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토산이 무너지는 날 (3)
온달은 장검의 추격을 피해 여전히 안시성과 비사성 주위 산을 맴돌았다.
온달의 유격부대가 아직도 건재하여 기동하고 있음을 두려워한 비사성의 장량은 감히 군량미 예비분을 수송하지 못하였고, 황제 이세민도 수송을 명하지 않았다.
비사성엔 바닷길을 통해 운반된 군량미가 그득 쌓여만 갔고, 유십오만 대군에 달하는 황제 이세민의 원정군은 차츰 군량미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요동성과 백암성, 개모성을 비롯하여 점령한 여러 성의 군량미가 남아 있었으니, 황제 이세민은 결코 조급하지 않았다.
“군량미는 충분하다. 바닷길은 안전하고 비사성엔 군량미가 쌓여 있으며, 우리가 함락한 요동의 여러 성에서도 운송할 수 있도다. 저 오만방자한 안시성만 점령한다면 이후, 군사들을 나누어 대군이 군량미를 호위하게 해도 충분한 일이다.”
온달의 유격부대를 두려워하는 장수들을 이처럼 안심시킨 황제 이세민이 전령을 불러 명하였다.
“너는 장검에게 결코 온달과 맞서지 말고, 뒤를 쫓기만 하라 일러라. 맞서서 이길 상대가 아님을 명심 또 명심하라고 단단히 일러라!”
이에, 전령이 급히 말을 몰아 장검의 이민족 부대의 임시 거점으로 향하였다.
* * *
“폐하의 명인가?”
전령이 전한 황제 이세민의 명을 장검이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매우 빈정 상한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하옵니다.”
전령이 공손히 답하니, 장검이 손을 들어 물러가라 명하고는 주위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온달은 바로 우리 눈앞 야산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다. 오늘은 밤이 깊어 급습할 수 없으나, 내일은 날이 맑은 즉시 공세를 펼쳐 온달을 잡을 것이다.”
장검이 황제의 명을 거슬러 온달을 공격하겠다고 말하니, 계필하력이 놀라 말하였다.
“황제께서 온달을 쫓기만 하되 공격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장군께선 어찌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하려 하시나이까?”
이에, 장검이 코웃음을 치며 답하였다.
“그대는 우리가 온달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가?”
“그것은 아니오나…….”
“폐하는 우리가 한 달이 넘도록 성과를 내지 못하니, 우리가 온달보다 약해 공격하지 못한다 여기신 것이다. 이대로 우리가 끝내 온달을 요절내지 못한다면, 훗날 안시성이 함락된 뒤 황제께서 친히 대군을 이끌고 온달을 잡을 것이다.”
“…….”
“그땐, 우리의 명예가 회복되지 못할 터! 장수된 자가 이를 두고 볼 수 있겠는가?”
이에, 계필하력이 답하지 못하니, 장검이 장수들에게 명하였다.
“고구려 놈들은 지리에 밝으니, 우리는 밤을 피해 날이 밝으면 공격할 것이다. 그대들은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준비를 단단히 하라!”
이에, 이견을 내는 장수가 아무도 없으니, 온달과의 일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 *
야산에 임시 거점을 마련한 온달도 장수들을 불러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였다.
“장검과 맞서지 않고 때를 기다려 황제의 본진을 공격하고자 했으나, 장검도 어찌된 영문인지 도통 공격을 하지 않고 우리의 뒤만 쫓고 있구려.”
온달의 말에 막바우가 시큰둥하게 답하였다.
“잘됐구먼. 장군 뭐가 문제요?”
이에, 혁수가 온달과 막바우를 번갈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막바우 장군, 어찌 온달 장군께 그토록 함부로 말씀하시는지요?”
아마도 혁수가 보기에, 막바우의 태도가 무척 무례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이에, 막바우가 당황해 얼굴이 붉어졌다.
“어? 그랬나?”
금세 터질 듯 붉어진 막바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온달이 빙그레 웃었다.
“그 얼굴이 마치 홍시 같구려.”
“홍시는 무슨…….”
막바우가 또다시 무례히 말하니, 강혁수가 의아해 온달과 막바우를 살폈다.
둘 사이가 염려스러워 강혁수의 시선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에, 온달이 웃으며 강혁수에게 말하였다.
“나와 막바우는 오랜 벗이자, 사지를 함께 건넌 동지이며, 평생을 함께할 혈육과도 같은 사이라네. 나는 막바우를 일가로 여기고, 아우처럼 생각하니, 그리 근심스럽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네.”
