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토산이 무너지는 날 (11)
예로부터, 한여름 밤의 비는 열기를 식혀주고, 곡식을 자라게 하며, 빗소리를 듣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는 빗소리를 듣는 이가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에 있을 때나 가능한 일로, 이 한여름 밤의 비를 고스란히 몸으로 맞아야 하는 이에겐 한기와 두려움을 안겨 주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러하였다.
“토산이 붕괴된다!”
온동은 앞을 볼 수 없으나, 소리에 민감하여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명확히 토산 아래에서 들리는 땅울림을 느꼈다.
그리고, 이 온동의 외침은 현재 안시성에서 온동을 가장 신뢰하는 성주 양만춘에게 그대로 전해졌으니, 양만춘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토… 토산이? 토산이 무너진다고? 우리 안시성으로?”
거세게 쏟아지는 폭우로 인하여 바로 앞에 웅장히 서 있는 토산의 형상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양만춘은 저 거대한 토산이 안시성의 외벽을 덮쳐올 때 벌어질 일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 내가… 내가 어리석었어. 온동의 말을 따라… 토산이 무너지지 않도록 방비했어야 했는데…….”
이런 자책의 말을 중얼거렸으나. 실상, 방비했다 한들 너무도 갑작스럽게 그리고 맹렬히 쏟아진 폭우를 막을 방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만춘은 모두가 자신의 탓이라 여기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이내 곧 닥쳐올 재앙에 대비하여 크게 소리쳐 명하였다.
“궁가로 피신하라! 궁가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은 궁가 뒤로 피신하라!”
궁가는 궁수들이 들어가 화살을 날리도록 성벽 위에 벽돌로 지은 집으로 양만춘은 곧 성벽 위로 덮쳐올 토사를 군사들과 백성들이 피하도록 외친 것이다.
“궁가로 대피하라! 궁가를 의지하라!”
목이 터져라 양만춘이 외치자, 온동도 이 소리에 호응하여 소리쳤다.
“궁가! 궁가요! 피신하시오!”
그리고 이어서 땅울림이 더욱 크게 일어나 온동과 양만춘의 외침을 덮었다.
쿠우우웅!
쿠구구궁!
이전과 다른 굉음에 다리를 건너고자 몰려들던 당 군이 놀라 토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성벽 위 고구려 군사들과 백성들 또한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땅울림에 기가 질려 멍하니 토산을 바라보았다.
이때, 양만춘의 외침이 넋이 나간 사람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였다.
“궁가! 궁가요! 궁가!”
쿠구구궁!
“궁가! 궁가!”
쿠과과광, 쾅쾅쾅!
더욱 거센 땅울림이 일고 토산이 마침내 포효하였다.
이어서 당 군이 가득한 토산 정상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눈치 빠른 설인귀가 아직도 북채를 놓치 못한 이세적을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는 미친듯이 비탈을 내달렸다.
“길을 비켜라! 모두 내려가라! 토산이 무너진다!”
설인귀의 외침과 동시에, 토산의 뿌리가 갑작스럽게 푹 꺼지는 땅과 함께 땅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리고 이어서 땅밑에 가득 차 있던 흙탕물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콰과과광!
“으아아악!”
토산의 비명과 당 군의 비명이 빗소리에 섞여 밤하늘에 울려퍼졌고, 안시성의 외성 성벽으로 기울기 시작한 토산이 와르르 토사를 쏟아내었다.
콰과과광! 콰과광!
마침내 토산이 기울어 쓰러지며 성벽을 토사가 거센 해일처럼 덮치기 시작하였다.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뒤덮을 듯한 토사의 위용에 기가 질린 안시성의 백성들과 군사들의 귓전을 양만춘과 온동의 외침이 때렸다.
“궁가! 궁가! 궁가로 피하라!”
“궁가요! 피하시오!”
이에, 성벽 위 모든 이들이 일제히 근처 궁가로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콰과과강! 콰과광!
안시성의 성벽을 굽어볼 만큼 높고 거대했던 토산이 기울어 쓰러지면서 거대한 토사가 성벽 위를 덮치고 피하지 못한 이들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돌을 쌓아 성벽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덮어 단단히 한 안시성의 성벽은 이 거대한 대지의 해일에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콰과광!
마지막 토사마저 굳건히 버틴 안시성의 성벽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성벽 위 군사들과 백성들은 양만춘과 온동의 외침에 궁가로 피신하거나 궁가 뒤로 몸을 숨겨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
투두두둑.
