 뭘 어찌해야 하는 게요?”
팽무일이 놀라 물으니, 공손향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춰 답하였다.
“요하를 건널 때… 온달의 목을 쳐야 하오.”
“목을?”
팽무일이 두려워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이에, 공손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말하였다.
“그렇소. 온달의 목을 쳐야 하오. 필경 온달은 요하를 건너는 당 군을 공격하고자 선두에 서서 달릴 것이고, 그때 혼전 중에 온달의 목을 쳐야 하오. 온달만 없다면… 안시성 군은 감히 두려워 합하께 맞서지 못할 것이오.”
이에, 팽무일이 이해하였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러나, 야수는 이들과 생각이 달랐다.
“온. 달… 쉽. 지. 않. 아… 누가… 그의 목을… 칠. 수. 있는가?”
“헉! 그렇군…….”
그제야 팽무일도 온달의 목을 치는 것이, 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임을 깨닫고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공손향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순서만 따르면 온달의 목을 벨 수 있소.”
“순서?”
팽무일이 의아해 물으니, 공손향이 바로 답하였다.
“온달의 목은 베기 어려우나, 그의 늙은 말은 다르오. 요하에서 그의 늙은 말을 먼저 베고, 그가 말에서 떨어지면, 그땐 온달의 목도 벨 수 있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