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토산이 무너지는 날 (4)
오호도는 본래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
그 크기가 작고 돌섬으로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환경이었을뿐더러, 천하제일관문인 임유관(산해관)과 인접해 있어 해상 무역에도 이점은 없었다.
날이 좋은 날은 바다 건너 임유관이 보일 정도였으니, 이 돌섬을 통한 무역이 성행할 리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의 황제 이세민은 이 돌섬의 지정학적 위치를 살펴 은밀히 수군기지를 세우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어리석은 고구려 놈들, 침공에 대비해 영주는 공략하면서 이 오호도의 중요성은 모르는구나! 하하하. 이 오호도를 미리 점거하였다면 우리의 수군이 어찌 바다를 건너 고구려로 향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황제 이세민에 의해 수군 기지가 된 오호도는 고구려 침공을 준비하는 동안 무척이나 혼잡스러웠다.
배를 건조하고, 보급 물자를 나르는 등 분주하였던 오호도였으나, 막상 수군총관 장량이 당의 수군을 이끌고 출병한 뒤로는 임유관에서 보낸 보급 물자를 임시로 보관하는 군수 창고 역할만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당의 수군총관 장량이 비사성을 함락하여 바닷길을 확보해 그 중요도가 낮아진 탓도 있었으나, 오호도의 중요성을 인지한 이가 당에선 오직 황제 이세민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황제 이세민이 직접 원정을 나간 이후, 장안성과 탁현은 물론, 오호도와 임유관에서 조차 그 중요성을 인식하여 활용하고자 하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장량이 수군을 모두 이끌고 고구려에서 임유관으로 이어진 바닷길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기에, 굳이 수군을 새로 충원할 필요가 었었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이 오호도의 중요성을 인지한 이가 고구려에도 있었으니, 바로 연개소문이었다.
만일 연개소문이 전쟁 전 이 오호도를 공략하여 점거하였다면, 전장의 신이라 불리던 당의 황제 이세민은 더 많은 수군으로 기필코 이 오호도를 되찾고, 경계도 강화했을 것이 분명했다.
비록 당의 수군이 비사성에서 임유관으로 이어진 바닷길을 완벽히 장악했다고는 하나, 당항성에서 임유관으로 이어진 바닷길까지 막고 있지 못한 실정이었다.
연개소문은 바로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공격로로 이 오호도를 노리고 있었다.
“오호도에 잠입해 있던 제 수하에게서 연통이 왔습니다.”
당진평이 전서구에 묶인 서신을 펼치며 말하였다.
“기다린 보람이 있겠습니까?”
연수영이 궁금해 물으니, 당진평이 빙그레 웃었다.
“보소서.”
당진평이 건넨 서신을 연수영이 받아 읽고는 환하게 웃었다.
“군량미가 사람보다 많다니,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함대의 속도를 높이라 이르시지요.”
당진평의 말에 연수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부장을 불러 명하였다.
“속도를 높여라! 바로 직격하겠노라.”
* * *
당항성 앞 바다를 막고 있던 연수영과 같은 시기에, 성충은 백제 군을 이끌고 당항성의 성문을 막고 있었다.
때마침, 연개소문이 보낸 전령의 전언에 성충이 깜짝 놀라 무릎을 치며 낮게 부르짖었다.
“아! 그렇구나! 오호도를 미리 공격할 것이 아니라, 비사성이 함락된 이후 공략하면 더 쉽겠구나!”
성충도 이미 오호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연개소문이 이런 절차를 생각하고 있었다니. 실로 놀라우면서도 경계해야 할 인물이로다.’
내심 개소문의 비상한 전략에 탄복하면서도 그가 백제의 적이 될 것을 우려한 성충이 내심 생각을 정리하고는 전령에게 말하였다.
“이 성충이 당항성 앞을 단단히 지켜, 함부로 준동하지 못하게 할 터이니 심려치 마시라 대막리지께 전하시게.”
전령이 예를 표하고 떠나니, 성충이 바로 지도를 펼쳐 오호도를 찾았다.
일반 지도와 해도에는 오호도가 없었으나, 성충 스스로가 직접 기입한 지도에는 임유관 바로 앞 작은 돌섬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 일로 당 황제가 수양제 못지않게 무척 고달프겠구나.”
그리고 다시 시선을 영주의 동남 방면으로 옮겼다.
만리장성과 인접한 작은 구릉에 붉은색 원으로 표시된 지점이 있었다.
