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토산이 무너지는 날 (7)
개소문의 도움으로 북문을 지킨 안시성에선 바로 회의가 열렸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을 중심으로 평강, 온동, 대식, 기 씨 사형제, 독고영 등이 냉랭한 시선으로 개소문 일행을 바라보았다.
이에, 맞은편에 자리한 개소문과 팽무일, 공손향, 야수가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였다.
토산 위 당 군의 도발에 대비하여 공별과 황우는 서문을 지켰다.
“네가 여기 온 이유가 무엇이냐?”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먼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에, 팽무일과 야수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구겼으나, 개소문은 개의치 않고 담담히 말하였다.
“앞서 공주님께 말씀드렸듯이 안시성을 지키고, 당 군을 몰아내기 위해 왔습니다.”
“개소문, 너는 태왕 폐하와 대장군을 시해하고, 우리 고구려의 수많은 장수와 귀족을 죽였다. 그런 너를 우리 안시성이 받아들일 것이라 여겼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한들 믿지 않을 터이니, 애써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고구려를 지키고자 한다면, 안시성과 내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점만 믿어주기 바랍니다.”
개소문이 공손히 답하니, 평강이 고운 눈썹을 치켜뜨고 매섭게 물었다.
“믿어달라?”
“그렇습니다, 공주님.”
“개소문, 너는 파천신검을 훔쳐 온달님의 믿음을 배신하였으며, 선대 태왕과 대장군을 시해하고 권좌에 올랐다. 또한 네 곁에 앉은 이들은 우리 고구려의 적이었던 자들인데, 내가 너를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느냐?”
평강은 이미 온동에게 사정을 들어 파천신검 비급을 개소문이 훔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리한 그녀는 개소문이 어떤 변명을 내놓을지 살피기 위하여 이처럼 물은 것이었다.
이에, 개소문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답하였다.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당 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안시성에 왔고, 우리가 힘을 합쳐야만 이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다는 사실만 믿어주십시오.”
평강의 눈에 개소문의 표정은 변함없이 진중하였다.
‘정말 속을 알 수가 없구나.’
평강이 눈살을 찌푸리자, 이번엔 온동이 물었다.
“형님, 형님께선 어득구 어르신을 살해하였습니다. 살해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어득구가 누군지도 모르니, 개소문은 이 또한 변명할 수 없었다.
“온동아, 내 아우야. 나는 진실로 어득구가 누구인지 모르는구나. 하여, 어떤 이유로 그를 죽였는지 답할 수 없구나. 미안하구나.”
“형님! 그렇다면 이유도 없이 어득구 어르신을 죽였단 말입니까?”
“나는 중국을 떠돌며 그리고 고구려에 돌아온 뒤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만일 그 속에 어득구란 분이 있을 수 있어 변명할 수는 없으나, 내가 그를 죽였다고 네가 단정하나, 나는 그가 누군지 몰라 이유를 말할 수 없구나. 미안하구나.”
온동은 순간 화가 치미는 것을 꾹 누르며 개소문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만일 양만춘과 평강의 명이 떨어진다면 단숨에 몸을 날려 개소문에게 금강대도를 휘두르기 위함이었다.
이에, 평강이 온동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껴 개소문에게 바로 물었다.
“좋다. 너와 우리가 힘을 합쳐야 당 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하였으니, 당 군을 물리칠 대책을 지니고 온 것이냐?”
“그러합니다.”
개소문이 너무도 거침없이 답하니, 순간 정적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이는 평강이었다.
“좋다. 그 계책이 무엇이더냐?”
이에, 개소문이 담담히 답하였다.
“당 군이 토산을 서문 성벽에 바짝 붙여 넘으려 총공세를 펼 때, 신성의 고정의와 건안성의 고돌발이 대군을 이끌고 당 군의 배후를 칠 것입니다.”
“…….”
“필경, 당 군은 혼란스러워질 것이고, 서문을 나와 함께 지켜낸다면 당 군은 더 이상 안시성 공략을 할 수 없어 진을 물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보급로가 끊어진 당 군은 결국 퇴각하고 말 것입니다.”
“보급로가 끊어졌다?”
“그렇습니다.”
“비사성에 당의 수군이 버티고 있으며, 해상 수송로를 확보한 상황인데도 당 군이 쉽게 물러날 것이란 말이더냐?”
