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토산이 무너지는 날 (6)
수십 가닥의 올가미들이 평강을 노리고 뱀처럼 날아들었다.
이 순간에도 평강은 자신보다 북문이 더 염려되어 힘을 내어 소리치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세요! 문이 열리면 그간의 노력이 헛수고가 돼요!”
그녀의 외침에 북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죽을힘을 다해 당 군에 맞섰고, 성문 주위 백성들도 달려와 당 군을 막았다.
그리고 마침내 올가미들이 평강의 몸을 덮쳐왔다.
“감히!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이때 팽운이 벼락 치듯 소리치며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올가미들을 베었다.
그리고 독고영도 급히 평강의 앞을 막고는 봉을 휘둘러 달려드는 당 군을 쓰러뜨렸다.
어린 소녀들의 무용에 당 군이 당황하여 주춤하자, 주위 백성들도 용기를 내어 당 군에게 달려들었다.
“공주님을 지켜라!”
백성들의 거센 저항과 외침에 당 군이 주춤하였다.
이에, 이도종이 의아해 평강을 살피고는 크게 소리쳐 명하였다.
“저 여인은 고구려의 공주 평강이다! 평강을 사로잡는 이에게 황금 삼백 냥을 포상하겠노라!”
이도종의 외침에 당 군의 눈이 금세 탐욕으로 이글거렸다.
“평강을 잡아라!”
“황금이다! 황금!”
황금에 취한 당 군이 굶주린 이리 떼처럼 달려드니, 삽과 호미를 든 백성들이 당해낼 수 없었다.
자신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하나둘 쓰러지니, 마음 아픈 평강이 소리쳤다.
“나를 두고 성문을 지키시오! 나는 괜찮소!”
이에 이도종이 비웃듯 중얼거렸다.
“이미 우리 군사들이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하였는데, 성문이 열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때, 밧줄을 타고 성벽을 오르던 당 군 사이로 괴인이 나타나더니, 당 군들의 머리와 어깨를 밟고 빠르게 성벽 위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어둠에 잠긴 숲에서 바람을 가르며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드니, 성벽을 오르던 당 군들이 맥없이 땅에 처박혔다.
“무엇이냐?”
이도종이 놀라 소리치던 순간, 어느새 성벽 위로 오른 괴인이 평강에게 달려드는 당 군 속으로 쓱 들어갔다.
그리고는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더니, 당 군의 머리와 어깨를 밝고 걷어차며 종횡무진하였다.
이에, 이도종이 눈을 크게 뜨고 괴인을 살폈다.
목은 없는 듯 머리와 어깨가 딱 붙었는데, 머리는 크고 둥글었으며 머리카락은 한 올도 없었다.
몸통 역시 크고 둥글어 무척 우스꽝스러웠으며, 팔과 다리가 매우 짧았으니, 마치 커다란 거북이가 허공을 나는 듯했다.
그러나 괴인은 이 짧은 다리로 잘도 허공을 날듯 솟구쳤으며, 그가 밟고 딛을 때마다 당 군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처박혔다.
아마도 단순히 밟고 딛는 것이 아닌 발끝으로 살짝 걷어차는 듯해 보였다.
이에 이도종이 크게 격분하여 소리쳐 물었다.
“거북이 탈을 뒤집어쓴 네놈은 누구냐?”
이도종의 물음에 괴인이 어이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살다 살다, 이젠 거북이 탈까지 뒤집어썼다는 소리까지 듣는구나. 하하하.”
한참을 웃은 괴인이 눈을 빛내며 이도종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에 머리와 어깨를 밟힌 당 군이 비명을 지르며 맥없이 날아가니, 이 기이한 광경에 이도종이 기가 질려 뒤로 물러나며 소리쳐 명하였다.
“저 거북이를 막아라! 살을 날려라!”
이에 화살이 날아드니, 괴인이 급히 짧은 팔로 검을 휘두르며 몸을 지켰다.
놀랍게도 괴인의 무공은 신기에 달하여 화살을 모두 막아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뒤 평강과 백성들마저 지켰다.
이때, 괴인을 알아본 평강과 독고영이 놀라 동시에 소리쳤다.
“팽무일!”
“나를 기억하는가? 하하하.”
팽무일이 날아드는 화살과 당 군을 막으며 여유롭게 물으니, 평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영아, 저 팽무일은 간악하기 그지없는 자다. 저자가 좋은 마음으로 우리를 도울 리 없으니, 필경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경계 또 경계해야 한다.”
“주의 또 주의하겠습니다.”
