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317화 (317/328)

317화 토산이 무너지는 날 (9)

온동의 판단은 정확하였다.

평강과 개소문이 땅굴에서 백성들을 대피시키기 무섭게 폭우가 쏟아졌다.

비는 영성자산의 비탈을 타고, 가장 낮은 곳으로 거센 물줄기를 강처럼 흘려보냈다.

이에, 수로는 넘치고 서문 일대는 순식간에 물이 고였다.

웅덩이는 점차 물이 차올랐고, 조금 전까지 백성들이 들락거리던 초막으로 흙탕물이 흘러 들어갔다.

“초막에 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평강의 외침에 백성들이 초막 주위에 흙과 돌을 쌓고 가죽으로 덮었다.

그러나 성벽에 막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물은 점차 수위를 높여 초막을 위협하였다.

그리고 초막과 이어진 웅덩이의 물길도 점차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웅덩이가 넘쳐 초막으로 물이 흘러들지 않도록 막아야 합니다! 서두르시오!”

개소문의 외침에 백성들과 군사들이 물길을 잡기 위해 웅덩이 주위를 흙으로 쌓아 제방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물은 달리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대로 계속 비가 온다면 웅덩이는 결국 넘쳐 초막으로 물이 유입될 수밖에 없다.”

개소문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처럼 한탄하던 그때, 양만춘이 온동과 함께 달려와 살피고는 엄히 명하였다.

“일할 수 있는 모든 이를 불러들여 초막 주위에 제방을 쌓고, 웅덩이에서 초막으로 이어진 물길도 제방을 쌓아 막도록 하라!”

이에, 군사들이 내성으로 달려가 백성들과 다친 군사들을 이끌고 왔다.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폭우와 밤의 심연 속에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폭우로 인하여 횃불은 밝히면 이내 곧 사라지니, 모든 작업은 험난하였다.

이에, 어둠 속에서 흙을 쌓아 제방을 세워도 빗물에 쓸려 무너지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성주 양만춘은 이에 굴하지 않고 솔선수범하여 진흙탕물 속에서 삽을 들고 흙을 퍼 날랐다.

이에, 전신이 물에 빠진 듯 비에 흠뻑 젖은 백성들과 군사들도 포기하지 않았다.

‘하늘이 우리의 편이 아닌 당 군의 편에 서서 폭우를 내려 우리를 겁박한들 결코 굴하지 않을 것이다.’

양만춘이 이를 바드득 갈며 이처럼 결심을 굳히고는 천둥보다 더 크게 소리쳐 백성들과 군사들을 격려하였다.

“초막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 가득 차면 토산이 성벽을 향하여 무너질 것이니, 당 군이 이를 기뻐하며 대군을 몰아 성벽을 넘을 것이다! 결코 이 따위 비에 굴하지 말라!”

이에, 백성들과 군사들이 밤을 새워 제방 쌓기를 반복하니, 동이 틀 무렵 겨우 비가 그쳤다.

다행스럽게도 웅덩이는 넘치지 않았고, 웅덩이에서 초막으로 이어진 물길도 넘치지 않았다.

그리고, 초막 주위도 제법 제방이 단단히 쌓여 안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이에, 양만춘이 겨우 안도하여 한숨을 내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는 그쳤으나, 아직 하늘엔 비를 품은 먹구름이 가득하였다.

“또다시 비가 올 수도 있다. 마저 작업들을 하라.”

단단히 명을 내리고는 성벽 위로 올라가니, 밤새 비를 맞은 군사들이 덜덜 떨고 있었다.

그나마 벽돌로 지은 집에 들어간 궁수들은 사정이 나았으나, 그 외의 군사들은 손과 발이 퉁퉁 부을 정도로 비에 젖어 오한을 느끼고 있었다.

“비를 맞으면서도 밤을 새워 지키고 있었구나. 애썼느니라.”

양만춘이 앳된 얼굴의 군사를 위로하고는 군사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물기를 닦아줄 천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마른 땅은 없었고, 젖은 군사를 닦아줄 마른 천 또한 없었다.

이때, 독고영과 팽운이 어린아이들과 함께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오더니, 마른 천을 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양만춘도 마른 천을 받아들고는 의아해 팽운에게 물었다.

“아가 운아, 이거 혹시?”

“네, 성주님… 옷을 잘라 만들었어요. 급히 만드느라 부족할 터이나, 곧 더 마련해 오겠어요.”

이에, 양만춘이 팽운의 소매가 없는 저고리를 살피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이 많구나.”