평강의 물음에 개소문이 고개를 저었다.
“해상 수송로는 이미 끊어졌습니다.”
“뭐라? 좀 더 상세히 말해 보거라.”
“임유관과 비사성을 잇는 해상 수송로는 우리 고구려 수군이 오호도를 점거하며 끊어졌습니다.”
개소문의 답변에 평강과 양만춘이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다시 평강이 표정을 굳혀 물었다.
“좋다. 당 군이 토산을 서문에 붙여 안시성을 넘을 때, 대군으로 당 군의 배후를 공격한다고 말하였는데, 신성과 건안성의 군사가 얼마나 되느냐?”
이미 주필산 전투에서 대패했음을 알고 있기에, 남은 군사의 수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신성과 건안성의 군사는 도합 십삼만에 달하며, 모두 기병 일색입니다.”
아직도 십삼만에 달하는 기병을 보전하고 있었다는 말에 평강이 깜짝 놀라 잠시 말을 잃었다.
다시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이번엔 개소문이 먼저 침묵을 깼다.
“또한 쇼락이 적봉진으로 갔으니, 반드시 원군을 이끌고 올 것입니다. 이들이 도착한다면, 당 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물러날 것입니다.”
이미 안시성에서도 적봉진으로 전령을 보냈으나 소식이 없었으니, 개소문의 이 말에 평강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적봉진은 아마도 당 군이 선제공격한 듯하다. 하여, 원군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 군은 결코 토산을 안시성에 붙여 넘지 못할 것이다.”
안시성의 백성들이 서문에 바짝 붙어 땅굴을 파 함정을 만들고 있음을 개소문은 알 수 없었으니, 평강의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공주님, 당의 황제 이세민은 결코 토산 공사를 멈출 위인이 아닙니다. 그는 기필코 토산을 안시성에 붙일 것이고, 당 군은 총력을 다해 성을 넘을 것입니다.”
“아니다. 네 말은 틀렸다. 하여, 너의 도움은 필요가 없구나.”
평강이 이처럼 잘라 말하니, 양만춘이 바로 말을 더하였다.
“원수가 직접 찾아왔으니, 목을 베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나, 북문을 지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 아직 당 군이 우리 고구려 땅에 있으니, 당 군을 물리칠 때까지 네 목은 보전해 두겠다.”
양만춘의 냉정한 말에 팽무일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뭐라고? 기껏 도와주러 왔더니, 한다는 소리가!”
팽무일의 거친 음성에 온동도 자리에서 일어나 금강대도에 손을 대었다.
조금이라도 팽무일의 움직이는 소리가 수상할 경우, 단칼에 목을 벨 듯 살기가 흘렀다.
이에, 개소문이 손을 들어 팽무일을 제지하였다.
“제자는 자리에 앉으라!”
팽무일이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으니, 온동도 소리 없이 자리에 앉았다.
이에, 개소문이 잠시 온동을 바라보고는 양만춘과 평강을 번갈아 살피며 물었다.
“정녕 저들이 안시성을 넘지 못하리라 자신하시나이까?”
이에, 평강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개소문이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니, 공손향이 그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나와 여기 있는 팽무일, 야수가 한때 당신들과 고구려의 적이었음은 인정합니다. 하오나, 현재는 대막리지를 도와 고구려를 지키고자 전념하고 있습니다.”
“…….”
“또한 안시성을 지키고 당 군을 몰아내고자 하는 대막리지의 마음은 진심이옵니다. 다른 부분은 믿어주시지 않더라도 이 부분은 부디, 믿어주시옵소서.”
“쓸데없는 소리!”
평강이 일거에 공손향의 말을 자르니, 야수가 불쾌하여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때, 개소문이 생각을 정리하였는지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는 차분히 말하였다.
“저들이 안시성을 넘지 못한다고 자신하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허나 저들은 매우 끈질기니, 안시성에서 저들의 진을 물리게 하기 위해선 계기가 필요합니다. 그 계기는 안시성의 안과 밖이 서로 호응하는 것이니, 필경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실 것입니다.”
이에, 평강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안과 밖이 호응해야 한다는 네 말도 일리가 있다. 허나, 그 안과 밖의 호응에도 시기가 중요한 법. 서로 뜻이 맞지 않아 때를 맞추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 없을 터…….”
평강이 말꼬리를 흐리고는 양만춘을 바라보았다.
