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320화 (320/328)

320화 토산이 무너지는 날 (12)

먹구름이 비가 물러가니, 해가 떠올랐다.

푸르디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고, 태양은 너무도 뜨거웠다.

이제 곧 북방의 가을이 찾아올 시기였으니, 아직은 뜨거운 바람이 대지를 스쳤으나, 찬기를 품은 북풍으로 바뀔 날도 머지않았다.

아침 일찍 배를 불린 당 군은 대열을 이뤄 진영 앞에 대형을 갖추었고, 황제 이세민은 천천히 군막에서 나와 말에 올랐다.

그간 항상 자신의 지척에서 지키던 근위장 황무문이 허망하게 죽었음에도 조금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전장을 누빈 그에게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었고, 그 대상이 자신만 아니면 되었다.

황제 이세민의 시야에 멀리, 무너진 토산 위 안시성의 군사들이 들어왔고, 갑주를 걸치지 않은 백성들도 들어왔다.

그리고, 이들 주위에 검은색 삼족오 기가 펄럭였으니, 황제 이세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법 단단히 쌓은 토산은 무너진 정상 이외엔 밤새 내린 폭우에도 물이 고인 곳이 없었다.

빗물은 모두 비탈을 타고 흘러내려 당 군이 오르기에 장애가 될 만한 요소는 없어 보였다.

다만, 안시성의 백성들이 굴러 떨어뜨린 말린 진흙더미들이 토산 아래에 거인처럼 버티고 있으니, 황제 이세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이에 더하여 아직도 토산 위에 말린 진흙더미들이 보이니, 당 군이 오르기 시작하면 안시성의 백성들이 굴러 떨어뜨릴 것이 분명하였다.

“놈들이 저 말린 진흙더미를 굴리겠지?”

황제 이세민이 장손무기에게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이에, 황제 이세민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뜨거운 태양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시 토산 위로 시선을 옮긴 황제 이세민이 명하였다.

“놈들에게 포차로 아침 인사를 하게나.”

황제의 명에 따라 거대한 포차 이백여 대가 진영 앞으로 나와 대열을 갖추니, 군사들이 빠르게 장정 키만 한 화살을 시위에 먹였다.

지켜보던 황제 이세민이 손을 들어 올리자, 깃발이 휘날리며 명을 전하였다.

이에, 이백여 대의 거대한 화살이 토산을 향해 발사되었다.

휘이익! 휘이익!

* * *

“포차다! 당 군이 공격한다!”

거대한 화살이 대기를 찢으며 토산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하니, 토산 위 안시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놀라 부르짖었다.

포차의 공세로 토산 위 방어 대형이 흐트러지면, 이를 노려 당 군이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이를 우려하여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대형을 갖추어라! 물러나지 말고 화살을 피하라!”

자리를 지키며 거대한 화살을 피하라는 지키기 어려운 명이 떨어졌다.

이에, 겁에 질린 군사들과 백성들은 이를 악물고 자신들을 향해 바람을 찢으며 날아드는 거대한 화살을 노려보았다.

콰과광! 쾅! 쾅!

장정 키를 훌쩍 넘기는 화살이 무너진 토산 정상에서부터 산등성이 군데군데에 박혔다.

대형을 유지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던 군사들과 백성들이 화살을 피하지 못해 비명을 질렀고, 말린 진흙더미가 부서져 파편을 흩날렸다.

개소문과 팽무일, 야수 등은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여 거대한 화살로부터 백성들과 군사들을 지켰고, 온동도 자신의 뒤에 선 평강과 독고영, 팽운을 지키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거대한 화살의 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온동의 검기가 바람을 갈랐다.

그리고 여지없이, 거대한 화살이 반으로 쪼개져 갈라지니,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대형을 지켜라!”

양만춘이 재차 소리쳐 명하며 당 군의 진영을 노려보았다.

군사들과 백성들은 거대한 화살에 대한 두려움을 차츰 극복하고 자신이 맡은 자리를 지키며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이에 저 멀리 당 군 진영에서 깃발이 펄럭이더니, 북소리와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저놈이 이세민이로구나.”

양만춘은 당 군 대형 뒤, 백마에 올라 금군의 호위를 받는 황제 이세민을 발견하고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그의 중얼거림은 이내 곧 당 군의 함성으로 묻혔다.

“와아아!”

우렁찬 함성으로 한껏 기세를 올린 당 군이 대형을 유지한 채 토산을 향해 전진하였다.