온달의 말에 막바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장군, 낯간지럽게 뭔 그런 소리를 하시오.”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하는 막바우를 힐끔 쳐다보며 경우가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감격해 울겠네.”
“울긴 누가 울어!”
막바우가 침까지 튀기며 버럭 소리 지르니, 경우가 자리를 피해 온달 곁에 앉으며 말하였다.
“장군, 그간 우리가 저들과 일전을 벌이지 않고 거리를 유지했고, 저들도 날이 저물면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으나, 오늘 밤은 심상치 않습니다.”
“심상치가 않소?”
“그렇습니다. 척후가 돌아와 아뢰길, 적의 진영이 매우 부산스럽다 합니다. 아마도 날이 밝으면 공격해오리라 여겨집니다.”
이에, 온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에 맞게 우리도 산을 내려가 이동해야겠구려.”
장검과 전투를 벌이지 말고 때를 기다리자 주장해왔던 경우가 이번엔 다른 의견을 내었다.
“아닙니다.”
“아니오?”
“그렇습니다. 이번엔 우리 군의 피해가 없이 싸울 수 있을 듯합니다.”
경우가 자신감을 내비치니, 모두가 놀라 바라보았다.
이에, 경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적이 공격해오면 도망치기를 반복했기에, 적의 수장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군사들과 적장 대부분은 이번에도 우리가 도주하리라 여길 것입니다. 하여!”
“하여?”
“우리가 이번에도 도망치듯 산을 내려가면, 적은 안심하여 뒤를 쫓을 것입니다. 그때, 적을 포위 공격하면 피해 없이 섬멸 가능하리라 자신합니다.”
“포위 공격?”
막바우가 의아해 물으니, 경우가 귀니수를 가리켰다.
“귀니수가 밤새 미리 산을 내려가 대기하고, 우리가 적을 끌고 가면 그만일세.”
“오! 그거 그럴싸하구먼. 헌데, 이런 좋은 수를 진작에 좀 내지 그랬나? 그랬으면 이처럼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지 않나?”
이에 경우가 깔깔 웃으며 답하였다.
“처음부터 이런 수를 내면, 장검이 속아서 포위되겠나?”
“그건 그렇군. 헌데 경우, 자네 혹시 처음부터 이렇게 적을 속이려고 도망 다니자고 한 것인가?”
막바우가 의아해 물으니, 경우가 이번에도 깔깔 웃으며 답하였다.
“당연한 소리!”
“이런 엉큼한 사람 같으니, 그렇다면 진작 말해주지 그랬나?”
온달이 아쉬워 말하니, 경우가 온달을 비롯한 주위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장군을 비롯한 여기 장수들은 남을 속이는데 재주가 없어서 미리 말하였다면, 실감 나게 도망 다니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듣고 보니, 경우 그대의 말이 옳네. 하하하.”
온달이 이처럼 껄껄 웃으니, 막바우도 머리를 긁적이며 따라 웃었다.
“제길, 왠지 경우에게 바보 취급당한 것 같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진 않네. 하하하.”
* * *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장검은 계필하력을 선두로 하여 산을 올랐다.
말발굽 소리도 줄이며 산에 오르니, 장검이 마침내 손을 들어 명하였다.
“공격하라!”
뿔나팔이 울리고, 이민족 기병 육만 기가 일제히 내달렸다.
그러나 낮은 야산일지라도 들판과 달리 산지는 이들이 기마술을 펼치기 용이한 지형은 아니었다.
마음과 달리 기동력을 펼치지 못하는 사이, 온달의 유격부대는 군막도 버리고 급히 말에 올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놓치지 않겠노라! 추격하라!”
장검이 기필코 온달의 유격부대를 섬멸하고자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이에, 이민족 기병 육만 기가 일제히 경사를 내달리며 추격하였다.
돌궐과 거란 등의 이민족으로 구성된 장검의 부대는 사람뿐만 아니라, 말 역시 산악 지형에 익숙하지 않아 경사를 내려감에 무척이나 서툴렀다.
발을 헛디뎌 쓰러지는 말까지 있었으니, 진형이 무척이나 어수선했다.
이때를 노려, 온달이 급히 말머리를 돌리며 크게 외쳤다.
“반격이다! 개마무사는 돌진하라!”
개마무사들이 온달의 명에 따라 말머리를 돌리더니 삭을 앞세워 경사를 내려오는 장검의 부대를 향해 돌진하였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귀니수의 말갈 기병들이 야산을 돌아 장검의 부대 배후로 나타나더니, 기사를 펼치며 공세를 가했다.