땅울림이 멎고, 토산의 붕괴도 멈추니 다시 한여름 밤의 빗소리만이 정적을 깰 따름이었다.
이때, 미처 궁가로 들어가지 못하고 지붕에 올라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 양만춘이 사위를 둘러보았다.
거센 폭우로 시야가 무척이나 짧았으나, 눈앞을 가리던 토산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멀리 당군 진영에서 밝힌 불빛이 시야에 들어오니, 양만춘이 크게 놀라 소리쳐 명하였다.
“토산을 점령하라! 놈들이 비탈을 타고 올라 성벽을 넘을 것이다! 토산을 점령하라!”
이내 곧 자신도 궁가 지붕에서 뛰어내려 무너진 토산 정상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토산은 땅이 꺼지며 안시성과 마주한 밑동만이 땅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정상부가 무너져 성벽을 덮쳤다.
그리고 아직도 당 군 진영으로 향한 거대한 산등성이는 온전하였다.
이 산등성이를 타고 당 군이 일제히 돌격해 무너진 정상을 점거하고 재차 공격해 온다면 안시성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듯하였다.
“토산을 점령하라! 당 군의 진입을 막아야 한다!”
목이 터져라 외치며 달려가던 양만춘의 앞을 누군가 비호처럼 내달렸다.
세상 그 누구보다 영특하고, 세상 그 누구보다 뛰어난 무공을 익혔으면서도 오직 허락받은 무공만 펼치는 사내.
앞이 보이지 않는 온동이 백두검법의 보법을 이용하여 빠르게 경공을 펼쳐 토산 정상으로 날듯이 질주한 것이다.
그리고 토사에 휩쓸려 허우적대는 당 군을 베고 또 베며 길을 여니, 양만춘도 이에 질세라 내달리며 몸을 가누는 당 군을 무수히 베었다.
온동은 자신이 시야가 어두워 혹여 고구려 군사를 벨 수 있음을 극히 두려워했기에, 가장 선두에 서서 싸웠으니, 이번 토산 점령전에서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내달렸던 것이다.
앞을 볼 수 없는 온동이 그 누구보다 앞장서 토산 정상으로 내달리니, 이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피가 끓어 올랐다.
“온동을 따르라! 토산을 점령하라! 온동을 지켜라!”
양만춘이 연신 검을 휘두르며 소리치니, 이에 성벽 위 안시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토산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선두에 개소문이 팽무일, 야수 등을 이끌고 질주하며 정신을 수습하기 시작한 당 군의 목을 거침없이 베었다.
* * *
토산이 무너지기 전, 정상에서 내려와 위기를 모면한 이세적은 설인귀의 어깨에서 내려와 무너진 토산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살아남은 당 군의 비명이 울렸고, 빗속에서 휘몰아치듯 공세를 퍼붓는 안시성 군사들과 백성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이에, 이세적이 이를 바드득 갈며 몸을 돌려 다시 토산으로 오르려 할 때, 이도종과 장검이 대군을 이끌고 산등성이를 오르며 소리쳤다.
“이 총관! 멈추시오! 이제부터 우리가 맡겠소!”
“총관! 이제 그만 몸을 돌보시오! 안시성 놈들은 우리가 끝장을 내겠소이다!”
토산이 성벽으로 무너진 덕분에, 다리와 사다리를 건너지 않고도 성벽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도종과 장검은 마치 승리를 거머쥔 듯 자신하고 있었다.
이에, 이세적이 분해 입술을 깨무니, 설인귀가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총관, 잠시 진영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십시오.”
* * *
황제 이세민은 이세적과 설인귀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는 토산이 무너져 성벽을 덮친 것에 크게 기뻐 이미 승리에 취해 있었다.
“하늘은 나의 편이로구나. 안시성 놈들이 땅굴을 파 함정을 만들고자 했으나, 하늘이 이를 벌하여 성벽을 토산으로 덮었으니, 이제 걸어 올라가도 성벽을 넘을 수 있겠구나. 하하하.”
이처럼 황제가 기뻐하니, 이세적과 설인귀는 공을 세우지 못해 분한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천지를 환하게 밝힐 벼락이 토산에 내리치니, 황제 이세민의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눈에 토산에서 굴러 내려오는 거대한 진흙더미가 들어온 것이다.
* * *
“어서 옮겨야 합니다. 서두르세요!”
평강은 장정 키를 훌쩍 넘기는 말린 진흙더미를 백성들과 함께 힘을 모아 토산으로 옮겼고, 독고영과 팽운도 진흙으로 온몸이 범벅이 되도록 도왔다.