대형 중앙엔 황제의 명을 받아 선봉이 된 설인귀가 백색 피풍의를 멋들어지게 펄럭이며 돌격대를 이끌었다.

그리고 대형 양익은 각기 이세적과 이도종이 이끌었고, 대형의 후미는 장검이 기병을 이끌고 일시에 토산에 오를 채비를 갖추었다.

이어서, 당 군 진영에서 전장의 거인 정란이 요란한 굉음을 일으키며 천천히 앞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대형이 멈추자 더욱 앞으로 나와 토산과의 거리를 가늠하였다.

“화살을 날려라.”

황제 이세민의 짧은 명령과 함께 기수가 깃발을 휘날려 명을 전하니, 정란의 노군들이 일제히 토산 위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획! 휙! 휙!

당 군의 대형 위로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화살이 하늘을 가리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 *

“방패! 방패!”

양만춘이 다급히 소리치니, 중잡보병들이 방패를 들어 날아드는 화살을 막았다.

팍! 팍! 팍!

화살이 방패에 박히는 소리와 미처 피하지 못한 군사들과 백성들의 비명이 이어졌다.

“대기하라! 대기하라!”

궁수들이 맞서 응사하려드니, 양만춘이 소리쳐 제지하였다.

이에, 노궁수장 대식이 앞으로 나서 크게 외쳤다.

“궁병은 당 군 선두를 겨누고, 노군은 불을 붙여 정란을 겨누어라!”

궁노수가 일제히 자신들이 맡은 대상을 조준하였으나, 양만춘은 아직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당 군의 대형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아직… 아직… 아직이다. 아직…….”

정란에서 계속해 화살이 날아들고, 또다시 당 군 진영에서 깃발이 펄럭였다.

이에, 명을 받은 설인귀가 앞장서 말을 달리니, 돌격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이어서, 당 군의 양익 또한 함성을 지르며 토산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양만춘이 검을 들어 올리며 크게 소리쳐 명하였다.

“시작하라!”

명을 받은 대식이 먼저 정란을 향해 불화살을 날리니, 궁노수들이 일제히 살을 날렸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개소문도 마른 땅에 유황을 피워 하늘 높이 누런 연기를 솟게 하였다.

토산을 오르기 시작하던 당 군은 맹렬히 날아드는 화살에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고, 불화살이 박히기 시작한 정란에서도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설인귀가 이끈 돌격대는 여전히 기세 좋게 토산을 올랐고, 좌우 양익의 당 군도 거침없이 토산을 올랐다.

“놈들이 올라오고 있어요! 말린 진흙더미를 밀어 막아야 해요!”

평강의 외침에, 백성들이 거대한 진흙더미에 달라붙어 밀기 시작하였다.

쿠구구궁!

땅 울림과도 같은 굉음을 일으키며 수십여 개의 말린 진흙더미들이 일제히 토산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그리고 이 진흙더미를 피하고자 당 군이 흩어지니, 대식이 이끈 궁노수들이 살을 날렸다.

토산 비탈 곳곳에 당 군의 시신이 쌓이기 시작하였고, 토산 아래는 더욱 많은 진흙더미들로 앞이 막혔다.

그러나, 설인귀는 악착같이 돌격대를 이끌고 토산을 올랐고, 이세적과 이도종도 피해를 감수하며 토산에 올랐다.

“부월수!”

어느새 토산 위에 오르기 시작한 당 군을 막기 위해 양만춘이 검을 휘두르며 소리쳐 명하였다.

이에, 대기하고 있던 기 씨 사형제가 부월수들을 이끌고 설인귀의 돌격대를 막았다.

그리고 또다시 양만춘이 명하였다.

“중장보병과 창병은 대열을 유지해 진입을 막아라!”

공별과 항우가 각기 좌우 양익의 당 군을 중장보병과 창병을 이끌고 막으니, 난전이 벌어졌다.

개소문도 비검술을 펼치며 토산에 오르는 당 군의 명줄을 끊었고, 야수와 팽무일도 사력을 다해 베고 또 베었다.

그러나, 당 군은 끝도 없이 토산을 올랐다.

말린 진흙더미를 모두 굴러 떨어뜨린 백성들도 곡괭이와 삽을 들고 군사들을 도왔고, 평강도 검을 들고 싸웠다.

이에, 평강이 염려된 독고영과 팽운이 그녀의 좌우를 지키며 당 군의 목을 베고 또 베니, 이들 주위에 당 군의 시신이 쌓여만 갔다.

이때, 저 멀리 당 군 진영에서 황제 이세민이 또다시 손을 들어 명하는 모습이 양만춘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 저놈이…….”

