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토산이 무너지는 날 (1)
온달의 유격부대는 장검이 이끈 육만 기의 이민족 기병을 피해 안시성과 비사성 주위를 맴돌며 도주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이틀 전까지 장검과 함께 자신들을 추격하던 설인귀가 군사들을 이끌고 회군하였기에 앞뒤로 협공 당할 걱정은 없었다.
밤이 깊어 산 위에 임시로 거점을 마련하고는 온달이 장수들을 불러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였다.
“장군, 언제까지 도망다니실 겁니까? 우리와 수가 비슷한데 그냥 확 쓸어버리시죠.”
막바우가 볼멘 소리를 하였다.
아마도 며칠 째 도주만 하니, 분이 치민 모양이었다.
“안 되네. 지금은 군사들을 아껴야 하네.”
온달이 좋은 말로 막바우를 달래 보았지만, 막바우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싸우기를 주장하였다.
“장군, 설마 우리가 저것들에게 질 거라 여기시오?”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은 하나, 무리하게 싸워 군사들을 잃어선 아니 되네.”
“아니, 자꾸 뭔 군사들을 잃는다고 그러시오? 전장에서 군사를 잃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다고.”
계속 주장을 굽히지 않는 막바우의 옆구리를 경우가 쿡 찌르며 한마디 하였다.
“시끄러!”
“아니 뭐가 시끄러? 논의하자고 모여서 싸우자는 말도 못해?”
“이봐! 지금 우리 고구려에 쳐들어온 당 군이 저 장검의 군사들만 있는 게 아니잖아. 저것들은 언제든 물리칠 수 있지만, 저놈들을 몽땅 쓸어버리다가 우리 군사가 일부라도 상하면 아직도 안시성 앞에 당의 대군이 남아 있는데, 그것들은 어찌 대적할 텐가? 지금은 최대한 군사들을 아끼고 아껴 일격을 노려야 하는 거라고!”
“일격?”
“그래, 일격!”
듣고 보니, 경우의 말이 일리가 있어 막바우도 크게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생 뭐 있어! 한방이지! 경우 자넨 보기엔 여자처럼 생겨 먹었는데, 배포는 참 커! 아주 그냥 사내대장부야!”
막바우의 격한 칭찬에 경우가 그저 허허 웃으니, 이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귀니수가 온달에게 시선을 옮겨 물었다.
“하온데, 설인귀는 어찌 군사들을 물린 걸까요?”
이에, 온달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음… 아직 의도를 알 수 없으나, 안시성으로 보낸 척후가 돌아오면 알게 되겠지.”
이때, 마침 정찰 나갔던 군사가 돌아와 아뢰었다.
“장군, 큰일이옵니다.”
“무엇인가?”
온달이 바로 물으니, 군사가 말을 이었다.
“당 군이 안시성 서문 앞들에 거대한 토산을 쌓고 있습니다.”
“토산?”
“그렇습니다.”
“무엇을 하고자 토산을 쌓는 것 같더냐?”
“아직은 제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나, 필경 토산을 점차 안시성 성벽까지 이동시킬 듯합니다.”
“뭐라? 산을 이동시켜?”
“그렇습니다. 우리를 쫓던 설인귀가 지금 군사들을 이끌고 토산 주위를 지키고 있으며, 거의 모든 당 군이 흙을 날라 토산을 쌓고 있습니다.”
“이… 이런!”
온달은 그제야 설인귀가 회군한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장검이 집요히 자신들을 추격하여 안시성으로 군을 돌리지 못하게 하고 있음도 깨닫게 되었다.
“그래, 그 토산의 크기가 어느 정도이더냐?”
“아직은 대여섯 길 정도이오나, 계속 흙을 날라 쌓고 있기에 더욱 거대해질 것으로 판단되옵니다.”
이에, 경우가 군사에게 보다 자세히 물었다.
“성벽과의 거리는 어느 정도이며, 토산의 정상은 어느 정도의 군사가 한번에 오를 수 있어 보이더냐?”
“아직 안시성과의 거리는 천여 보 넘게 떨어져 있으며, 정상은 군사 오백여 명이 오를 수 있어 보였습니다.”
“장군, 다행스럽게도 아직 위협적이진 않은 듯합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토산을 지켜보며 적의 보급을 끊는 데 주력하시지요.”
경우가 온달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밝게 말하였다.
그러나 온달은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 수 없었다.
“음…….”
한숨을 내쉰 온달이 주위 장수들을 둘러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 장검을 치고 안시성으로 돌아가 토산을 공격할 것이오.”
이에, 경우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옵니다.”
“아니 된다? 놈들이 토산을 쌓아 안시성을 공격할 터인데, 이를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소?”