아마도 성충이 그 중요성을 인지하여 따로 표시한 곳인 듯하였다.
“만일 연개소문이 여기까지 점거한다면, 그의 목표는 요동에서 당 군 축출이 아닌, 중원 공략일 것인데… 과연 연개소문이 이곳을 노릴 것인지 실로 궁금하구나. 하하하.”
껄껄껄 웃던 성충의 눈빛이 순간 빛났다.
그리고 이내 표정을 고쳐 냉정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전제 조건은 전장의 신인 이세민이 고구려가 오호도를 점거했음을 모를 때나 가능한 일이다. 오호도가 고구려 수중에 떨어진 사실을 이세민이 알게 된다면 결코 한가로이 토산이나 쌓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성충의 시선이 지도의 안시성으로 향하였다.
“연개소문… 황제 이세민을 상대로 어떤 수를 낼 것인가? 전장의 신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이 오호도 점거로 인하여 격노한 전장의 신을 대적하게 될 터인데…….”
다시 시선을 영주와 만리장성 사이 이름 모를 구릉으로 옮긴 성충이 중얼거렸다.
“그대가 이곳까지 점거한다면 우리 백제는 고구려를 지붕으로 삼아 안전할 것이나, 그렇지 못한다면 나는 왕에게 아뢰어 당 황제의 편에 설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름 모를 구릉의 중요성은 오호도와 동일하였으니, 바로 군사 거점이자, 육상 보급로 확보와 동시에 보급 차단이 가능한 요충지였다.
성충이 미리 개소문에게 오호도와 이름 모를 구릉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연유는 혹여 젊고 패기 넘치는 개소문이 무리하게 공략을 시도하여 황제의 격분을 살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백이십여 난을 평정하고 돌궐, 토역혼 정벌 등을 행하면서도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던 황제 이세민을 고구려의 풋내기 대막리지 연개소문보다 윗선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멀지 않은 장래, 연개소문은 성충이 요충지라 여긴 이름 모를 구릉에 석성을 쌓고 연수영에게 지키라 명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바로 이 석성을 거점으로 하여 만리장성 너머 중원 침공이 시작될 수 있었다.
* * *
칠흑 같은 어둠이 장막처럼 펼쳐진 밤바다에 고구려 군선이 진을 펼쳤다.
그리고 불도 켜지 않은 대장선 위에서 당진평이 오호도의 불빛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인의 수하들은 살수대와 정보 수집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저곳 오호도엔 이 두 임무가 가능한 정예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밤, 군량미 창고를 불 태워 신호를 보낼 것입니다.”
당진평의 말대로 그의 수하들은 약재상 신분으로 이 오호도를 자주 들렀고, 며칠간 머물다가 떠나곤 하였다.
그리고 오늘 밤도 이들이 오호도에 머물고 있었으니, 당진평의 명에 따라 호응할 것이다.
“이 오호도 공략에 대하여, 사전에 대막리지와 논의가 있었습니까?”
연수영은 당진평이 미리 수하들을 심어 놓은 일이 개소문과 논의되었으리라 여겨 물었으나, 당진평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아니옵니다.”
“아니라? 허면, 그대는 어찌 알고 이 외딴 섬에 수하를 심었고, 오라버니는 이 오호도를 어찌 아시고 점거를 명하셨단 말이오?”
이에, 당진평이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였다.
“소인은 본업이 살수요, 또 다른 업은 정보 수집이라… 이 오호도를 황제 이세민이 중히 여김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
“허나, 이 오호도의 존재를 알고도 개전 초기엔 공략할 수 없어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수하들만 심어 놓았었는데, 대막리지께서도 이 오호도를 파악하시어 공략을 명하신 것입니다.”
“오라버니는 이 오호도를 어찌 아셨을까요?”
“대막리지는 저와 팽무일 등을 구하기 위해 주유천하하셨기에, 아마도 이 오호도의 중요성을 돌섬이었던 그 당시부터 파악하신 듯합니다. 사실, 이 오호도는 그 중요성을 알고 있다고 하여 공략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당의 수군이 바닷길을 완벽히 막고 있으니…….”
“…….”
“우리가 당항성 앞 바다에 있었기에, 당의 수군이 막고 있는 바닷길을 거치지 않고 도달할 수 있었으니… 대막리지께선 아마도 오호도 공략 순서로 당항성에 우리를 보내신 듯합니다.”
말을 마친 당진평이 손을 들어 갑작스럽게 오호도에 밣혀진 불덩이를 가리켰다.