이에, 장검의 부대는 꼼짝없이 앞뒤로 적을 맞게 되었다.
앞은 강철같은 개마무사들이 화살도 두려워하지 않고 돌진해 왔고, 배후는 산을 들판 달리듯 내달릴 수 있는 말갈 기병들이 거리를 두고 기사를 펼치니, 이민족 기병 육만 기의 비명이 끝도 없이 메아리쳤다.
계필하력은 장검을 지키고자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고 또 휘둘러 간신히 길을 열었다.
“장군! 이 길로 피하소서!”
계필하력의 외침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장검이 죽기 살기로 도주하였다.
한참을 내달린 장검이 주위를 둘러보니, 따르는 이가 오직 계필하력 한 명뿐이었다.
이에, 장검이 통탄하며 검을 들어 목을 찌르려 하니, 계필하력이 급히 검을 빼앗으며 말하였다.
“죄를 지었으면 벌은 황제께 받으소서. 그때까지는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그래, 그대의 말이 옳다.”
장검이 계필하력의 말에 동의하며 다시 말을 몰아 안시성 앞에 당 군 진영으로 향하였다.
* * *
안시성 서문 앞 토산에 대한 소식은 신성 연개소문에게도 하루가 다르게 전해졌다.
“벌써 삼백 보라…….”
개소문이 낮게 중얼거리며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안시성이 아닌, 바다 건너 임유관 앞 작은 섬인 오호도였다.
“사부, 무엇을 그리 보는 거야?”
팽무일이 의아해 물으니, 개소문이 눈을 빛내며 답하였다.
“황제 이세민이 이 엄중한 전장에서 느긋하게 흙장난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닷길을 이용한 보급이 원활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당연한 소리를 뭐 그리 진지하게 하나?”
팽무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였으나, 개소문은 여전히 진중하게 말하였다.
“전령을 불러라! 당항성 앞, 바다를 지키는 우리 수군과 당항성의 성문을 막고 있는 백제 군에게 전언을 보내겠노라.”
“뭐? 갑자기 왜?”
팽무일이 놀라 물으니, 이에 대한 답을 공손향이 대신하였다.
“연수영 낭자에게 이 오호도를 점거하여 바닷길을 끊고자 하시는 겁니다.”
“뭐? 그럼, 당항성의 수군이 폐수로 평양성을 공략하면 어찌하려고?”
팽무일이 급히 물으니, 공손향이 빙그레 웃었다.
“절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왜?”
“성 밖에 백제 제일의 책사 성충이 있기 때문이지요.”
공손향의 말에 팽무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쉽게 군을 움직여 당항성을 비우진 못하겠구먼.”
* * *
삼족오 기를 휘날리며 쾌속선이 접근해 전령이 대장선에 오르니, 연수영과 당진평이 맞이하였다.
“대막리지의 명이옵니다. 급히 군선을 이끌고 오호도를 점거하소서.”
오호도는 임유관에서 비사성으로 이어진 바닷길에 있는 작은 돌섬이었다.
이 돌섬의 가치를 황제 이세민이 매우 중히 여겨 이곳에 당의 수군 기지를 세웠고, 비사성과 함께 해상 보급로를 지키게 되었다.
당의 대군이 요동에 주둔하며, 황제 이세민이 비사성과 가까운 안시성 앞에 진을 펼치고 있는 이상, 고구련 군이 비사성을 공략하기란 불가하였다.
개소문은 어려서부터 주유천하하며 중원 각지를 누볐기에, 고구려의 그 어떤 장수보다 오호도의 중요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에, 당의 바닷길을 끊고자, 비사성이 아닌 오호도 공략을 명한 것이다.
전령의 전언을 들은 연수영이 당진평을 바라보니, 그 역시도 개소문과 뜻을 같이하는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찌 생각하시오?”
연수영의 물음에 당진평이 짧게 답하였다.
“복명해야지요.”
산동 일대의 지리와 정보에 통달한 당진평이었으니, 개소문의 이 계책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가능하겠습니까?”
연수영이 근심을 담아 물으니, 당진평이 빙그레 웃었다.
“천하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 있지요.”
“무엇입니까?”
“약방입니다. 하하하.”
당진평이 껄껄 웃으며 답하고는 손을 들어 자신의 수하를 불렀다.
“오호도에 전언을 넣어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