이에, 서문 일대 발석거 주위에 가득한 말린 진흙더미들이 끝없이 토산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 말린 진흙더미들은 산등성이를 오르는 당 군을 향해 굴러떨어졌다.
한 치 앞도 살피기 어두운 폭우와 밤의 어둠 속에서 당 군은 거대한 말린 진흙더미를 피할 재간이 없었다.
사방에서 말린 진흙더미에 깔려 쓰러지는 당 군이 속출하였고, 이들이 내지른 비명은 이내 곧 모두에게 전파되었다.
콰과과광!
그리고 하늘에서 벼락과 함께 천둥이 토산을 내리치니 일순 토산 일대가 환하게 밝아지며 전황을 살필 수 있었다.
이미 무너진 토산 정상은 양만춘 등이 군사들과 백성들을 총동원하여 점거한 상태로 말린 진흙더미와 함께 쉴새 없이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저, 저놈들이!”
이도종이 기가 막혀 부르짖던 그 순간, 당의 진영에서 퇴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둥둥둥.
이에, 이도종은 분기를 누르며 퇴각을 명하였다.
“물러나라! 퇴각한다.”
장검도 함께 군을 물려 진영으로 돌아가니, 황제 이세민이 군막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들 했다.”
황제 이세민의 이 말 속에 전혀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아, 이도종과 장검은 내심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황제 이세민의 마음은 이 순간 매우 차분하였고, 그 누구도 벌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직도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으니, 곧 다가올 승리에 기뻐 흥분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밤이 깊어 어둡고, 폭우가 쏟아지니 횃불도 밝힐 수 없다. 우리는 대군을 지녔고, 토산은 성벽을 덮쳐 길을 내었으니, 굳이 이런 상황에 무리해 싸울 필요는 없느니라.”
황제 이세민이 이처럼 말하고는 진흙으로 범벅이 된 장수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오늘 밤, 안시성 놈들은 또다시 비를 맞으며 토산 위에서 밤을 보낼 것이다. 그러하다고 우리까지 비를 맞을 필요는 없느니라. 우리는 잠시라도 쉬며 기운을 추스르는 게 좋겠구나.”
“하오나… 토산을 속히 점거해야…….”
장손무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으나, 황제 이세민이 손을 내저어 말을 끊었다.
“날이 밝고, 비가 그친 뒤 대군을 휘몰아 토산을 넘어도 되느니라. 어둠 속에서 싸우길 바라는 것은 안시성 놈들의 바람일 뿐. 굳이 어려운 싸움을 할 필요가 없느니라.”
“…….”
“하늘이 우리를 도와 토산을 성벽에 닿게 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무리할 필요가 없느니라.”
이에, 장손무기가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의 판단력에 탄복하였다.
* * *
맹렬히 토산을 기어오르던 당 군이 갑작스럽게 물러나니, 양만춘은 의아해 멀리 당 군 진영의 불빛을 노려보았다.
“토산이 성벽과 닿았는데… 어찌 공격을 멈춘 것인가?”
양만춘의 이 중얼거림에 온동이 손바닥을 펼쳐 아직도 거센 빗줄기를 받아내며 답하였다.
“날이 밝고 비가 그치면 총공세를 가하고자 물러난 것입니다. 놈들은 이제 무리할 필요가 없다 여기는 모양입니다.”
“그렇구나.”
양만춘이 이를 바드득 갈며 흙탕물이 고인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척 고단하고 힘든 밤이었다.
그러나 아직 비는 그치지 않았고 날이 동이 틀려면 세 시진은 지나야 할 듯했다.
그때까지 안시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비를 피할 곳도 없는 토산 위에서 버텨야 했으니, 지친 몸이 더욱더 지칠 듯하였다.
이때, 개소문이 양만춘 곁에 앉으며 담담히 말하였다.
“날이 밝아 비가 그치면, 온동의 말대로 놈들이 공격해 올 것입니다. 그때 마른 땅을 마련하여 유황을 피워 고정의를 불러들이겠습니다.”
이에, 양만춘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마지막 수성이 되겠구나. 아쉬움을 남기지 말도록 하자.”
하늘이 열린 듯 퍼붓던 빗줄기는 동이 트며 멈추었고, 토산에 고인 빗물은 비탈을 타고 빠르게 흘러내려 갔다.
당 군이 제법 단단히 흙을 다져 토산을 쌓은 덕에 빗물에 파인 곳도 없었다.
그리고 이제 곧, 당 군의 총공세가 다시 시작될 터라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당 군 진영을 주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