“군량미 창고를 태운 모양입니다.”
이에, 연수영이 소리쳐 명하였다.
“진격하라! 상륙하여 오호도를 점거한다!”
이에 불도 밝히지 않은 군선 수백 척이 대장선을 선두로 노를 저어 진격하였다.
* * *
오호도의 포구 경계는 삼엄하지 않았고, 그나마도 대부분의 군사들이 군량미 창고의 불을 끄기 위해 몰려갔다.
이에, 포구까지 당도한 군선에서 소리 없이 내린 고구려 군사들이 몇 안 되는 당 군을 베고는 그대로 섬 안을 종횡무진하였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말라! 포로는 필요치 않다!”
연수영의 엄한 명에 따라 군사들이 오호도를 샅샅이 살피며 당 군을 모두 베었다.
* * *
오호도의 불빛은 임유관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전과 달리 군량미 창고가 불 타며 환하게 빛나니, 임유관에서 보기에 그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이를 살피고자 군선을 이끌고 출진할 장수는 없었다.
“서, 설마 고구려 놈들이?”
이 불길한 예감에 차마 엄두를 못 낸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수군과 군선을 장량이 이끌고 출병한 탓이었다.
필경 고구려 수군이 오호도를 공격하고 있다 여기면서도 출진 가능한 군선의 수가 부족해 출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이 밝아도 오호도가 고구려 군에게 점거된 사실을 황제 이세민에게 바닷길로는 알릴 방도가 없었다.
멀리 돌아가더라도 육로를 통해 황제에게 알려야 했으니, 오호도 점거 소식은 황제 이세민보다 신성의 개소문이 먼저 전달받을 수 있었다.
* * *
“황제는 결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오.”
어려서 수차례 황제 이세민을 보았기에, 개소문이 이처럼 자신하여 말하였다.
“오호도를 우리가 점거했다는 소식을 황제가 접하게 될 경우, 그는 결코 여유롭게 토산만 쌓고 있지 않을 것이오. 바로 이곳!”
개소문이 지도 속 안시성의 북문을 가리켰다.
“동문과 남문에 비해 그나마 산세가 덜 험준한 곳이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황제는 필경 이 북문을 공격하여 단숨에 안시성을 함락시키려 들 것이오.”
아직 비사성의 보급 물자는 충분하였으나, 향후 보급이 끊길 수 있음을 군사들이 알게 될 경우, 당 군의 동요가 무척 심할 것은 분명하였다.
이에, 황제 이세민은 단숨에 안시성을 제압하고, 비사성의 보급을 확보한 후 평양성 직격을 택하리라 개소문은 판단하였다.
“허면 큰일 아니오? 안시성은 서문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것인데…….”
팽무일이 말꼬리를 흐리자, 연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하여, 내가 건안성을 거쳐 안시성의 북문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안시성의 북문을 공격하는 당 군의 배후를 칠 것이다.”
이에, 팽무일과 고정의가 깜짝 놀라 말하였다.
“아니, 사부가 왜 직접?”
“대막리지가 친히 움직일 필요는 없소이다.”
그러나 개소문은 단호하였다.
“아니오. 내가 직접 가야 하오.”
“아니, 어째서?”
팽무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로 물었다.
“내가 가야, 안시성의 성문을 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뭐? 성문? 아니 성문이 열린다고 해서 당 군에게 포위된 안시성에 들어가자는 소리야? 거기 들어가서 뭐하게?”
팽무일은 이미 자신도 개소문과 함께 전장에 나선 듯 말하고 있었다.
이에, 개소문이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들어가서 뭐하긴, 우리가 반격할 때까지 안시성이 버틸 수 있도록 도와야지.”
모든 장수가 당황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니, 개소문이 고정의에게 차분히 말하였다.
“막리지는 들으시오. 내가 안시성에 들어간 뒤, 이후 따로 전언을 보낼 터이니, 막리지는 백암성, 개모성, 요동성 등을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병한 듯 모양새를 갖추고는 군사들을 주필산 뒤에 몰래 배치하고 대기하시오.”
“대기라 하면 언제까지인지?”
고정의의 물음에 개소문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답하였다.
“나도 정확히 말할 수 없으나, 당 군이 총력을 펼쳐 안시성의 외성을 넘으려 할 때가 될 것이오. 그때 막리지가 대군을 이끌고 당 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적을 혼란케 하시오.”
연개소문의 말은 반격을 뜻하고 있었으니, 모든 장수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