독고영이 바로 답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마도 언제 등을 돌려 달려들지 모를 팽무일을 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때, 팽운은 자신의 백부 팽무일이 갑작스럽게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내어 당 군을 막아주니, 놀랍고도 기뻐 부르짖었다.
“백부! 백부님! 우리를 도우러 오셨군요!”
이에, 팽무일이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껄껄 웃었다.
“여부가 있겠는가? 당연히 도우러 왔으니, 제발 나 좀 공격하지 말고, 당 군을 막거라! 하하하. 곧 나의 사부가 대군을 이끌고 올 것이다! 하하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숲의 어둠 속에서 함성이 일더니, 뿔 달린 검은색 투구와 갑주를 걸친 군사들이 화살을 날리며 북문을 향해 달려왔다.
성벽을 기어오르던 당 군은 화살에 맞아떨어졌고, 아직 밑에서 대기하던 당 군이 몸을 돌려 맞서고자 했다.
그때, 고구려 군사 사이에서 봉두난발한 사내가 두 자루 박도를 휘두르며 몸을 날리니, 그가 지난 자리엔 머리가 으깨진 당 군의 시신만 가득하였다.
그리고 기골이 매우 장대한 사내가 질주하며 맹수처럼 포효하였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말라!”
사내는 내달리면서도 등에 멘 다섯 자루의 비도를 연거푸 날리어 당 군을 쓰러뜨리고는 허리춤의 검을 양손에 쥐고는 근처 이도종의 부장 두 명에게 날렸다.
이에,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채 부장 둘이 절명하니, 당 군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졌고, 사내는 질주하면서도 당 군이 떨군 병장기를 집어 들기 무섭게 연신 날렸다.
“비검술!”
평강이 사내가 펼치는 무공에 놀라 소리치며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선대 태왕 건무와 대장군 강이식을 시해한 불구대천지 원수 연개소문이었다.
“연개소문!”
평강이 놀라 부르짖으니, 당 군은 물론 안시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놀라 일시 몸이 굳었다.
개소문은 당 군과 안시성 양측 모두의 적이었으니, 그가 누구를 위해 나타났는지 알 수 없어 두려웠던 것이다.
“성문을 여시오! 우리가 돕겠소!”
성문에 바짝 붙은 개소문이 소리치니, 이에 평강이 크게 부르짖었다.
“절대로 열지 마시오! 그를 안시성 안에 들여선 아니 되오!”
이에, 개소문이 한숨을 내쉬며 야수에게 명하였다.
“야수! 성문을 열라!”
명을 받은 야수가, 밧줄을 타고 바람처럼 성벽 위에 오르더니, 단숨에 성벽을 가로질러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앞을 막는 당 군은 베고, 안시성 군사와 백성들은 어깨로 밀어 쓰러트리고는 북문으로 달려가 거대한 빗장을 박도로 내리쳐 단칼에 베었다.
쾅!
굉음을 내며 빗장이 잘리며 바닥에 떨어지니, 개소문이 몸으로 밀어 성문을 열고는 소리쳐 명하였다.
“당의 총관 이도종이 성벽 위에 있다! 놈을 사로잡아라!”
이에 이도종이 기겁하여 밧줄을 타고 급히 성벽을 내려가니, 개소문의 명을 받은 고구려 군사들이 그를 쫓아 달려갔다.
“퇴각하라! 퇴각하라!”
정신이 아득한 이도종이 소리 지르며 먼저 도주하자, 성벽 위 당 군이 살고자 급히 밧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성벽 아래 당 군은 달려드는 고구려 군사들을 피해 도주하였니, 밧줄을 타고 내려가던 당 군은 성벽 아래를 장악한 고구려 군사들이 날린 화살에 맞아 땅에 처박혔다.
간신히 화살을 피해 성벽 아래로 내려간 당 군들 역시 미리 대기하던 고구려 군사들이 창과 칼로 찌르고 베니,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성벽 위에 남은 당 군의 목을 베라!”
북문으로 들어온 개소문이 성벽 위를 올려다보며 명하니,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성벽 위로 올랐다.
이때, 온동이 황우와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오다가 개소문의 목소리에 놀라 소리쳤다.
“연개소문!”
자신을 구한 어득구를 죽이고, 선대 태왕과 대장군을 시해하였으며, 수많은 귀족과 장수를 죽여 권좌에 앉은 개소문을 적이라 여긴 온동이 금강대도를 뽑아 들었다.
“동아, 형의 이름을 어찌 그리 함부로 부르는 것이냐?”
개소문이 부드럽게 물었으나, 온동은 그가 좋은 마음으로 성에 들어왔으리라 여기지 않았다.
“당장 성 밖으로 나가시오!”