팽운뿐만 아니라, 마른 천을 나르는 아이들 모두 소매가 없는 저고리를 입고 있었으니, 양만춘은 이 천들이 어떻게 마련되었는지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 * *

밤새 군막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들지 못한 황제 이세민이 밖으로 나와 토산을 바라보았다.

거센 빗줄기에도 단단히 쌓은 토산은 굳건하였다.

이에, 흡족한 황제 이세민이 장손무기와 이세적을 불러 명하였다.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고구려 놈들은 밤새 성벽 위에서 비를 맞으며 추위에 떨고, 손발이 짓물렀을 것이니… 오전 중으로 토산 공사를 마무리하여 해가 지기 전 총공세를 가하도록 하라.”

이에, 장손무기가 토산 공사를 재촉하기 위해 서둘렀고, 이세적도 총공세를 가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또한 황제 이세민은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설인귀의 피풍의를 응시하더니, 즉시 설인귀를 불러 명하였다.

“어려울 때면 항상 그대가 앞장서 왔으니, 이번 공략에서도 그대가 모범을 보여 성벽을 넘으라.”

이에, 설인귀가 감격하여 엎드려 명을 받으니, 황제 이세민이 그를 일으켜 세우며 몸에 묻은 진흙을 털어주었다.

그리고는 근위장 황무문에게도 따로 명을 내렸다.

“황무문, 그대는 나와 오랜 세월 일가처럼 지내며 숱한 전장과 사지에서 공을 세웠다. 이번엔 그대가 내 곁을 지키지 말고, 포효하는 범처럼 적진을 누비며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목을 내게 가져오도록 하라.”

공을 세울 기회를 황제가 친히 마련해주니, 황무문도 감격하여 엎드려 절을 올렸다.

하나둘 준비가 갖춰지자, 황제 이세민이 다시 토산으로 시선을 옮겨 미소지었다.

“우리의 군사는 군막에서 비를 피했으나, 놈들은 고스란히 비를 맞아야 했을 것이다. 비에 젖은 갑주를 걸치고 얼마나 잘 싸울지 실로 기대가 크구나. 하하하.”

전장의 신이라 불린 이세민은 바로 지금이 안시성을 공략할 적기라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 * *

화공을 펼칠 준비를 갖추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대식이 허망한 표정으로 돌아와 양만춘에게 아뢰었다.

“성주, 마른 나무와 풀이 없나이다.”

이에, 양만춘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소.”

군사들의 활과 화살도 비에 젖었고, 젖지 않은 갑주 또한 없었다.

물기를 머금은 갑주는 천근만근 무거웠고, 밤새 비에 시달렸던 군사들을 더욱 지치게 하고 있었다.

해는 머리 위로 올랐을 터이나, 먹구름에 가려 있으니, 젖은 갑주를 말릴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독고영과 팽운이 아이들과 함께 계속하여 말린 천을 만들어 군사들의 젖은 머리와 손을 닦게 해주어 조금이나마 퉁퉁 불운 손을 짓무르지 않게 해주었다.

“참으로 기특한 아이들이다.”

고구려 인도 아닌 독고영과 팽운이 이처럼 애쓰니, 양만춘의 마음 한편이 뭉클하였다.

그러나 이때를 놓칠 당 군이 아니었으니, 이제 곧 당 군의 총공세가 예상되어 여유를 느낄 처지가 못 되었다.

“활과 화살을 말리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

양만춘의 명에 따라 성벽 위와 성내 곳곳에서 활과 화살을 말리며 당 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다.

양만춘도 자신의 활이 비에 젖어 처소로 급히 돌아가더니, 온달이 건넨 철궁을 어깨에 메고 효시가 가득한 화살통을 허리춤에 찼다.

“당길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당기지 못한다면 철궁을 휘둘러서라도 당 군을 막아내겠다.”

결의를 다진 양만춘이 급히 서문으로 향하여 성벽 위로 올랐다.

* * *

활은 흐린 날과 습기가 가득한 날엔 사거리가 줄어들며 명중률 또한 저하된다.

하여, 비 오는 날엔 그 위력이 더욱 저하되나, 다행스럽게도 토산과 안시성 성벽과의 거리는 이제 십여 보 이내로 줄었으니, 사거리와 명중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안시성의 군사들은 토산을 쌓는 당 군을 향해 쉴 새 없이 화살을 날렸고, 당 군 또한 안시성의 성벽을 굽어보며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머리 위로 빗발치는 화살비 속에서 당 군이 마침내 토산 공사를 마무리하니, 그때가 바로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길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황제 이세민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리니, 이세적이 이를 받아 크게 소리쳐 명하였다.

“총공세를 가하라!”