“적은 토산을 쌓고 있으면서도 경계를 삼엄히 하고 있으니, 우리만으로는 결코 토산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토산을 공격하다 역습 당할 것입니다.”
“허면, 이대로 토산이 안시성으로 향하도록 두고 보잔 말이오?”
“그렇습니다, 장군.”
경우가 너무도 당연히 답하니, 온달은 할 말을 잃어 그저 멍하니 경우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경우를 바라보는 온달의 큰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심 고심하는 듯하였다.
이에, 경우가 온달을 안심시키기 위해 좀 더 차분히 말하였다.
“장군, 효시가 울지 않았습니다. 성주도 아직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오니, 우리도 때를 기다려 함께 움직이는 것이 옳다 여기옵니다.”
안시성과 거리가 멀어 효시가 날아도 들을 수 없을 것이나, 경우가 너무도 침착히 말하니, 온달은 이점을 깨닫지 못하였다.
“효시… 성주도 때를 기다릴 터이니, 함께 움직여야 한다라…….”
“그렇습니다, 장군. 그때가 오면 제가 앞장서 장검을 물리칠 터이니, 장군께선 곧장 안시성으로 향하소서.”
* * *
안시성의 양만춘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외성 서문 아래에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이에 온동은 당 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땅굴을 파는 곳 옆으로 발석거들을 이동시켰고, 퍼낸 흙에 물과 진흙을 섞어 반죽하여 말리게 하였다.
말린 진흙더미는 거대한 바위처럼 크고 단단하였고, 이를 백성들이 부지런히 발석거로 날라 당의 진영과 토산 주위로 쏘아 보냈다.
한편, 진흙더미를 반죽하기 위한 물을 끌어오기 위해 땅굴 옆에 거대한 웅덩이를 팠고, 계곡에서부터 수로를 만들었다.
토산을 쌓는 당 군은 해가 저물면 작업을 멈추었으나, 안시성의 백성들은 횃불을 밝혀 말린 진흙더미를 계속해 날렸다.
이에, 당 군의 진영 전방 군막들이 밤낮없이 부서졌고, 애써 쌓은 토산이 무너지기를 반복하였다.
당 군도 발석거를 토산 근처로 끌고와 돌을 날렸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날릴 만한 돌을 찾기 어려워졌다.
이에, 황제 이세민이 크게 격노하였다.
“도대체 저놈들은 어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을 날릴 수 있단 말이더냐?”
격노한 황제의 귀에 지금도 토산과 군막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페하, 송구하오나… 저들이 날리는 것은 돌도 바위도 아니옵니다.”
장손무기가 조심스럽게 아뢰니, 황제 이세민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다? 그럼 대체 무엇이란 말이더냐?”
“말린 진흙더미이옵니다.”
“말린 진흙?”
“그렇사옵나이다. 소신이 안시성을 올려다보며 살펴본 바로는 수로를 내어 계곡물을 끌어오고, 서문 주위에 흙을 퍼내어 진흙과 물을 섞어 말리고 있는 듯하옵니다.”
“허면, 고구려 놈들은 땅 파서 바위를 빗어 날리는데, 우리는 날릴 돌멩이 하나 못 구한단 말이더냐?”
“송구하오나, 안시성처럼 계곡물을 끌어올 만한 곳이 주위에 마땅치 않사옵기에, 진흙을 말려 날릴 수는 없사옵니다.”
“그럼 이대로 계속 당해야 한단 말이더냐?”
“송구하오나, 진영을 좀 더 뒤로 물리고, 토산 공사를 잠시 중단하시는 것이…….”
“닥쳐라! 고작 말린 진흑더미가 무서워 진영을 물릴 수도 없으며, 토산 공사를 멈출 수는 없느니라! 더욱 가열차게 토산을 쌓도록 독려하거라!”
* * *
밤이 깊어도 안시성의 백성들은 서문에 바짝 붙은 땅굴에서 쉴 새 없이 흙을 퍼 날랐다.
이를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던 양만춘이 온동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하였다.
“온동, 너의 지혜로 우리가 땅굴을 파고 있음을 당 군이 눈치 채지 못한 듯하구나.”
사실, 토산까지 땅굴을 파서 거대한 함정을 땅 밑에 만드는 일은, 땅을 파는 일보다 퍼낸 흙을 처리하는 일이 더 큰 문제였다.
퍼낸 흙이 외성에 쌓이면, 안시성의 구조상 성 밖 당군들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온동의 지혜로 퍼낸 흙도 처리할 수 있었을뿐더러, 토산과 당 군 진영에도 타격을 가할 수 있었으니, 실로 일석이조라 할 수 있었다.