황제 이세민과의 거리는 천여 보 남짓, 일반 활로는 결코 닿지 않을 거리였다.

그러나 온달의 철궁이라면 가능한 거리였다.

“온달님만 계셨다면… 저놈이 감히 저 거리에서 겁 없이 지휘하지 못할 터인데…….”

황제 이세민을 노려보며 중얼거리던 양만춘이 마음을 굳힌 듯 등에 멘 철궁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철궁에 효시를 먹여 시위를 힘껏 당겼다.

우드드득.

시위는 당겨지지 않고, 오히려 양만춘의 어깨에서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양만춘은 이를 악물고 재차 당겼다.

‘저놈이 맞지 않더라도 이 소리를 듣고 온달님이 오실 것이다. 오시어… 저놈의 목을 반드시 운철대검으로 으깨 놓을 것이다.’

전력을 다하여, 시위를 당기니 철궁도 호응하여 구부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팽팽히 당겨진 시위에 먹인 효시가 황제 이세민을 조준하였다.

“가라!”

양만춘의 외침과 함께 효시가 길게 매의 울음을 남기며 날아가기 시작하였다.

쐐애애액!

* * *

토산에서부터 당 군 진영까지 육십만이 넘는 당 군이 전장을 새까맣게 뒤덮었고, 그 위를 효시가 매의 울음을 울며 날아갔다.

쐐애애액!

갑작스런 매 울음 소리에 놀란 당 군이 일제히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황제 이세민도 드넓은 전장을 울부짖으며 날아오는 효시에 깜짝 놀라 시선을 고정하였다.

“저것이 무엇인고?”

황제 이세민의 물음에 장손무기가 답하려던 순간, 급격히 가까워진 매의 울음에 그만 황제 이세민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효시가 매의 울음을 울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음을 깨닫던 그 순간, 빠른 속도로 날아든 효시가 황제 이세민의 왼쪽 눈에 박혔다.

“아아악!”

눈에서 피를 뿜어내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황제 이세민은 말고삐를 꽈 쥐어 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폐하! 폐하!”

장손무기가 놀라 부르자, 정신을 수습한 황제 이세민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왼쪽 눈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

“아악!”

또다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안구가 효시에 박힌 채 뽑혔다.

장손무기는 급히 자신의 머리띠를 풀러 황제 이세민의 상처에 감으려 했다.

그러나 황제 이세민은 이를 뿌리치고는 자신의 머리띠를 풀러 머리에 둘러 상처를 감았다.

그리고는 이를 바드득 갈며 소리쳐 명하였다.

“장검! 공세를 가하라! 총공세를 가해, 안시성 놈들을 찢어 죽여라!”

화살이 박혀, 눈이 뽑히고도 천신처럼 굳건히 말 위에 올라 소리쳐 명하는 황제의 모습에 당 군의 사기가 급격히 올라갔다.

“와아아아!”

커다란 함성이 들불처럼 일었고, 장검이 기병을 이끌고 토산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토산 위 안시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야차처럼 피를 흘리면서도 버텨낸 황제 이세민의 집념에 기가 질렸다.

“괴… 괴물이다.”

“정녕… 황제는 전장의 신이란 말인가?”

아무리 막아내고 버텨도 당 군의 수는 줄지 않았고, 황제는 포기를 몰랐으니, 이제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안시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깃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 저 멀리 당 군의 배후에서 함성이 일고, 한 떼의 군마가 흙먼지를 날리며 질주해 오는 것이 안시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삼, 삼족오 기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토산 위에서 함성이 일었고, 이어서 독고영의 외침이 이들을 더욱 들끓게 하였다.

“온달님이다! 온달님의 누렁이다!”

독고영의 말처럼 온달이 늙은 말 누렁이를 타고 선두에서 내달리며 당 군의 배후를 돌파하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양만춘이 효시로 안내한 바로 그곳!

황제 이세민이었다.

“황제! 검신 온달이 그대를 영접하겠소!”

온달의 우렁찬 외침은 토산 위에까지 전해졌다.

화살에 맞아 안구가 봅혀도 버텨냈던 황제 이세민이 놀라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폐하!”

장손무기가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황제를 보호하자, 금군이 달려드는 온달을 막았다.

그러나, 경우가 날린 화살이 온달의 앞을 막는 금군을 연거푸 쓰러뜨렸고, 온달은 거침없이 운철대검을 휘두르며 포효하였다.

“황제! 목을 내놓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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