차마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어 온동이 이처럼 외치며 개소문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자 금강대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개소문은 결코 성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안시성을 돕고자 온 것이니, 지금 나갈 수는 없구나.”
담담히 답하며 검을 들어 온동이 휘두른 금강대도를 막았다.
챙!
그러나, 금강대도의 시퍼런 날이 개소문의 검을 가볍게 가르니, 개소문이 놀라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 나가시오. 나가지 않으면, 벨 수밖에 없소.”
개소문의 숨소리로 방향을 가늠한 온동이 냉정히 말하였다.
이에, 개소문이 반 토막 난 검을 들여다보더니, 허허 웃으며 답하였다.
“눈이 안 보여도 이처럼 절정의 무공을 펼칠 수 있다니, 과연 내 아우 동이는 천하제일의 기재로구나.”
개소문의 말 속에서 정이 느껴졌으나, 온동은 자신이 믿고 따르는 온달이 적으로 간주한 개소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닥치시오! 어서 성 밖으로 나가시오!”
온동이 크게 호통을 치며 다시 금강대도를 휘두르니, 개소문은 반 토막 난 검으로 이를 막고자 파천신검을 펼쳤다.
그 어떤 공격에도 능히 맞설 수 있는 천하제일의 방어기인 파천신검이었으나, 반 토막 난 검으로 금강대도를 막을 수는 없었다.
챙!
반 토막 난 검이 다시 또 잘려 손잡이만 겨우 남았다.
이에, 온동이 개소문의 숨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금강대도를 겨누며 다시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그만! 온동! 그만!”
이때 황우가 온동과 개소문 사이로 뛰어들고는 거대한 쇠망치로 땅을 내리쳤다.
쾅!
땅이 흔들리고 굉음이 귓전을 때리니, 소리로 파악하는 온동이 크게 당황하였다.
“온동, 여기서 대막리지를 밖으로 내몰 수는 없다. 필경, 도주했던 당 군이 수를 늘려 진을 치고 있을 터! 대막리지뿐만 아니라 우리 고구려 군사들마저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이에, 온동이 망설이자, 성벽 위에서 내려온 평강이 부드럽게 말하였다.
“동아, 황우님의 말이 옳다. 당 황제는 고구려의 대막리지를 결코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성 밖으로 내모는 것은 개소문뿐만 아니라 애꿎은 군사들마저 위험에 처하게 되니, 일단 성주를 뵙고 결정을 구해 보도록 하자꾸나.”
평강마저 이처럼 권하니, 온동이 금강대도를 거두고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에, 개소문도 손잡이만 남은 검을 버리고는 온동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평강에게 살며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황우에게 시선을 옮겨 담담히 말하였다.
“대장군의 일은 유감이오.”
개소문이 표한 유감은 대장군 강이식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이란 뜻도 아니었으며, 미안하단 사죄의 의미도 아니었다.
이에, 황우가 대답도 하지 않고 개소문을 외면한 채 북문으로 다가가, 자신의 거대한 쇠망치를 빗장 대신 걸쳐 채웠다.
* * *
별동대를 이끌고 북문을 공격했던 이도종이 패하여 돌아오니, 황제 이세민이 크게 격노하였다.
“어찌 그대마저 나를 실망시킬 수 있단 말인가?”
황제의 물음에 이도종이 무릎을 꿇고 사정을 아뢰었다.
“신기에 달한 무예 고수가 성벽 위로 날아들었고,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대군을 이끌고 우리의 배후를 급습하였나이다.”
“뭐라? 무예 고수?”
“그러하옵니다. 외양은 마치 거북이와 같았으나, 경공이 뛰어나고 검과 발재간이 너무도 매서웠나이다.”
황제 이세민은 마침 떠오르는 사내가 있어, 근위장 황무문에게 시선을 옮겨 물었다.
“거북이라… 그대도 생각나는가?”
이에, 황무문이 머리 숙여 답하였다.
“팽무일입니다. 보잘것없는 무예를 지닌 자로 크게 심려하시지 않아도 되시옵나이다.”
이에, 황제 이세민이 만족하여 껄껄 웃었다.
“우리 근위장이 진정한 무예 고수의 실력이란 어떤 것인지 한번 보여줘야겠구나. 하하하.”
황무문이 대답을 대신하여 허리를 숙이니, 황제 이세민이 손뼉을 치며 매우 흡족해하였다.
“좋아! 아주 좋아!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마저 저 안시성에 들어갔다고 하니, 대역무도한 역도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게 되었도다! 하하하. 황무문! 다음엔 네가 앞장서거라!”
“연개소문의 목을 베어 검귀 폐하께 바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