이에, 양만춘도 결심을 굳혔는지 평강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강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를 맞추기 위해 네게 보여줄 것이 있느니라. 따라 나오거라.”
평강이 일어서니, 양만춘이 개소문을 잠시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개소문도 따라 일어나니 모두가 함께 서문으로 향하였다.
“보았느냐? 시기만 맞출 수 있다면 당 군이 쌓는 저 토산은 함정에 빠져 땅이 꺼지듯 사라질 것이다.”
평강이 밤늦도록 공사를 하는 백성들을 가리키며 이처럼 말하니, 개소문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함정… 거대한 함정으로 토산을 무너뜨리실?”
이에, 평강이 고개를 끄덕이니, 공손향이 나지막이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시기만 맞추어 토산이 성벽에 붙기 전 토산이 붕괴된다면 필경 당 군은 크게 당황하여 기가 꺾일 것입니다. 그때, 신성과 건안성이 대군을 이끌고 배후를 공격한다면 대승을 거둘 것입니다.”
개소문도 크게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이고는 평강과 양만춘에게 물었다.
“공사는 어느 정도 진척되었습니까?”
이에, 평강이 잘라 말하였다.
“토산이 성벽에 닿기 전까지 함정을 완성하기 어려울 듯하다.”
“하오면?”
개소문이 당황하여 물으니, 평강이 차분히 답하였다.
“하여, 너와 네가 이끌고 온 군사 오천도 함께 서문을 지키며 함정이 완공될 때까지 버텨주길 바란다. 그리고 함정이 토산을 끌고 사라질 때, 건안성과 신성의 대군이 당 군의 배후를 치도록 연통을 넣거라.”
이에,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여 바로 답하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정말 잘 되었네, 사부. 당 군도 끝장이군.”
팽무일이 기뻐 개소문에게 이처럼 말하니, 개소문이 나지막이 답하였다.
“모두가 힘을 합쳐야 가능한 일이니, 제자는 안시성에 머무는 동안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개소문의 이 말로 모두가 힘을 합쳐 싸울 수 있게 되었음에 팽무일이 안심할 때, 평강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허나, 네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당 군을 몰아낸 후 반드시 죄를 물을 것이다. 그 점 명심하거라.”
이에, 팽무일이 항변하려 들자, 개소문이 손을 내저어 제지하였다.
“긴 이야기는 당 군을 물리친 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 *
황제 이세민에겐 이제 다른 선택은 없었다.
이제 와 토산 공사를 중단하고 평양성으로 직공할 수도 없었으며,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군을 나누어 건안성과 신성 공략을 명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아직 비사성엔 군량미가 풍족하였고, 요동성, 백암성, 개모성 등을 함락하여 군량미가 추가로 확보되었으니, 대군의 보급 상황은 아직 충분하였다.
“토산 공사를 더욱 전념하여 한시라도 빨리 안시성을 함락하는 것만이 정해다.”
생각을 굳힌 황제 이세민이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토산 공사에 투입할 군사의 수를 더욱 늘리게 하였다.
이에, 해가 뜨기 시작하여 해가 질 때까지 토산 공사가 지속되었고, 노역에 동원된 군사들은 점차 지쳐만 갔다.
토산이 안시성과 가까워질수록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군사의 수가 늘었고, 당 군의 사기는 이와 함께 나날이 저하되어갔다.
설인귀와 부복애가 토산 주위와 정상 등을 단단히 방비하며 공사하는 군사들을 지키고자 애썼으나, 토산의 크기가 너무도 컸고, 공사에 참여한 군사의 수 역시 너무도 많아 모두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에, 해가 저물고 밤이 깊으면 당 군의 진영 곳곳에선 무향요동랑사가가 울려 퍼졌다.
요동에 끌려가 헛된 죽음을 당하지 말라는 경고를 담은 이 노래는 수의 패전에도 영향을 미쳤으니, 황제 이세민이 격노한 것은 당연하였다.
“무향요동랑사가를 부르는 군사들은 모두 잡아들여 참수하라!”
한밤중에 떨어진 황제의 명에, 진영 곳곳에서 군사들이 끌려 나왔고 이내 곧 이들의 목이 잘렸다.
그리고는 이들의 머리를 창에 꽂아 진영 곳곳에 세우니, 이후 감히 그 누구도 무향요동랑사가를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