“성주님, 소인의 짧은 소견으로는 토산을 무너뜨릴 만한 함정이 땅 밑에 마련된다고 하더라도, 단단한 땅 위에 세워진 토산은 쉽게 함정에 빠져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땅 밑에서 지면을 허물어 토산을 붕괴시킬 수는 있사오나, 그렇게 할 시, 땅 밑에서 작업하는 이들도 토산과 함께 생매장될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큰일 아니더냐?”
애써 함정을 파고도 토산을 붕괴시킬 방법이 없으니, 양만춘의 안색이 금세 어두워졌다.
“하여, 소인이 생각하였습니다.”
“뭐라? 생각한 것이 있는 게냐?”
“진흙더미를 만들기 위해 만든 웅덩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어찌 이용하는 것이더냐?”
“웅덩이를 더욱 크게 파고, 수로로 물을 가득 받은 다음… 땅굴로 물길을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물길로 웅덩이에 모아둔 물을 땅굴에 쏟아붓는다면 함정까지 가득 찬 물로 인하여 토산 밑 지면이 허물어질 것입니다.”
“이런 좋은 수가! 설마 온동 너는 계곡의 물을 끌어 올 때부터 이 수를 생각했던 게냐?”
양만춘이 너무도 기뻐 어깨를 다독이며 물으니, 온동은 그저 빙긋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온동 너는 참으로 영리하고도 엉큼하구나. 하하하.”
양만춘이 껄껄 웃고는 공별을 불러 명하였다.
“백성들이 진흙더미를 날리느라 고생이 많구나. 우리가 당장 나가 싸울 수는 없으나, 뭐라도 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에, 공별이 웃으며 자리로 돌아가 군사들에게 명하였다.
“북을 올려라! 토산을 쌓는 당나라 놈들을 향해 욕설이나 퍼부어주자꾸나!”
이에 거대한 진흙더미가 하늘 위를 날아다니고, 성벽 위 고구려 군사들이 북을 울리며 야유를 퍼부으니, 황제 이세민이 크게 격분하였다.
“이 빌어먹을 안시성놈들! 토산이 완성되어 성벽을 넘으면, 내 필히 안시성의 남자들은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하고 말리라!”
* * *
황제 이세민의 명에 따라 토산 주위의 경계는 설인귀가 맡았고, 토산 위의 경계는 부복애가 맡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부복애는 잠시도 쉬지 않고 날아드는 거대한 진흙더미에 넌더리를 치며 토산 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장군! 수렛길이 무너졌습니다.”
부장이 달려와 보고하니, 부복애가 황급히 토산으로 달려갔다.
그 순간에도 머리 위로 거대한 진흙더미가 날아다녔고, 토산의 일부가 허물어지며 군사들이 생매장당하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토산에 당도해 보니, 정상까지 이어진 수렛길이 진흙더미에 의해 무너졌고, 토산이 붕괴되지 않도록 둘레에 나무로 세운 방벽들도 무너져 있었다.
“파묻힌 군사들을 꺼내고 토산이 무너지지 않도록 주위에 나무로 방벽을 다시 세워라!”
엄히 명하던 부복애의 옆으로 거대한 진흙더미가 유성처럼 떨어졌다.
콰과광!
굉음이 일고, 흙먼지가 자욱히 시야를 가리니 정신이 아득한 부복애는 그만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이때 설인귀가 급히 말을 달려와 소리쳤다.
“장군! 당장 일어나시오!”
부복애가 급히 정신을 차려 일어나니, 설인귀가 말에서 뛰어내려 부복애를 뒤로 잡아 끌었다.
그리고, 부복애가 주저 앉았던 그 자리로 거대한 진흙더미가 벼락치듯 내리 꽂혔다.
콰과광!
귓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부복애와 설인귀가 중심을 잃고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이들의 몸 위로 무너진 토산의 일부가 덮쳤다.
잠시 뒤, 스스로 흙을 파헤쳐 빠져나온 설인귀가 부복애를 흙더미 속에서 구하고는 아직도 토산을 노리고 날아드는 진흙더미들을 바라보았다.
안색이 창백해진 부복애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설인귀의 손을 잡고는 거듭 감사를 표하였다.
“설 장군, 고맙소. 정말 고맙소.”
이에, 부복애를 바라보며 설인귀가 담담히 말하였다.
“장군, 이대로 당하고만 있다가는, 필경 폐하의 진노를 피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허나, 뭔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토산을 쌓는 군사들과는 별개로 장군께선 따로 군사들을 이끌고 토산에 올라 안시성으로 화살을 날리십시오.”
“여기서 화살을 쏜다고 저들이 타격을 입겠소?”
“아무것도 안 하다간, 황제 폐하께서 분명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타격이 있든 없든 토산 위에서 수를 내셔야 합니다.”
설인귀의 조언에도 부복애는 쉴 새 없이 날아드는 거대한 진흙더미들에 기가 질려 감히 토산 위로 오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