* * *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성벽 위에서 토산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앞을 중장보병들이 방패를 들어 날아드는 화살을 막고 있었으나, 방패와 방패 사이로 석양에 붉게 물든 토산 정상을 살필 수 있었다.

어느새 토산 정상은 마른 갑주를 걸친 당 군들로 가득하였다.

“저들은 밤새 비를 피할 수 있었구나.”

양만춘이 이처럼 중얼거리며 아직도 젖은 갑주를 걸친 안시성의 군사들을 안쓰럽게 둘러보았다.

손과 발이 짓무르고, 갑주는 젖었으며, 언제 당 군이 총공세를 가할지 몰라, 아침부터 굶은 상태였다.

“당 군은 우리의 이런 처지를 잘 알 것이다. 결국 오늘 밤 놈들이 총공세를 가하겠구나.”

양만춘이 이처럼 다시 중얼거리니, 곁에 선 개소문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젖지 않은 곳이 없어… 유황을 피울 수도 화공을 펼칠 수도 없습니다.”

지난밤 논의하였던 모든 것들이 무산되니, 이젠 죽기를 각오하고 당 군의 진입을 막는 수밖에 다른 방책은 없었다.

“내일 아침엔 유황을 피워 고정의에게 알릴 수도 있을 터이고, 화공도 가능해질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

양만춘이 침착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하니, 표정을 굳힌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막아내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 당 군 진영에서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리더니, 총공세를 알리는 북소리가 더해졌다.

“온다.”

양만춘이 짧게 중얼거리자, 이와 때를 같이하여 토산 정상에서 함성이 일었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다리와 사다리가 일제히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일어서더니, 그대로 안시성의 성벽을 향하며 내려졌다.

쾅! 쾅! 쾅!

다리와 사다리가 걸쳐지는 소리가 성벽 전체에서 일었다.

“살을 날려라!”

양만춘의 명에 궁수들이 화살을 날렸다.

“창병들은 적들의 진입을 막아라!”

개소문이 중장보병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가 명하니, 창병들이 방패를 든 중장보병 뒤에서 밀려오는 적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대식이 정예 노궁수들에게 기름 먹인 화살을 시위에 먹이게 하고는 명하였다.

“물기가 많다. 토산은 불타지 않을 것이니, 다리와 사다리만 노려라.”

기름 먹인 화살의 수가 매우 적었으나, 안시성의 모든 것이 비에 젖은 탓에 화공을 펼칠 다른 방도는 없었다.

“와아아!”

요란한 함성을 내지르며 당 군이 다리와 사다리를 건너 성벽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온동과 팽무일이 중장보병들을 이끌고 방패로 당 군을 막게 하였고, 개소문이 창병에게 명하여 긴창으로 당 군을 공격하였다.

그 사이에도 안시성 성벽 위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으며, 안시성의 군사는 물론 당 군마저 토산에서 날린 화살에 맞아 비명을 질렀다.

“기름 먹인 화살을 날려라!”

대식의 명에 따라 정예 노궁수들이 조준하던 다리와 사다리로 불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화르르 타오를 줄 알았던 다리와 사다리는 건재하였다.

이 다리와 사다리도 전날 밤 내린 비에 흠뻑 젖어 있었기에, 불길이 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제길!”

대식이 크게 당황하여 부르짖던 그 순간, 토산에서 정예 노궁수를 지휘하는 대식을 노려 화살을 쏟아부었다.

이에, 대식이 팔과 다리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니, 부장들이 급히 그를 벽돌로 지은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양만춘은 대식이 겨우 목숨을 건진 것에 안도하여 한숨을 내쉬고는 크게 소리쳐 명하였다.

“한 놈도 성벽을 넘지 못하게 막아라!”

이에 기 씨 사형제가 부월수를 이끌고 다리를 건너는 당 군과 난전을 벌였다.

온동도 오직 소리에 의지하여 전방에서 내달려오는 적을 향해 파산귀검을 펼쳤다.

“파산귀검!”

온동이 금강대도를 휘둘러 파산귀검 초식을 펼치니, 일자로 뻗은 검기에 전방의 다리가 길게 반으로 쪼개지며 당 군을 땅으로 처박았다.

그리고, 개소문과 팽무일도 각기 맡은 자리를 지키며 파천신검을 펼쳐 당 군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이들의 뒤에서 창병들이 긴 창으로 길이 막힌 당 군을 찔렀다.

야수 역시 성벽으로 난입한 당 군의 머리를 두 자루 박도로 쪼개고, 성벽에 걸쳐진 사다리마저 단칼에 쪼개었다.

그러나, 다리와 사다리는 너무도 많았고, 당 군의 수는 이보다 더욱 많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